눈물과 함께 먹던 ‘삼겹살의 추억’
▲ 지난 93년 중학생이던 설기현이 전국체전 우승 뒤 강릉 시내에서 행진을 하고 있다. 비쩍 마른 모습이 당시 어려웠던 사정을 말해주는 듯. | ||
불과 얼마 전까지 손에서 일을 놓지 못했던 김 씨는 설기현의 강한 만류에 장사를 그만두고 집에서 살림만 한다. 그러나 일을 안 하니까 오히려 더 병이 날 것만 같다고. 그래서 최근엔 동네 사람들과 함께 소일 삼아 감자를 캐러 다닌다. 그러면서 덧붙이는 한 마디. “내가 감자 캐러 다닌다고 하면 기현이가 뭐라 할 텐데….”
기현이 아버지는 탄광촌에서 일하는 광부였다. 석탄 캐는 일이라는 게 목숨을 담보로 하는 직업이라 집을 나서는 남편의 뒷모습을 볼 때마다 항상 불안한 기운을 떨칠 수가 없었다. 그래도 그 일을 해야 우리 여섯 식구가 먹고 살 수가 있어 힘들고 고달픈 일이라는 걸 뻔히 알면서도 남편을 내보내야 했다.
아들만 넷을 둔 우리 부부는 딸을 원했다. 그러다 뒤늦게 딸이 태어났고 나보다 남편이 더 기뻐하고 행복해 했다. 하지만 아기가 세상에 나올 때부터 신통치가 않았다. 젖도 잘 물지 않고 시름시름 앓는 게 이상해서 이 병원 저 병원 다 데리고 다니며 진찰을 받았는데 결국엔 생명의 끈을 이어가지 못하고 눈을 감고 말았다.
나보다 남편의 슬픔이 훨씬 컸다. 고명딸이라고 밤잠 안 자면서 간호하고 돌봤는데 막상 얼마 살지도 못하고 세상을 떠나버리니까 남편은 큰 충격을 받았다. 몇 날 며칠을 술로 지새우며 눈물을 쏟아냈다. 일 할 생각도 안 했고 술로 고통을 잊으려 했다. 막장 기술이 대단했던 남편은 몸을 추스른 후부터 다시 일을 시작했지만 저녁마다 술을 마시고 들어왔다.
그러다 사고가 났다. 막장이 붕괴되면서 기현이 아버지가 목숨을 잃은 것이다. 그때 우리한테는 5세, 6세, 9세, 11세의 아들이 있었다. 정부미 한 가마니를 사면 한 달도 되기 전에 동이 날 만큼 먹성 좋은 아들이 네 명이었는데 이 아이들을 놔두고 기현이 아버지가 먼저 세상을 떠난 것이다.
슬퍼할 여유가 없었다. 장례를 치르고 난 뒤 보상금으로 나온 2000만 원에서 300만 원의 빚을 갚고 나니까 1700만 원이 전재산으로 남았다. 이 돈으로 아들 넷을 잘 키워야 하는 게 내 운명이자 숙제였다. 아무리 못 살아도 ‘애비 없는 자식’이란 소린 듣게 하지 않으려고 발버둥을 쳤다. 내 몸이 부서지고 으스러지는 한이 있어도 모두 고등학교는 졸업시키자고 결심했다.
우리 가족은 강릉으로 이사를 했고 남은 돈으로 집을 장만했는데 아이들 뒷바라지하느라 일할 엄두를 못내는 바람에 있던 돈을 조금씩 까먹기 시작했다. 결국 집을 팔고 전셋집으로 내려 앉았고 마지막엔 월세 방 신세를 지는 등 생활이 궁핍해져 갔다.
너무 너무 사는 게 힘들었던 시절엔 아들 네 명을 앉혀 놓고 ‘이렇게 살아서 뭐하냐’고 ‘다 죽어버리자’는 말을 한 적도 있었다. 그때마다 기현이는 ‘다른 건 몰라도 제발 죽자는 소리만 하지 말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정말 엄마로서 할 말이 아니었다.
포장마차를 하면서 생활비를 벌고 있을 때 기현이는 내가 조금만 늦게 들어가도 날 찾으러 여기저기 헤매고 다닌 적이 많았다. 나중에 그 이유를 물었더니 ‘아빠도 없는데 엄마마저 도망가 버릴까봐 걱정돼서 그랬다’라고 대답했다. 가슴이 먹먹해질 수밖에 없었다.
얼마 전 기현이가 이런 얘기를 했었다. 아버지가 돌아가셨을 때의 기억은 ‘슬픔’보다 ‘기쁨’이었다고. 당시 기현이는 너무 배를 곯았던 상태라 장례식장의 많은 음식을 마음껏 먹을 수 있는 상황이 만족스러웠던 것이다. 이 얘기를 듣고 얼마나 울었는지 모른다.
기현이는 어느 정도 성장할 때까지 삼겹살이란 걸 모르고 자랐다. 난 돼지고기를 사다가 항상 김치 두루치기를 했다. 그래야 양이 많아지기 때문이다. 삼겹살 구이를 하려면 돼지고기가 많이 필요했고 식성이 좋은 아들 녀석들의 배를 채우기엔 턱없이 부족했기에 두루치기로 고기 맛만 보게 했던 것이다. 그러다 기현이가 세상에 태어나서 처음으로 삼겹살 구이를 먹던 날, 기현이가 이렇게 말한 기억이 난다. “이 세상에서 삼겹살보다 더 맛있는 고기는 없을 것”이라고 말이다.
정리=이영미 기자 bo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