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능성만 믿고 한 ‘도박’ 통했다”
▲ 김학범 성남 일화 감독은 선수를 데려올 때 “가능성을 믿고 ‘도박’을 벌였다”고 밝혔다.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시즌이 채 끝나지 않은 상태에서 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뒤 여기저기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을 하나둘씩 소화해 내고 있는 그에게 여느 인터뷰와는 다른 뭔가 색다른 질문을 해야하는 ‘숙제’를 안고 ‘설렁탕 인터뷰’를 시작했다.
생뚱맞은 설렁탕 인터뷰
김학범 감독은 술을 못 마신다. 외형상의 ‘견적’으론 소주 서너 병은 거뜬하게 소화할 것 같은데 소주 반 병을 넘기면 그냥 잠에 곯아떨어진단다. 그래서 설렁탕으로 아쉬움(?)을 대신하며 인터뷰를 진행할 수밖에 없었다. 더욱이 김 감독은 이미 선수단과 어쩔 수 없이 먼저 식사를 하고 온 바람에 기자만 김 감독 앞에서 꾸역꾸역 밥을 먹는 이상한 모양새가 연출됐다. 그러다보니 질문을 해야 하는데 허기진 배를 채우느라 말이 나오지 않았다. 그때 김 감독의 ‘눈물겨운 배려’가 이어진다. 질문을 예상하고 알아서 대답을 하기 시작한 것.
“좋은 지도자는 말이에요, 소속팀을 최상의 상태로 끌어올리는 능력이 있느냐, 없느냐의 차이죠. 근데 해보니까 운도 따라야해. 솔직히 가르치는 건 거기서 거기 아니겠어요? 운 때가 맞아야 하는 거거든. 나요? 운이 좋은 사람이지. 지난해 후기 리그 우승에 이어 올 시즌 전기리그 우승까지 차지했으니 이만하면 운 좋은 거 아닌가?”
또 다시 앞에서 밥 먹는 사람을 위해 ‘알아서 대답’을 하는 김 감독.
“우리 팀은 어느 팀보다 일찍 준비했어요. 용병이나 FA 등을 미리 마무리짓고 첫 훈련할 때 선수 전원이 참석을 했죠. 대표팀에 나가 있었던 선수들도 합류해서는 단 한 명도 퍼지지 않고 좋은 컨디션을 발휘했어요. 만약 대표팀 애들이 퍼졌다면 힘들었을 지도 몰라. 이런 거 저런 거 따져보면 역시 난 운이 좋네. (잠시 뜸을 들이다가) 거, 대충 드셨으면 이젠 질문 좀 하지. 혼자 말 하려니까 영 쑥스럽네. 하하”
▲ 지난 30일 전기리그 우승을 확정지은 뒤 헹가래를 받고 있는 김 감독. | ||
김학범 감독은 성남 일화의 사령탑에 앉기 전부터 오랫동안 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했다. 그러다보니 우리나라 대표팀 감독에 대한 연구가 누구보다 해박하다. 특히 해마다 유럽 등지로 나가 세계 명장들의 리더십을 현장에서 직접 보고 느낀 부분들도 지금의 지도자 생활에 큰 도움이 된다고 한다. 김 감독은 가장 인상적이었던 감독으로 역시 히딩크 감독을 꼽는다.
“그분은 정말 심리전의 명수예요. 선수들의 심리를 교묘하게 움직이는 데 탁월한 솜씨가 있죠. 지금의 아드보카트 감독도 심리를 활용하는 리더십을 보이지만 히딩크 감독과는 좀 색깔이 달라요. 히딩크는 선수를 버린 다음에 다시 거두는 스타일이에요. 2002년 월드컵 때도 홍명보나 안정환 등은 아예 버린 자식 취급했잖아요. 그러다 막판에 뽑은 거였죠. 아드보카트는 언론 플레이를 통해 선수들에게 무언의 메시지를 전하면서 선수들에게 긴장감을 심어주죠. 그런 점은 감독인 나도 배워야 하고 부러운 부분이에요.”
쿠엘류와 본프레레
김 감독은 축구협회 기술위원으로 활동할 당시 쿠엘류 감독과의 일화를 조심스럽게 털어 놓는다. 쿠엘류 감독이 아시안컵 최종 예선을 ‘쇼크 사태’로 몰아 넣고 기술위원들 앞에서 해명하는 시간이 있었다. 그때 쿠엘류 감독은 “선수가 없어서 이런 성적밖에 내지 못했다”는 내용을 장황하게 늘어놓았다고 한다. 그때 김 감독은 너무 화가 나서 통역에게 똑바로 전해달라며 이런 말을 퍼부었단다. “여보슈! 선수가 없으면 좋은 선수가 있도록 만들어 놔야지, 그거 하라고 비싼 돈 들여 당신을 데려온 건대 매일같이 선수 탓만 하면 당신이야말로 능력이 없는 거 아냐!”
“본프레레 감독은 선수 파악조차 못한 것 같았어요. 한마디로 준비가 덜 된 거였죠. 지금까지 여러 감독들을 비교해 보면 뭔가 있는 감독은 달라요. 미디어를 상대하는 거나, 위기를 풀어가는 능력들이요.”
김학범과 무리뉴
성남 일화의 우승과 함께 김학범 감독의 성공 스토리가 조명을 받으면서 가장 자주 비교된 감독이 영국 프리미어리그 우승팀 첼시를 이끄는 무리뉴 감독이다. 두 사람의 공통점은 선수 시절 빛을 보지 못하다가 지도자로 성공 시대를 쓰고 있다는 것과 스타 플레이어에 의존하기보다는 선수를 조련하는데 일가견이 있다는 부분이다.
“듣고 보니 비슷한 것 같긴 하네. 물론 무리뉴 감독은 날 모르겠지만 말예요 하하. 첼시를 보면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처럼 유명한 선수들이 많지 않아요. 대신 팀 플레이를 잘 하는 선수들로 채워져 있죠. 레알 마드리드 보세요. 날고 기는 유명한 선수들은 죄다 불러 모아놨어요. 포지션이 중복돼도 잘 뛰는 애라면 무조건 데려왔지. 피구가 있는 데 베컴을 불러들이고 호나우두가 있는데 오언이나 라울이 같이 존재한다는 건 서로에게 득보단 실이 많거든. 머리 큰 선수들이 많으면 아무래도 자주 부딪힐 수밖에 없어요. 난 내가 장악할 수 있는 선수를 데려와요. 아마 무리뉴 감독도 마찬가지였을 걸요.”
한때 이동국 대안으로 거론됐던 우성용을 비롯해 남기일 김두현 조병국 박진섭 등은 모두 다른 팀에서 주전 자리를 꿰차지 못하고 맴돌았던 선수들이었다. 그런데 이 선수들이 성남 우승의 일등 공신들이다.
“가능성을 봤던 거죠. 그걸 믿고 ‘도박’을 벌였다고 해야 할까. 만약 그 선수가 죽으면 그 화살이 누구한테 오겠어요. 몇몇 선수들은 주위에서 절대 안 된다고 반대를 하기도 했어요. 하지만 난 좀 더 멀리 봤어요. 장기적인 관점에서 분명 우리 팀에 도움을 줄 수 있다고 믿었기 때문에 과감히 ‘도박’을 했던 거예요.”
K-리그 득점왕 김도훈이 은퇴를 했을 때 김 감독은 그다지 큰 걱정을 하지 않았다고 한다. 오랫동안 믿고 기다린 우성용이 존재했기 때문이다.
▲ 김학범 감독은 인터뷰를 하면서도 기자를 위한 배려를 아끼지 않았다. | ||
명지대를 졸업한 뒤 국민은행에서 92년까지 선수로 활동했던 김학범 감독은 대표팀과는 인연이 없었지만 현역에서 은퇴한 직후엔 생뚱맞은 인연을 맺어갔다. 바로 운동장이 아닌 은행에서 대리로 6개월을 근무하게 된 것.
“은행 가면 텔러 뒤에 도장 찍는 사람 있잖아요. 제가 그 역할을 맡았거든요. 그런데 매일 공만 차던 사람이 은행 업무를 본다는 게 말이 됩니까. 은행 측에서도 아무한테나 결재 업무를 맡길 리도 없구요. 그래서 그 대리 직함을 달기 위해 얼마나 공부를 열심히 했는데요, 시험에 통과하지 못하면 발령을 못 받게 됐거든요. 난생 처음 시력까지 나빠질 정도로 책과 씨름하면서 새로운 흥분도 느꼈습니다. 그런데 말이죠. 은행 일은 밤 새서 못하겠더라구요. 축구는 밤을 새라고 해도 재미있는데요.”
김 감독은 이후 국민은행 코치를 맡아 잠시 축구 속에 빠져 지내다 IMF를 맞아 팀이 해체되면서 또 다시 은행으로 들어갔다. 그러다 비쇼베츠 감독이 이끄는 96애틀랜타올림픽 대표팀 코치로 합류하면서 은행과는 완전 결별 선언을 했다.
“제가 지금까지 은행에 있었다면 아마 지점장 정도는 돼 있을 거예요. 후회요? 아뇨. 전혀요. 아내 덕분이예요. 아내의 이해가 아니었다면 지금 여기 있지 못했어요. 은행원은 생활이 보장돼 있잖아요. 그러나 지도자는 언제 어떻게 될지 알 수 없는 거거든요. 그래도 제가 좋아하는 일 하라고 밀어준 사람이에요. 그러기 힘들었을 텐데 말이죠.”
2006 독일월드컵
현재 성남 일화에는 독일월드컵 최종 엔트리 승선을 기다리는 후보자들이 4명 있다. 장학영, 김상식, 김두현, 김영철이 그들. 그들 중 과연 누가 최종 명단에 포함될 것 같으냐고 물었다. 고백하건대, 이 질문은 우문이었다.
“우리 식구라 그런지 난 4명이 다 좋은 놈들인 것 같아. 하하. 장학영도 지금 거론되는 다른 선수보다 훨씬 나아요. 김상식, 김두현, 김영철, 빠질 선수가 없잖아. 다 잘 됐으면 좋겠는데 뭐, 내가 아드보카트 감독이 아니니까 희망사항일 수밖에요.”
김 감독은 보통 경기는 15명이나 16명 사이에서 운영된다고 한다. 나머지 7~8명은 벤치 멤버로 월드컵을 지켜볼 수밖에 없다고 설명했다. 16강 진출 여부를 물어보니까 이렇게 난색을 표한다.
“난 말 못해요. 오해 받을 수도 있기 때문에. 잘 풀어가야죠. 다 같은 마음으로 응원을 해야 하니까 지금은 부정적인 생각은 하지 말자구요.”
인터뷰 말미에 지금의 자리에 대해서 절대 연연해하지 않는다고 다짐하듯이 말하는 김 감독이 이런 명언을 남겼다.
“내 수명(감독 자리)은 올해가 마지막이라는 심정으로 살아요. 항상 잘릴 수 있다고 생각도 하구요. 아마도 성적이 나쁘면 내가 못 견뎌서 그만 둘 거예요.”
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