더도 덜도 말고 폴란드전만 같아라
▲ 스코틀랜드 글래스고 머레이 파크에서 몸을 풀고 있는 대표팀 선수들. 가운데 이천수와 박지성의 학다리 자세가 춤을 추는 듯 재미있다. 연합뉴스 | ||
아드보카트 감독은 조금 달랐다. 개막 직전 너무 강한 상대와 싸워 결과가 시원찮으면 선수들 사기에 지장을 초래할 것이라는 우려 때문에 토고와 스위스전을 감안한 세네갈-보스니아 헤르체고비나, 가나-노르웨이를 마지막 수능 대상으로 택했다. 들려오는 얘기론 에이레(아일랜드)가 한국팀과 그토록 시합하기를 갈망했다고 한다. 그러나 아드보카트 감독은 과거 네덜란드의 에이레 징크스를 염두에 둔 탓인지 거부했다는 후문이다. 에이레는 일단 자국에서 하는 홈경기의 경우 지긋지긋할 정도로 승률이 좋은 데다 과격한 태클을 하는 팀이라 월드컵 직전의 워밍업으로는 적절치 않은 상대다. 히딩크 감독과 전혀 다른 생각이지만 아드보카트 감독의 판단은 옳다. 2002년 직전과 2002년 이후는 너무나 상황이 다르기 때문이다.
독일 역시 룩셈부르크를 마지막 연습 상대로 설정, 7 대 0이라는 대량 득점을 올리면서 사기를 북돋우고 있다. 브라질도 마지막 스파링은 뉴질랜드와, 잉글랜드는 헝가리 자메이카와 아르헨티나는 앙골라와 마지막 연습 경기를 치른다. 아마도 개막 직전에 불필요한 에너지 낭비를 막겠다는 축구 강국들의 기본 전략으로 보인다.
우리 조의 프랑스는 한국을 의식한 것인지 마지막 상대를 중국으로 골랐다. 같은 아시아지만 우리와 중국은 전혀 다르다. 여하간 프랑스는 지난 대회에 워낙 헤맸던 탓에 이번 대회만큼은 상당히 벼를 것으로 짐작된다. 지단의 고별 무대이자 한 세대를 풍미했던 수많은 스타들의 마지막 피날레가 되는 이번 월드컵에서 프랑스가 첫 경기 상대인 스위스를 가볍게 제압해야 우리한테도 유리하다.
토고는 별로 돈도 없는 나라가 굉장히 빨리 독일에 입국해서 캠프를 차렸다. 32개국 중 전력이 가장 지리멸렬한 나라가 가장 먼저 콜로세움으로 들어 온 셈이다.
아드보카트 감독이 스코틀랜드에 진을 치는 것을 이상하게 여기는 사람들이 많은데 너무 빨리 독일 현장에 들어오는 것도 문제가 있다. 빨리 가서 현지 적응 기간을 늘리는 것도 일리는 있지만 오히려 선수들이 갑갑해하고 지루해할 우려가 있다. 마라톤의 황영조도 92년 올림픽 때 미리 현지에 가 있었던 것이 아니고 마드리드 등 주변을 빙빙 돌다가 막바지에 바르셀로나에 입성했다. 솔직히 말한다면 토고가 정신적으로 지치기를 바란다.
스위스는 월드클래스가 없는 대신 강한 조직력을 바탕으로 일관된 경기력을 유지해 오고 있다. 져서 별로 잃을 것이 없다는 팀워크 위주의 정신 상태가 자신있는 플레이로 나타난다. 스위스 국민들도 남미 국가와 같은 광적 기대를 하지 않기 때문에 오히려 차분히 개막전에 임할 것으로 본다. 다행히 미드필드의 중추격인 하칸 야킨이 부상인데다 포겔은 전성기가 지난 지 이미 오래다. 이를 잘 이용해 보는 것이 돌파구일 수도 있다.
이전에 미리 예견한 것처럼 우리 대표팀은 A매치 한 경기를 치를 때마다 장점과 단점에 대한 과잉 분석으로 언론의 도마 위에 오르곤 했다. 뻔한 얘기지만 세네갈전에는 문제가 많았다가 보스니아전을 통해 완전히 회복되었다는 조변석개식 해석이다. 다시 말하지만 월드컵 직전의 리허설은 별로 큰 의미가 없다. 98년 멕시코는 감독이 급거 교체되고 국내 아마 대학팀에 7골을 내주는 말도 안 되는 수모를 당했으나 조 예선 1위로 16강에 진입해 독일을 벼랑 끝까지 몰고 간 적이 있다. 역시 98년 네덜란드에 5골을 내주고 혼이 난 나이지리아도 스페인과 불가리아를 차례로 격파하면서 1라운드를 가볍게 끝낸 적이 있다. 알 수는 없다. 어차피 패자 부활전이 없는 월드컵은 단 한 경기만으로 돌이킬 수 없는 승점이 결정되어 버리기 때문이다.
2002년 때도 마찬가지지만 대표팀의 경기력은 수비형 미드필더의 안정성과 경기 조율 능력에 따라 상당한 차이를 보이게 마련이다. 당시는 그래도 김남일이 기대 이상의 성과를 보여 주었기에 탄탄한 수비 조직력을 견지할 수 있었으나 지금 대표팀의 공수 연결 고리에 해당하는 플레이어들의 실력은 별로 검증된 바가 없다. 이을용은 중앙에 적합하지 않으며 김두현은 스타팅이 못된다. 이호는 아직 국제 경험이 충분치 않다. 4년 전 이용수 기술위원장이 프랑스의 파트릭 비에라와 같은 묵직한 존재를 갈망했던 것은 그러한 이유에서다.
결국엔 박지성의 고군분투를 기대할 수밖에 없지만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미 이름이 알려질 대로 알려진 박지성이 집중 마크를 당할 경우 확실한 대안이 준비되어 있어야 한다. 이영표, 조원희, 김동진의 공격 가담시 수비 라인으로 복귀하는 미드필더들의 신속한 대처 등이 마지막으로 손질해야 할 부분이 아닌가 생각된다.
4년 전 폴란드전을 앞둔 히딩크 감독은 홍명보를 불러 만약 첫 경기에 패하더라도 팀의 사기가 흔들리지 않도록 주장이 잘 추스르기를 바란다고 전했다. 이번에도 적용되는 말이겠지만 만약 토고전이 뜻대로 되지 않는다면 나머지 두 경기에서 우리가 승점을 제대로 확보할 가능성은 희박해진다. 하지만 그렇다고 토고전의 승패 여부를 절대적인 교두보로 간주할 경우 선수들에게 지나친 긴장과 중압감이 주어질 수도 있다. 더도 말고 덜도 말고 2002년 폴란드전만 같아라.
2002년 월드컵대표팀 미디어 담당관
현 독일대사관 참사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