속도의 블랙홀에 빠뜨려라
▲ 2002년 한국과의 친선경기에 출전했던 지단. 당시 부상을 당해 월드컵을 포기했다. | ||
선수 구성이 화려하기 그지없다. 브라질과 견주어도 뒤지지 않는다. 세계 최고의 스트라이커로 꼽히는 티에리 앙리(아스널)와 아르헨티나인의 피가 흐르는 타깃맨 다비드 트레제게(유벤투스) 투톱은 어느 감독이라도 욕심 낼 만한 말 그대로 ‘드림 라인업’이다. 앙리는 그 어렵다는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 3시즌 연속 득점왕에 올랐고 트레제게는 이탈리아 세리에A 득점 랭킹 2위를 차지했다. 무섭기까지 하다는 표현이 나올 정도다. 은퇴했다 컴백한 판타지 스타 지네딘 지단(레알 마드리드)은 또 어떤가. 춤을 추듯 필드를 누비며 우아하면서도 날카로움을 과시하는 패싱은 단연 세계 최고로 꼽힌다. 더욱이 이번 월드컵을 끝으로 선수 은퇴라는 배수진을 친 상태라 각오와 기세가 하늘에 닿아 있다.
놀라운 사실 하나를 공개한다. 프랑스가 2002월드컵 이후 쉰 경기 가까이 치르는 동안 패한 경기는 고작 세 게임뿐이다. 평가전과 같이 느슨한 경기만 있었던 게 아니다. 2004유럽선수권 본선과 2006월드컵 지역예선 등 험난한 여정 속에서 거둔 성과다. 놀라울 따름이다.
수비가 그만큼 강하다는 방증이다. 2006월드컵 유럽 예선에서도 10경기에서 2골만을 내줘 평균 0.2실점이라는 경이로운 방어율을 기록했다. 지구촌 넘버원·투 경합을 벌이는 수비형 미드필더 라이벌 클로드 마켈렐레(첼시)와 패트릭 비에이라(유벤투스)가 한 팀에서 뛴다는 자체가 혀를 내두르게 한다. 실베스트르(맨체스터 유나이티드)-갈라스(첼시)-튀랑(유벤투스)-사뇰(바이에른 뮌헨)로 이어지는 포백라인은 철옹성이라는 수식어를 달고 있을 만큼 강하다.
▲ 지난 2002년 한국과의 친선경기 당시 프랑스 대표팀 선수들. 앞줄 오른쪽 끝에 트레제게와 앙리, 그 뒤에 지단의 모습이 보인다. | ||
이 대목에서 언급할 게 있다. 그 무섭다는 앙리와 트레제게는 무엇을 했단 말인가. 또 지단은? 표면적으로는 앙리와 트레제게는 부상으로 동시에 투입된 경기가 전무하다시피 했고 지단은 은퇴했다 돌아와 지역예선 말미에나 출전했다는 이유를 들 수 있다. 하지만 진실은 좀 더 깊숙한 곳에 있다. 이상하게도 앙리는 대표팀에만 오면 작아진다. 클럽에서는 누구도 막기 힘들 만큼 파괴적인 골 결정력을 과시하면서 대표팀 경기에만 출전하면 침묵한다. 2002월드컵이 그랬고 2004유럽선수권이 또 그랬다. 2006월드컵 지역예선이라고 다르지 않았다. 이를 두고 프랑스 현지 언론들의 갑론을박이 쏟아졌는데 결론은 당황스럽게도 앙리가 대표팀에 대한 의지가 없어 빚어진 ‘사태’라는 것이다. 어찌됐건 앙리를 상대해야 할 우리로서는 반갑기만 한 징크스다.
‘지단 딜레마’라는 것도 있다. 지단의 침투 패스는 가히 세계 최고다. 패스 한 방으로 동료에게 골키퍼와 1대1 상황을 만들어준다. 지단을 프랑스 축구의 예술가 미셸 플라티니와 비교하는 건 이 때문이다. 하지만 어느 영화 카피처럼 지단은 느리다. 단순히 나이가 많음을 말하는 것이 아니다. 지단 플레이의 특징은 공이 오면 일단 잡은 뒤 어디로 줄지 생각한 뒤 연결한다. 그러다보니 경기 전개가 전체적으로 느려진다. 현대축구에 있어 속도는 결정적인 요소라 할 수 있다. 공수를 빠르게 전환하지 못하면 경기를 지배할 수 없고 결국 패하고 만다. 지단의 패스는 환상적이지만 속도는 비관적이다. 지단의 딜레마를 기억해 둘 필요가 있다.
선수단 내 불안 요소가 잠재하고 있는 것도 프랑스대표팀의 근심거리다. 레이몽드 도메네크 감독과 선수들의 알력으로 팀 분위기가 어수선하다. 한마디로 선수들이 감독의 말을 듣질 않는다. 도메네크 감독은 10여 년 동안 청소년대표팀을 이끌다 2004유럽선수권 이후 국가대표팀 지휘봉을 잡았다. 사실 이력은 이게 전부인 만큼 스타플레이어 출신의 대중성이나 오랜 경험에 따른 강력한 리더십을 발휘하지 못하고 있다.
반면에 98월드컵 우승 멤버들, 즉 지단을 중심으로 한 세계적 슈퍼스타들의 발언권과 비중이 비대하다는 것이 도메네크의 입지를 더욱 좁히는 요인이다. 쿠페(리옹)냐 바르테즈(마르세유)냐 라는 주전 골키퍼 선정을 놓고 의견 충돌을 빚고 있는 것이 대표적인 사례다. 바르테즈는 지단의 절친한 친구다. 감독의 ‘영’이 서질 않으니 중심이 제대로 잡힐 리 없다.
박문성 SBS 해설위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