교회에 가는 30여 분, 엄마는 왜 그렇게 말이 많은지, 소녀 같다. 엄마의 친구들, 친지들, 잃어버린 엄마의 꿈, 지나간 엄마의 사랑, 엄마의 슬픔, 엄마의 두려움이 봄날 봄꽃들이 툭툭 피어나는 것처럼 터져 나온다. 그 시간에 엄마는 소녀가 되고. 마녀가 되고. 친구가 되고. 심술쟁이가 되고. 가끔 현자가 되기도 한다.
최근에 엄마는 자기가 꾼 강렬한 꿈에 대해 토를 달아가며 조심스레 이야기를 했다.
“있잖아, 새벽이 지나 꾼 꿈은 남의 꿈이라고 하거든.”
“그런데?”
“그런데 꿈에 내가 사막에 서있는 거야. 가방도 없고, 돈도 없고, 너희들도 없고, 아무도 없고, 아무 것도 없는데 어디로 가야할지는 모르겠고…. 참 막막했어. 그러다 깨고 나니 밖이 환한데, 얼마나 다행인지.”
엄마밖에 나오지 않는 꿈이 어찌 남의 꿈이겠는가. 엄마도 알고 있었다. 그 꿈은 남의 꿈이 아니라 자기에 대한 자기 꿈이라는 걸. 그럼에도 새벽이 지나 꾼 꿈은 남의 꿈을 대신 꾼 거라고 얼토당토 않는 토를 달고 이야기를 시작했던 건, 그 꿈이 전하는 메시지를 받아들이고 싶지 않다는 거였다.
혼자 가야 하는 길, 어디로 가야 할지 막막하기만 한 길, 그 꿈은 엄마에게 ‘죽음’이 바로 엄마의 화두임을 상기시켜주는 거였다. 엄마는 죽음을 두려워하고 있었고, 죽음을 생각하면서 살 만큼의 힘이 있었기 때문에 꿈이 그렇게 찾아온 것이었다.
나이 든다는 것은 잃어버린다는 뜻이겠다. 젊음을, 열정을, 친구를, 사랑을, 건강을, 권력을, 기억을…. 삶에서 소중했던 것들, 공들여 쌓아올린 것들이 하나씩 둘씩 허물어지는데, 죽음은 바로 그 허물어짐의 절정이다. 내가 ‘나’라고 생각했던 몸을, ‘나’의 최후의 보루라 여겼던 몸을 잃어버리는 것이니.
죽은 후에는 어떻게 될까? 그걸 어떻게 알겠는가. 다만 삶과 죽음이 뫼비우스 띠처럼 연결되어 있으리라 짐작할 뿐이다. 이상하다. 자기 죽음을 회피하지 않고 사유의 대상으로 삼으면 죽는 날만 기다리게 되는 것이 아니라 오히려 삶이 변한다. 안으로만 오그라들었던 팔이 밖으로 뻗으며 주변 사람들을 축복하게 되는 것이다.
엄마는 죽음으로부터 온 편지 같은 그 꿈 이후에 더 잘 살고 있다. 사경을 하고, 며느리들을 칭찬하기 바쁘며, 만나는 친구들의 희로애락에 공감한다. 그런 엄마를 보니 안셀름 그륀의 말이 생각난다.
“사는 동안 지금 이 세상을 축복한 사람만이 잘 죽을 수 있다.”
이주향 수원대 교수
※본 칼럼은 일요신문 편집방향과 다를 수도 있습니다.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