“선수에게 유리한 규정” vs “한국야구 자존심 문제”
# 포스팅 시스템의 의미와 절차
포스팅 시스템은 특정 선수에 대한 비공개 경쟁 입찰을 통해 독점 교섭권을 획득하는 제도다. 1998년 MLB 사무국과 일본 야구기구가 미일 선수이적 협약을 개정하면서 처음으로 도입됐다. 당시 메이저리그 진출을 원하는 일부 선수들이 일본 프로야구에서 은퇴를 선언한 뒤 미국 구단과 계약해 논란이 빚어졌기 때문이다.
1994년 긴데쓰를 떠나 LA 다저스에 입단했던 노모 히데오가 대표적인 케이스. 1997년에는 악명 높았던 돈 노무라 에이전트가 미일 선수협정의 빈틈을 교묘하게 이용해 고 이라부 히데키를 지바 롯데에서 뉴욕 양키스로 이적시키기도 했다. 결국 양국 리그 사이의 분란을 방지하기 위해 MLB 사무국과 일본 야구기구가 손을 잡고 새 길을 열었다. 선수에게는 구단의 동의 아래 합법적으로 메이저리그에 도전할 수 있는 길을 열어주고, 원 소속구단은 소속 선수를 내주는 데 대한 보상을 받을 수 있도록 한 것. 그러나 포스팅 시스템을 처음으로 이용한 선수는 공교롭게도 일본 출신이 아닌 한국의 이상훈(당시 LG)이었다는 점이 흥미롭다.
한국 프로야구 출신 선수가 포스팅을 거쳐 메이저리그에 가려면 생각보다 복잡한 절차를 거친다. 일단 프로에서 일곱 시즌을 채워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을 얻는 게 먼저다. 그 후에는 소속구단의 허가도 받아야 한다. 선수와 구단이 해외 진출에 대한 합의를 마친 후에는, 구단이 KBO를 통해 메이저리그 포스팅 신청서를 접수한다. MLB 사무국은 그 후 KBO에 해당 선수의 신분 조회를 요청해 미국 구단과 계약하는 데 문제가 없는 상태인지를 확인한다. 현재 한미 선수 계약 협정에 따르면, 메이저리그 구단이 한국 구단과 계약 상태인 선수 혹은 한국에서 프로나 아마추어로 활동 중이거나 활동한 선수와의 계약 교섭을 시작하기 위해서는 신분조회 과정이 필수라고 명시돼 있다.
KBO가 해당 선수의 자격이 유효하다는 사실을 MLB 사무국에 통보하고 나면, 사무국이 그 선수를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 공시하게 된다. 이때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참고할 수 있는 의료 기록(선수의 트레이너 기록과 의사 보고서)도 첨부해야 한다. 포스팅 공시 가능 기간은 매년 11월 1일부터 이듬해 3월 1일 사이. 공시 이후 4일(휴일과 공휴일 제외) 동안 그 선수에게 관심이 있는 메이저리그 구단들은 각자 판단한 입찰액을 적어낼 수 있다. 선수에 대한 권리를 포기하는 조건으로 한국 구단에 지불하게 될 이적료 개념이다.
공시가 끝나면 MLB 사무국이 가장 많은 응찰액수를 KBO에 통보하고, 한국 구단과 선수는 다시 4일 이내에 응찰액 수용 여부를 밝혀야 한다. 받아들이지 않으면 선수 공시는 그대로 철회되고 그 선수는 다음 11월 1일까지 포스팅에 나설 수 없다. 반대로 응찰액을 수용하면, 그 금액을 적어낸 메이저리그 구단이 독점적이고 양도 불가한 협상 및 계약 권리를 얻게 된다.
계약 협상기간은 응찰액 수용일부터 30일 이내. 그 안에 계약하지 못하면 협상권은 소멸되고 해당 선수의 공시도 다시 다음 11월 1일까지 금지된다. 대신 계약이 성사되면 선수의 새 소속팀은 5일 이내에 원 소속구단에 포스팅 금액을 모두 지급해야 한다.
LA 다저스는 2012년 류현진의 포스팅 당시 한화 구단에 2573만7737달러 33센트를 지급했다.
# 이상훈으로 시작된 한국 선수의 포스팅 역사
사실 류현진 이전까지 한국 선수의 포스팅은 그리 활발하지 않았다. 포스팅 시스템 도입 초창기에 한국의 스타플레이어들이 야심차게 도전했다가 벽에 부딪히는 일이 잦았기 때문이다. KBO리그에 대한 메이저리그의 시선이 지금과는 많이 다르던 시절이라 어쩔 수 없었다.
포스팅 1호 선수였던 이상훈은 1997년 37세이브를 올리며 당시 역대 한 시즌 최다 세이브 기록을 경신한 뒤 1998년 2월 처음으로 메이저리그 전 구단에 공시됐다. 그러나 최고 응찰액이 60만 달러에 그쳤다. LG가 이상훈을 보내는 대가로 받아들이기엔 너무 적은 액수였다. 이상훈은 1998년 LG와 주니치의 임대 협상을 통해 메이저리그 대신 일본에 먼저 진출했다.
이후에도 썩 만족스럽지 못한 역사는 계속됐다. 두산 진필중은 2002년 2월 포스팅을 신청했다가 응찰 구단이 나오지 않아 꿈을 접었다. 한 시즌을 더 뛰고 2002년 12월 재도전을 해봤지만, 2만5000달러라는 터무니없이 적은 액수를 받아드는 데 그쳤다. 두산과 진필중 모두 응찰액을 수용하지 않기로 했다. 비슷한 시기에 도전장을 내밀었던 삼성 임창용 역시 65만 달러의 응찰액이 나와 메이저리그 진출을 포기했다.
포스팅을 통한 첫 계약 사례는 2009년에 나왔다. 다만 상황 자체가 일반적인 포스팅과 달랐다. 이미 마이너리그 생활을 경험해본 롯데 최향남은 메이저리그 마운드에 한번이라도 서보고 싶다는 꿈을 놓지 못해 30대 후반의 나이에 다시 미국 진출을 시도했다. 다행히 세인트루이스와 교감을 이루는 데 성공했지만, 소속팀 롯데가 방출을 거부하고 ‘포스팅 시스템을 통해야만 미국에 보내줄 수 있다’는 조건을 내걸면서 협상 자체가 무산될 위기를 겪었다. 결국 세인트루이스에서 최향남 측의 간곡한 설득을 받아들여 포스팅에 입찰하는 성의를 보였고, 최향남은 101달러라는 상징적인 금액과 함께 마이너리그 계약을 맺었다.
그 다음이 바로 2012년의 류현진이다. 이상훈 이후 15년 만에 처음으로 KBO리그 출신 선수가 포스팅 시스템에서 제대로 가치를 인정받고 메이저리그 계약까지 성공하는 모범적 사례를 남긴 것이다. 한국의 톱 클래스 선수들이 메이저리그로 눈을 돌리기 시작한 결정적 계기였다.
실제로 류현진 이후 KBO리그의 특급 선수들이 줄줄이 포스팅 시스템의 문을 두드렸다. 2014년 말에는 무려 세 명의 국가대표급 선수가 차례로 도전장을 던졌다. 그러나 희비는 엇갈렸다. 가장 먼저 야심차게 나선 SK 김광현의 응찰액은 샌디에이고가 적어낸 200만 달러였다. 기대에 물론 못 미쳤다. 김광현은 고심 끝에 포스팅 결과를 수용했지만, 연봉 협상 과정에서 결국 이견을 좁히지 못했다.
다음 순번인 KIA 양현종은 포스팅 결과를 받아든 뒤 금액을 수용하지 않고 협상을 포기했다. KIA는 응찰 구단과 금액을 공개하지 않았다. 다만 텍사스 지역지에서 “텍사스가 양현종 포스팅에 150만 달러로 추정되는 금액을 적어내 미네소타에 승리했다”는 보도가 나왔다.
그해의 유일한 성공사례는 김광현과 양현종에 비해 한 템포 늦게 포스팅에 나선 강정호였다. 피츠버그가 500만 2015달러라는 금액을 적어 냈고, 계약에 성공해 KBO리그 출신 야수로는 최초로 메이저리그에 직행하는 선수가 됐다. 이듬해에는 강정호와 넥센 중심타선에서 함께 활약했던 박병호가 류현진 이후 두 번째로 포스팅 금액 1000만 달러를 넘기면서 역시 미네소타 이적에 성공했다. 다만 박병호와 강정호 외의 다른 야수들은 아직 만만치 않은 현실을 받아들여야 했다. 2015시즌이 끝난 후 롯데 손아섭과 황재균이 동시에 메이저리그 진출 의사를 밝히자 롯데는 손아섭에게 먼저 포스팅 기회를 주기로 결정했다. 그러나 결과는 ‘응찰 구단 없음’. 손아섭의 실패 후 황재균이 다시 기회를 얻어 반전을 노려봤지만, 이번에도 응찰 구단은 나타나지 않았다.
다나카 마사히로. 사진 출처=뉴욕양키스 공식 페이스북
# ‘포스팅 금액 상한선’이란 어떤 방식인가
포스팅 시스템은 애초에 일본 프로야구와 메이저리그의 협정에서 시작됐고, 한국 선수들이 그 틀을 똑같이 이용해왔다. 그러나 현재 일본 선수들에게 적용되는 포스팅 시스템은 한국의 낙찰 방식과 다르다.
MLB 사무국과 일본야구기구가 2013년 12월에 2000만 달러의 포스팅 상한선을 골자로 하는 신 포스팅 시스템 협정을 다시 맺었기 때문이다. 일본 구단들의 강한 반발에도 불구하고 MLB 사무국의 뜻이 관철됐다. MLB 사무국은 당시 “독점 협상권 대신 선수가 구단을 택할 수 있는 권리를 넓히고, 재정이 넉넉하지 않은 구단에도 일본 선수를 영입할 수 있는 기회를 주는 것”이라고 설명했다. 2000만 달러 한도 내에서 양도금을 설정하고, 그 금액을 지불할 수 있는 모든 구단이 선수와 자유롭게 협상할 수 있는 방식이라서다.
그 첫 케이스가 바로 2014년 뉴욕 양키스에 입단한 다나카 마사히로다. 일본 선수들의 포스팅 금액은 2000년 시애틀로 이적한 스즈키 이치로의 1312만 5000만 달러부터 시작했지만, 2006년 마쓰자카 다이스케(보스턴·5111만 1111달러 11센트)를 거쳐 2011년 다르빗슈 유(텍사스·5170만 3411달러)로 이어지는 동안 점점 더 엄청난 수준으로 불어났다. 이 때문에 양키스, 보스턴, 텍사스 같은 일부 빅마켓 구단들만 일본 선수를 데려올 수 있다는 지적이 나왔던 것이다.
다나카 역시 일본에서 24승 무패의 신화를 쓰고 포스팅에 나선 터라 마쓰자카나 다르빗슈를 능가하는 응찰액이 예상되는 상황이었다. 그러나 양키스는 바뀐 규정 덕분에 단돈(?) 2000만 달러에 다나카를 데려올 수 있었다.
박병호가 2015년 12월 2일(현지시간) 미국 미네소타주 미니애폴리스 타깃 필드에서 열린 공식 입단 기자회견에서 테리 라이언 단장과 악수하는 모습.
사실 신 포스팅 시스템은 원 소속구단보다 선수에게 훨씬 유리한 규정이기도 하다. 일본 구단이 받을 수 있는 이적료는 확 줄어드는 대신 선수가 받는 몸값이 늘어날 수밖에 없다. 실제로 다나카는 양키스와 7년 1억 5500만 달러에 계약했는데, 이전의 포스팅 시스템에서 역대 최고 응찰액을 기록했던 다르빗슈의 몸값(6년 6000만 달러)보다 연 평균 두 배나 많다.
미네소타 박병호는 다나카의 반대 사례다. 스몰마켓 팀인 미네소타는 넥센에 1000만 달러가 넘는 이적료를 지불한 대신, 박병호에게는 4년 1200만 달러가 적힌 계약서를 내밀었다. 포스팅 비용에 지출이 커지자 상대적으로 박병호의 몸값을 줄일 수밖에 없었던 것이다.
따라서 MLB 사무국이 한국에도 신 포스팅 시스템의 적용을 제안한 것은 선수들에게 희소식일지도 모른다. 문제는 ‘800만 달러’라는 금액이 일본에 비해 지나치게 적다는 것이다. 한국의 야구인들이 “돈을 떠나 자존심이 걸린 문제”라며 반발하는 이유다.
배영은 스포츠 자유기고가
류, 2573만 7737달러 33센트… 한국인이 좋아하는 3·7 반복 포스팅 금액에 숨은 비밀 메이저리그 구단들이 경쟁적으로 적어내는 포스팅 금액에는 사실 해당 선수에 대한 남다른 관심과 애정이 숨어 있다. 멀리 갈 것도 없이 대한민국 에이스 류현진(LA 다저스)의 포스팅 금액이 그랬다. 다저스가 류현진의 독점 협상권을 낙찰 받은 금액은 무려 2573만 7737달러 33센트. 2500만 달러에 굳이 73만 7737달러를 추가한 것도 재미있지만, 동전으로 33센트까지 덧붙인 게 압권이다. 맨 처음 구단 이름 없이 응찰액만 공개됐을 때는 텍사스주 지역 번호인 ‘737’이 두 차례나 이어진다는 점 때문에 텍사스가 포스팅에서 승리했다는 추측이 나왔을 정도다. 당시 LA의 한 지역지는 이에 대해 “다저스가 류현진과의 좋은 인연을 위해 행운의 숫자인 7과 한국인들이 가장 좋아하는 숫자 3을 일부러 여러 번 적어 넣었다”는 기사를 실었다. 당시 다저스 단장이었던 네드 콜레티 선임고문이 이웃에 사는 한국인에게 “한국인이 어떤 숫자를 좋아하느냐”고 묻자 그 이웃이 “한국에서는 ‘3’이 좋은 관계를 이어가게 만드는 숫자”라고 대답했다는 것이다. 다르빗슈 유(텍사스)가 기록한 역대 포스팅 최고 금액 5170만 3411달러 안에는 의미 있는 등번호 두 개가 숨어있다. 구단주이자 메이저리그 레전드 투수였던 놀란 라이언의 ‘34’와 니혼햄 시절 다르빗슈가 달았던 ‘11’이다. 그런가 하면 피츠버그는 2014년 말 강정호의 포스팅에 500만 2015달러를 써냈다. 2015년부터 함께 뛰자는 의미, 그리고 다른 구단이 500만 달러를 적어낼 경우 꼭 이기겠다는 의지가 담겨 있다. 다만 일본의 포스팅 시스템에는 2013년 말부터 2000만 달러의 상한선이 생겼다. 한국 역시 곧 비슷한 방식으로 변화하게 될 전망이다. 포스팅 금액의 비밀을 찾아내는 재미는 이제 없어질 듯하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