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터뷰 안하는 게 ‘카리스마’라굽쇼?
▲ 김병현 | ||
그날 로즈볼 구장에선 한국과 쿠바 축구대표팀의 북중미 골드컵 경기가 펼쳐졌다. 박찬호는 탤런트 겸 영화배우인 차인표와 함께 그 경기를 보러 왔었다. A 기자가 박찬호와 차인표의 지명도를 고려해 몇 마디 물어볼 요량으로 그들이 앉아 있던 관중석으로 다가갔다.
“축구 보러 오신 모양이네요”라는 A 기자의 첫 인사에 박찬호는 “저는 특파원이 아니면 얘기 안 합니다”라며 고개를 돌려 버렸다. A 기자는 대신 영화 <아이언 팜> 현지 촬영 차 왔다가 박찬호와 동석하게 된 차인표로부터 몇 마디를 듣고 올 수 있었다. 취재석으로 돌아온 A 기자는 자존심이 상한 듯 한참이나 분을 삭이지 못했다.
그 일보다 약간 앞선 지난 2001년 10월 28일엔 잠실구장에서 박찬호와 기자들 사이에 작은 사건이 발생했다. 삼성과 두산의 한국시리즈 6차전을 관람하러 온 박찬호가 한국 기자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프레스 박스에 들어오려고 했다. 일찍이 ‘특파원만 상대하겠다’고 공표했던 박찬호이었기에 기자들은 박찬호의 입장을 허용하지 않았다. 박찬호는 다소 멋쩍은 표정으로 프레스 박스 아래로 내려가 당시 선동열 한국야구위원회(KBO) 홍보위원과 함께 경기를 관람했다.
그토록 언론 접촉에 과민한 반응을 보이던 박찬호도 몇 년 사이 많이 달라졌다. 한때 뉴욕 메츠에서 뛰었던 대학(한양대) 선배 구대성과 로스앤젤레스에서 합동 훈련을 했던 지난해 1월엔 특파원이 아닌 국내 취재진의 인터뷰 요청을 물리치지 않았다. 또 최근 한국을 오갈 때도 기꺼이 인터뷰에 응해주고 있다.
또 한 명의 메이저리거인 김병현도 인터뷰 안하기로 유명하다. 하지만 그는 입출국도 몰래 할 만큼 개인적인 성향이 독특해 기자들도 이젠 포기한 상태다.
요즘 들어 한 마디 듣기가 대통령 인터뷰보다 어려운 이들은 2002 한일 월드컵 4강 이후 주가가 천정부지로 치솟은 태극전사들이다. 축구대표팀 멤버들의 인터뷰는 언론에 대한 일종의 자선 행위라는 인식으로 굳어진 지 오래다.
소집 때마다 벌어지는 선수 인터뷰를 둘러싼 언론과 대표팀의 작은 실랑이도 이젠 낯선 풍경이 아니다. 대표팀 감독이 세운 원칙이라는 이유로 선수들의 인터뷰는 철저히 대표팀 위주로 관리된다.
조 본프레레 감독이 이끌던 대표팀이 미국 로스앤젤레스 전지훈련에 나섰던 지난해 1월. 본프레레호의 핵심 멤버였던 김남일은 기자들의 잇단 인터뷰 요청을 거부했다. 과묵함마저 팬들에게 강한 카리스마로 각인된 김남일의 인터뷰 거부는 지지자들에겐 더없이 멋있는 모습으로 비쳤다. 대신 언론에겐 ‘가만히 있는 선수 귀찮게 한다’는 팬들의 비난이 쏟아졌다. 대표팀 언론 담당관이 몇 차례나 말을 꺼내봤지만 당시 김남일은 요지부동이었다.
지난해 5월 독일 월드컵 아시아 최종예선 우즈베키스탄·쿠웨이트전을 앞두고 있을 땐 안정환과 차두리가 잇달아 인터뷰를 거부했다. 대표팀 언론담당관이 공식적으로 주선한 자리였지만 안정환은 “골 넣고 하겠다”는 말로, 차두리는 손가락 까딱까딱하는 걸로 인터뷰를 마다했다.
▲ (왼쪽부터) 안정환, 차두리, 박찬호, 이영표 | ||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거가 3명이나 된 지금 축구 스타들의 위상은 한층 더 높아졌다. 빅리그에서 뛰는 선수들은 몸값만 수십억 원에 달하는 ‘작은 기업’이 됐고 그들을 관리하는 에이전트의 역할도 커졌다. 에이전트들은 본연의 업무인 소속 선수들의 상품 가치를 최대화하는 일에 박차를 주력해야 하는 상황이다.
덩달아 선수와 언론의 관계도 변했다. 인맥이 커다란 무기였던 과거 취재 시스템은 에이전트가 중간에 개입하면서 변화를 요구하고 있다. 물론 그것이 긍정적인 방향인지 부정적인 방향인지에 대한 논란은 있다.
이영표(토트넘 홋스퍼)의 AS 로마 이적과 관련된 한바탕 소동은 ‘거물’이 된 스포츠 스타를 언론이 어떻게 대해야 할지를 고민하게 만든 사건이었다. 계약 직전에 이적 결심을 번복했던 이영표는 그 이유를 기자회견을 통해 밝히겠다고 했었다.
그러나 이영표가 기자회견을 통해 밝힌 것은 “지극히 개인적인 이유이기 때문에 밝힐 수 없다”는 것뿐이었다. 회견 도중 에이전트와 귀엣말을 나누던 모습은 회견의 진실성을 의심스럽게 만들었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언론은 수많은 팬을 거느린 선수의 위력을 실감하며 선뜻 비판에 나서지 못했다.
박지성은 발목 인대 접합 수술 후 추석 전 한국을 찾았다. 박지성의 귀국은 예전과는 달리 극비리에 이뤄졌다. 전 에이전트사와의 법적 분쟁에 몸까지 다쳐 알리고 싶지 않았던 게 선수 본인이나 에이전트의 생각이었을 것이다.
박지성은 들어올 때와 마찬가지로 조용히 출국했다. 일부 취재진에겐 출국 날짜까지 잘못 알려줘 인천공항에 헛걸음을 하게 만들었다. 맨체스터 공항에 도착해서는 “인터뷰가 예정돼 있다는 얘기를 듣지 못했다”며 취재진의 ‘한 말씀’ 요청에 손사래를 치다가 매니저의 설득에 어렵게 입을 열었다고 한다.
스포츠 스타들이라고 해서 매번 언론의 취재와 인터뷰 요청에 응할 의무는 없다. 그러나 한번쯤 과거를 돌아보고 앞을 내다보라는 말을 해주고 싶다. 오늘의 자신들이 있기까지 언론은 어떤 존재였고, 앞으로 어떤 관계를 설정해 나아갈지를 말이다.
조상운 국민일보 체육부 기자 swcho@kmib.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