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안부문자만 몇번 보내” vs “정신분열 환자엔 공포”
영화 <우리 집에 왜 왔니> 스틸컷으로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지난 4일 오전 9시께부터 창원지방법원 315호 법정이 붐비기 시작했다. 국민참여재판을 위해 배심원으로 선정된 이들이 법정에 하나둘 모여들기 시작한 것. 배심원 선정이 끝나고 오후 1시 30분부터 본격적으로 재판이 시작됐다. 재판이 시작되고 일반 사복을 입은 피고인 남 씨가 피고인석에 나왔다. 피해자는 이미 사망해 재판에 나올 수 없었지만 가족들이 그를 대신해 재판을 지켜봤다.
피고인 남 씨는 지난 1월 15일 평소 남 씨에 대해 호감을 갖고 있었던 것으로 보이는 김 씨로부터 전화를 받고 욕설을 퍼붓는다. 그 후 김 씨에게 ‘니 우리집 올래? 오늘 니 죽여 불라고 시발새끼야’라는 문자를 보낸다. 문자를 받은 김 씨는 김해시 소재 남 씨의 집에 찾아왔다. 남 씨는 그를 집 안으로 들어오게 했고 그의 몸을 묶기 시작했다. 김 씨의 두 손을 등 뒤로 묶고 거실 안까지 데리고 와 식탁 의자에 앉혔다. 그 다음 빨랫줄로 김 씨의 가슴과 발목 부위를 의자에 묶고, 압박붕대로 김 씨의 눈을 가리고 유리테이프로 입을 막은 뒤 부엌 선반에 있던 과도로 피해자의 가슴, 배, 어깨 등의 신체 부위를 23회 찔렀다. 김 씨는 도망치려고 했지만 저혈량성 쇼크로 그 자리에서 사망했다. 부검 결과에 따르면 왼쪽 가슴이 칼에 찔렸을 때 심장과 폐를 관통했다.
재판부는 “남녀 간에 일어난 일이라 그동안 이들을 잘 알고 지냈던 가족과 친구를 증인으로 선정했다”고 밝혔다. 김 씨의 친한 친구인 황 아무개 씨는 검찰 측 증인으로 나와 김 씨의 생전을 증언했다. 황 씨는 “김 씨는 고등학교 졸업 이후 회사생활을 했고 이때부터 지속적으로 교류를 했다. 평소에 말수가 없는 편이지만 남에게 피해를 주는 사람은 전혀 아니었다”며 “사고가 있기 전 마지막으로 본 게 1월 5일이었는데 그때 ‘좋아하는 여자가 있는데 마음을 열지 않는다’며 심경을 고백하기도 했다”고 말했다.
검찰 측의 또 다른 증인으로 나온 김 씨의 친형은 “동생은 직장생활을 계속 하면서 돈을 꾸준히 모아 집을 두 채나 살 정도로 생활력이 강했다. 누구에게 피해를 준 적이 없었고 사람에게 매달리는 집착을 보인 적도 없었다”며 “스토킹하는 사람은 다 죽어야 하냐. 말로 달랠 수도 있는 걸 꼭 그렇게 잔혹하게 해야 했냐”며 피고인을 쳐다보며 원망 섞인 목소리로 말하기도 했다.
김 씨는 남 씨를 1년가량 좋아했던 것으로 보인다. 김 씨는 남 씨의 모친 유 아무개 씨(51)와 2014년 봉사활동을 하면서 친분을 쌓게 된다. 김 씨가 미용사자격증을 취득해 이발봉사를 다녔고 미용실을 운영하던 유 씨 역시 미용봉사를 하다가 알게 된 것. 이후 김 씨는 유 씨가 운영하는 미용실에 찾아가 이발을 하기도 했고 이 과정에서 남 씨를 알게 돼 흠모하기 시작한 것으로 보인다.
피해자 김 씨가 보낸 문자메시지. <궁금한 이야기 Y> 방송화면 캡처.
재판에서 증인으로 나온 유 씨는 “누나 동생 하며 지낸 김 씨가 언젠가부터 한 달에 한두 번씩 미용실에 왔고 딸이 안 보이면 딸을 찾기도 했다”며 “영업을 하고 있어 방해가 된다고 생각될 때는 가라고도 했지만 그럴 때마다 씩 웃기만 했고 말을 듣지 않았다”고 했다. 이어 “딸 아이가 아저씨(김 씨)가 번호를 물어봐서 알려줬다고 해 왜 알려줬냐고 물어봤었다. 김 씨가 딸을 찾을 때만 해도 호감이 있어서 그랬다고 생각하지 않았는데 전화번호를 물어본 것을 알게 된 후 딸에게 흑심이 있다는 것을 의심했다”며 “김 씨가 딸을 자꾸 보려고 하면서부터 딸의 병세가 더 심해진 것 같다”고 덧붙였다. 실제로 남 씨는 정신분열증으로 널리 알려진 조현증을 3년 전부터 앓고 있었다. 남 씨는 조현병으로 환청, 환시, 공격적 행동, 자극 과민성 등의 증상을 보여 왔고 장기간 약물치료를 하다가 임의로 중단하기도 했다.
변호인단은 남 씨가 살인을 한 것에 대해서는 충분히 해당하는 처벌을 받아야 한다고 하면서도 그 형량에 대해 심신미약을 이유로 감형을 주장했다. 남 씨가 살인 행위를 하기까지의 삶을 살펴봐달라는 것이었다. 변호인단은 “남 씨의 살인 행위는 인정하는 바이고 처벌받는 것이 당연하다고 생각한다”면서도 “살인죄에서 가장 가벼운 참작동기 살인에 해당한다고 생각한다. 피고인에게는 이전부터 조현증을 겪을 만한 아픔이 있었다”고 말했다.
변호인단은 남 씨의 중학교 생활기록부를 증거로 제시해 “남 씨가 중학교 때만 해도 온순하고 남들과 다르지 않은 평범한 아이였다”며 “중학교 2학년 때 심한 체벌을 받고 이를 부모님이 나중에 알고도 제대로 대응해주지 않아 상처를 받은 것 같다”고 말했다. 변호인단과 모친 유 씨에 따르면 부친의 외도로 가정환경도 순탄치 않았다. 남 씨 본인은 만화가가 되고 싶었지만 부모님의 반대로 고등학교까지 자퇴한 이후에는 거의 집에서만 생활하며, 말 그대로 방치된 상태였다는 것이다.
앞서 검찰 측에서는 “피고인이 흉기를 사용해 피해자를 수십 차례 찌르는 잔혹한 수법을 사용했기 때문에 엄한 처벌이 필요하다. 이는 보통동기 살인에 해당한다”고 말한 바 있다. 양형기준에 따르면 살인죄는 다섯 가지의 유형으로 나뉘는데 형량에 따라 참작동기 살인, 보통동기 살인, 비난동기 살인, 중대범죄동기 살인 등이 있다.
검찰과 변호인은 피고인의 조현증 약물 복용에 대해서도 갈등을 보였다. 검찰 측은 “김 씨가 약물 부작용으로 인해 지난해 12월부터 임의로 약물을 복용하지 않거나 정해진 투약량의 절반 정도만 복용했다”며 “임의대로 약을 먹지 않아 피고인은 사소한 외부 자극에도 예민하게 반응하고 가족들에게 신경질적인 태도를 보이는 등 극도로 불안정한 심리 상태를 보였다”고 말했다.
범행 이후 자수 전화를 하며 담담하게 시신이 있는 집으로 돌아오는 남 씨. <궁금한 이야기 Y> 방송 화면 캡처.
이에 변호인단은 “남 씨는 부친 가게 일을 도우면서 병세가 나아지고 있다고 생각해서 약을 끊은 것이다. 두통 등의 부작용이 있어서 주치의 상담 없이 약을 줄이기는 했지만 2~3일 안 먹으면 잠이 안와서 다시금 복용했다”고 말했다. 특히 유 씨는 “딸이 나아지고 있었는데 식당으로까지 김 씨가 찾아오고 집에도 찾아오면서 딸이 더 스트레스를 받았던 것 같다”고 말했다. 약을 줄이는 시점에 아버지 일도 도우며 사회에 적응하는 노력을 했었는데 김 씨의 등장으로 더 스트레스를 받아 병세가 악화됐다는 것.
검찰과 변호인단은 김 씨의 스토킹에 대해서도 공방을 펼쳤다. 검찰 측은 “스토킹을 당해서 스트레스를 받았다는 것은 유 씨의 생각일 뿐”이라며 “김 씨의 행동이 스토킹이라고 하기엔 너무 약하다”고 말했다. 김 씨는 남 씨를 보기 위해 미용실과 식당에 찾아왔지만 실제로 남 씨를 본 것은 한 달에 한두 번에 불과했다. 또 검찰이 확보한 통신 내역에 따르면 지난 1년 동안 김 씨가 남 씨에게 전송한 문자메시지는 21건뿐이었고 사건 당일 전까지는 전화를 한 적도 없다.
이에 변호인단은 “스토킹은 그 횟수나 빈도보다는 피해자가 느끼기에 무섭거나 싫은 정도가 더 중요하다”며 “이전에도 한 번 김 씨가 남 씨 집에 찾아온 적이 있는데 이때도 문을 열어주지 않고 돌아가라고 했지만 김 씨는 가지 않고 웃고 있어 경찰에 신고를 했다. 경찰에서 신원조회를 할 때도 순순히 응하지 않은 것으로 알고 있다. 이때 피고인은 김 씨에 대해 꺼림칙함과 무서운 감정을 느꼈는데 이것이 스토킹당할 때의 감정”이라고 말했다.
검찰과 변호인단은 피고인의 살인 행위에 대해 각각 계획성 범죄와 우발성 범죄라고 주장하며 대립했다. 검찰 측은 “피고인은 김 씨를 죽이기 위해서 연락한 것이다. 지난 3주 동안 어떤 스토킹도 하지 않았는데 갑자기 스토킹을 당해 죽였다는 것은 우발성 범죄로 보기 어렵다. 집에 있던 빨랫줄, 과도, 압박붕대 등을 범행에 사용하기 위해 미리 준비했던 것으로 보인다”고 주장했다. 이에 변호인단은 “피고인은 평소에 김 씨에 대해 혐오감과 두려움을 갖고 있었다. 또다시 문자가 오자 자신이 나약하게 보이지 않기 위해 강하게 욕설을 섞어 협박을 한 것이었고 이에 진짜 찾아오자 우발적으로 집에서 평소 쓰던 칼과 압박붕대 등을 이용해 죽였고 바로 자수했다”고 말했다.
남 씨는 피고인 신문 당시 ‘왜 신고하지 않고 죽였냐’는 검찰 측의 질문에 “이전에 경찰에 신고했을 때도 별다른 해결이 되지 않았다고 생각해 스스로 해결해야겠다고 생각했다. 문자랑 전화를 할 때까지는 죽일 생각이 없었다. 집에 정말 찾아와서 돌아가라고 했지만 돌아가지 않아 통제하고 싶어서 집에 들였다. 집안에 들어왔을 때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당시 꿈을 꾸는 기분이었다”고 말했다.
재판이 끝나고 피고인의 모친인 유 씨가 피해자의 누나에게 와서 죄송하다고 사죄하려 했지만 김 씨는 “죽이고 죄송하다면 다냐. 용서할 수 없다”고 말하고 자리를 떴다. 피해자의 누나는 “우리 애는 스토킹을 한 것이 아니다. 안부 문자만 몇 번 보낸 것이 어떻게 스토킹이냐”며 “사람 죽이고 나서 정신병이 있었다며 진단서와 처방내역 보여주며 이해해달라는 것은 말이 안된다”며 기자에게 호소했다.
다음날인 5일 최종 선고를 앞두고 9명의 배심원들은 평의에 들어갔다. 곧이어 재판부는 “재판부와 배심원은 일치된 의견으로 공소사실 전부에 대해 유죄를 인정했다. 피고인의 병력 등이 복합적으로 작용한 범행으로서 피해자에 의해 유발된 범행으로만 볼 수는 없다고 판단했다. 사건 범행 직후 수사기관에 자수한 점, 피고인이 종전에 형사처벌 받은 전력이 전혀 없는 점은 감형에 참작됐다”면서 “존엄한 가치인 생명권이 처참하게 침해된 점, 생명의 가치에 대한 사회적 경종이 필요하다는 점 등을 고려했다”며 징역 10년을 선고했다.
재판부는 살인범죄 유형 가운데 검찰이 주장한 제2유형인 보통동기 살인으로 양형을 결정했지만 심신미약과 초범, 자수 등의 이유로 감형된 것으로 보인다. 앞서 검찰은 징역 20년을 구형했고, 배심원들 역시 유무죄 평결에 대해서 만장일치 유죄에 의견을 모았고 징역 14~16년으로 정한 바 있다.
최영지 기자 yjchoi@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