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들의 ‘쿨함’을 기억하라
▲ 올리버 칸은 독일월드컵대표팀 주전에서 밀려났지만 대범한 모습을 보여주고 있다. | ||
아드보카트 감독의 경우 대부분 예측 가능한 엔트리 결정이 될 것 같아 큰 스릴은 없다. 그러나 겨우 4년에 한 번 치르는 이 대회에 나가고 못 나가고는 불과 7년 정도의 전성기와 5년 정도의 조정기간을 갖는 수명 짧은 프로 축구 선수들에게 너무나 중요한 동기를 부여하게 된다. 특히 유럽과 같은 상설 축구 무대가 마련되어 있지 않은 아시아, 그중에서도 한국은 월드컵 참가가 선수 생명을 좌우하는 계기가 될 수도 있을 것이다.
가장 대표적인 것이 2002년 십자인대 파열로 조기 탈락한 고종수다. 히딩크 감독은 그의 팀 전술 적응 능력을 호되게 혹평하기는 했지만 개인적 재능은 상당히 아까워했다. 그리고 얼마 전 K-리그에서 축구 인생의 마지막을 불살랐던 김도훈. 몇 번의 찬스를 부여했음에도 전방 스트라이커로서의 끈기와 일관된 득점력에 결함을 노정시킴에 따라 결국은 히딩크 감독의 마음을 움직이지 못했다.
선수보다 한 인간으로서 대단히 겸손하고 예의바르며 매우 믿음직한 청년으로 김도훈을 평가했던 나는 4년 전 히딩크 감독에게 ‘내가 할 소리는 아니지만 김도훈은 정말 훌륭한 성격의 소유자인데 뽑히지 못해 안타깝다’라고 언급한 적이 있었다. 그랬더니 그 역시 김도훈의 인간적인 면모에 인상이 깊었던 탓인지 쉽게 반응을 하지 않다가 한참 만에 ‘너도 그렇게 보니?’라고 답하면서 말을 제대로 잇지 못했다. 하지만 김도훈은 그때의 아픔을 씻어낸 듯 K-리그 득점왕에 올라 갖가지 기록들을 갱신하면서 월드컵 탈락의 상처를 말끔히 날려버렸다.
이동국 역시 마지막 순간까지 최용수와 공격진 한 자리를 놓고 경쟁하다 종이 한 장 차이로 비껴갔던 것을 새삼 서글프게 회상하고 있다. 이번에 또 부상으로 좌절된 것이 너무나 안타깝게 느껴질 따름이다. 세레소 오사카에서 뛰고 있던 김도근 역시 왼쪽 미드필더 자리를 놓고 이을용과 각축을 벌이고 있었지만 도대체 한 치의 실수도 저지르지 않는 이을용의 플레이 때문에 도저히 그 자리를 비집고 들어갈 수가 없었다. 김도근은 김상식이 대표팀에 자주 들락거리기 이전 식사 시간을 즐겁게 하던 최고의 분위기 메이커였다. 그의 걸쭉한 입담을 월드컵 기간 중 한 번도 듣지 못한 것이 매우 유감스러울 정도였다. 엔트리에 들었으나 한 경기도 뛰지 못했던 윤정환, 마지막 터키와의 3, 4위전에 겨우 잠깐 모습을 드러낸 뒤 경기 종료 휘슬과 함께 결국 울음을 터뜨린 최태욱….
▲ 김도훈 | ||
반대로 월드컵에 나갔어도 신통찮은 플레이로 선수 생활을 더 어렵게 만든 경우도 많다. 94년 미국월드컵에서 네 번째 우승을 차지하고도 졸전이라는 혹평을 면치 못했던 브라질의 라이, 역시 98년 프랑스월드컵 첫 경기에 주전으로 나섰다가 곧바로 제외된 브라질의 지오바니, 98년 대회 때 프랑스가 우승을 했음에도 단 한 골을 넣지 못해 전 유럽의 클럽에 완전히 멸시당했던 기바쉬, 한 골을 넣었지만 역시 평균치 이하로 떨어졌던 두가리, 키신저에게 ‘20세기의 마지막 마술사’란 칭호를 얻고도 월드컵에선 여전히 과락을 못 면하고 있는 델 피에로….
이 모든 수사는 이번에 나가지 못하는 선수들을 다독거려 주고 싶은 심정에서 비롯된다. 옌스 레만에게 주전 자리를 빼앗긴 올리버 칸은 자존심이 극도로 상했을 것이나(골키퍼에게 있어 비주전이란 사실상 탈락을 의미한다) 2순위 자리를 지키겠다고 겸허하게 현실을 받아들였다. 반면 독일의 뵈른스나 멕시코의 블랑코처럼 감독과 대표팀을 원망하고 다니면 정말이지 맥이 빠진다. 자갈로 감독과 사이가 좋지 않았던 호마리우는 자신이 소유한 레스토랑의 화장실 변기에 자갈로의 초상을 그려 놓은 적이 있었다. 지나친 조크에 대한 신의 저주가 있었던지 호마리우는 발목 부상으로 98 월드컵에 참가하지 못했다.
정말 어렵겠지만 이번에 뜻대로 되지 않았다 하더라도 올리버 칸처럼 대범한 모습을 보이자. 그리고 김도훈처럼 가슴에 묻어 두었다가 다른 기회에 발산시키자.
2002년 월드컵 때 지금의 올리버 칸 같은 신세였던 김병지. 히딩크 감독은 최종명단이 든 종이를 들고 다니다가 나를 보자, ‘어이 진, 한국 사람들은 왜 그리 김병지를 좋아하냐? 이운재도 안정감이 있잖아’라고 말했다.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어이 보스, 김병지는 바티스투타 닮았잖아!’ 단 5분도 뛰지 못했던 김병지는 월드컵 동안 터질 듯한 가슴을 쓸어내리면서 잘 참아주었다. 그래도 4강의 영웅 중 한 명이다.
2002월드컵 축구대표팀 미디어 담당관
현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