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친구 손학규 밀어봐?’ 햄릿의 고민
▲ 김근태 열린우리당 의장이 대선에서 대권 도전보다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란 소문이 흘러나오고 있다. 사진은 김 의장이 20일 강원도 평창군 침수지역에서 피해복구 봉사를 하는 모습. 국회사진기자단 | ||
그래서 정치권에서는 김 의장의 ‘킹메이커 역할설’이 부쩍 많이 흘러나오고 있다. 물론 김 의장은 “당의 안정이 우선”이라며 언급 자체를 꺼리고 있다. 하지만 그의 주변에서조차도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 등 ‘코드’가 맞는 여야의 대권 주자들과의 ‘연대’를 통해 정치적 미래를 새로 열어나가자고 설득한다는 후문이다. 정계개편과 개헌이 이루어질 경우 ‘부통령’이든, 책임총리든 받아들일 용의가 있다는 것이다. 김근태 의장의 ‘킹메이커 역할설’이 얼마나 설득력이 있는지 진단해보았다.
지난 2004년 6월 한 TV 방송 프로그램의 녹화현장. 당시 3선 의원이던 김근태 의장은 한 진행자가 “대통령이 되고 싶으냐”고 묻자 머뭇거리지도 않은 채 “중학교 때는 그런 꿈은 없었는데, 이제 (대권) 꿈을 꿔보겠습니다”라며 대권 도전 의지를 강하게 밝혔다. 그는 이어 “지금부터 준비하고 있다”고까지 ‘친절하게’ 답변해버렸다.
이러한 발언은 즉각 청와대를 자극했다. 특히 당시 김 의원은 아파트 분양원가 여부와 관련, 노무현 대통령을 겨냥해 “계급장을 떼고 치열하게 논쟁을 하자”는 폭탄 발언까지 한 마당이었기 때문에 청와대는 더 없이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였었다. 청와대의 격렬한 반응을 예상 못했을 리 없다. 하지만 그만큼 그의 대권에 대한 의지도 강했다는 방증일 수도 있다.
김 의장은 대권 발언 뒤 우여곡절 끝에 2004년 6월 보건복지부 장관에 오르며 대권의 꿈을 더욱 부풀렸다. 그런데 2004년 6월 대권 발언 이후 2년이 흐른 지금 2006년 7월의 정치 상황은 어떤가. 지금 열린우리당 김근태 의장의 ‘입’에서는 2년 전 그가 TV 프로그램에서 당당하게 말하던 ‘대권’이란 말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
먼저 그가 2년 전 기대했던 것만큼 대권 주자로서 국민들의 열렬한 지지를 받고 있는지 매우 회의적이다. 각종 대권 주자 선호도 조사에서 5%대를 맴돌며 최하위 수준이다. 2년 동안 전혀 대권 주자로서의 가능성을 보여주지 못했다는 뼈아픈 지적에 그는 무기력할 뿐이다.
또한 5·31 지방선거에서 참패한 뒤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의 뒤를 이어 당권을 맡고 있지만 그의 비상대책위원장직 수행은 ‘절반의 성공’이라는 미지근한 평가에도 수긍하는 편이다. 오는 10월 재보궐 선거 뒤 정계개편이 일어날 경우 계파 간 경쟁은 물밑으로 잠복한 것이지 그의 ‘조율’ 때문에 계파 갈등이 완전히 없어진 게 아니라는 평가가 더 설득력이 있다. 아직 그가 뭔가 보여주지 못했다는 것이다. 그리고 무엇보다 더 무서운 지적은 앞으로도 그가 보여줄 게 별로 없다는 부정적 평가에 있다. 왜 그럴까.
먼저 그는 한국 정치권에서 보기 드문 ‘초 신중파’에 속한다. ‘여의도 햄릿’이라고 불리는 것처럼 답답하리 만큼 신중한 행보는 “비대위의 의사 결정이 너무 느리다”는 비판과 함께 ‘김근태 리더십’의 한계를 노정했다는 말도 나온다. 물론 온화하면서도 신중한 그의 언행을 보면 신뢰감이 든다는 사람들도 있지만 ‘너무 느리고 재는 스타일’이라는 단점에 묻혀버린다.
이런 그의 정치 스타일은 ‘악순환’을 만들어내고 있다. 그에게 차기 대권 창출을 기대할 수 없다는 의식이 조금씩 확산되고 있는 것이다. 대구의 한 지역 정치인은 “올해 초 그의 지방 사조직 가운데 일부에서 참모들이 대거 이탈했다는 이야기가 나돌아 대구 지역에서 화제가 된 적이 있었다. 김 의장에게서 더 이상 정권 창출을 기대할 수 없기 때문에 그의 곁을 떠났다는 것이다. 아직 그를 지지하는 현역 의원들의 경우 신중한 행보를 보이겠지만 그보다 아래에 있는 사람들은 발 빠르게 행동하고 있는 것 같다. 김 의장이 뭔가 확실한 것을 보여주지 않는다면 이탈 세력은 더 늘어나지도 않겠느냐”고 말했다.
김 의장도 물론 2년 전 ‘대권 도전 선언’을 한 뒤 대권 주자로서 강한 어필을 하지 못한 것에 대해 안타까워할 것이다. 그리고 그 안타까움은 ‘킹’이 아니면 ‘킹메이커’로 차선책을 찾자는 현실적 대안 찾기로 이어지고 있다. 올해 초부터 정치권에서는 ‘김 의장이 차기 권력 창출을 위해 사심을 버리고 대권 경쟁력이 있는 사람을 위해 킹메이커 역할을 할 것이라고 결심했다’는 이야기가 떠돌았다. 물론 김 의장측에서는 극구 부인하고 있다.
김 의장은 최근 한 언론사와의 인터뷰에서 “킹보다는 킹메이커 역할이 더 맞는 것 아니냐는 얘기도 있다는데 어떻게 생각하느냐”는 질문에 대해 “(목소리 톤이 약간 높아지며) 지금은 킹이냐 킹메이커냐를 얘기할 여건이 안 된다. 우선 물이 높아야 배가 높이 뜰 수 있다. 열린우리당을 국민들에게 다시 주목받고 신뢰받는 당으로 만드는 게 중요하다”고 대답한 적이 있었다. ‘민감한’ 질문에 김 의장이 목소리 톤을 높인 것을 보면 아직은 그에게 킹메이커론이 쓰라린 지적일 것이다. 하지만 그것이 전혀 근거가 없는 것은 아니다.
▲ ‘민심대장정’ 중인 손학규 전 지사.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김 의장 주변의 사정을 잘 아는 열린우리당 A 씨의 이야기를 들어보자. 그는 “정계개편의 요체는 누가 그것의 주축이 되느냐에 달려있다. 김 의장이 지금 당장 정계개편을 추진할 동력이 없지만 앞으로 의장직을 수행하면서 폭 넓은 행보를 한다면 상황이 달라질 수 있다. 그래서 정계개편이 일어날 때 자신에게 유리한 구도를 만들 수 있는 것이다. 그때 가능성이 있는 차기 대권 주자와 연대를 할 수 있다. ‘킹’은 아니지만 부통령(개헌이 이루어지면)이나 책임총리를 맡을 수는 있지 않겠느냐. 현재 유력하게 검토되고 있는 그 연대 대상은 바로 손학규 전 경기도 지사로 알고 있다”고 말했다. 그는 이어 “결국 대선에서 한나라당의 유력한 대권 후보인 박근혜 전 대표를 이기려면 김 의장의 외연 확대는 필수적이다. 그런데 지금 김 의장의 킹메이커 역할설이 나오면 바로 김 의장은 정치적 사망 선고를 받는다. 그래서 그 이야기에 대해서는 부인하는 것 아니겠느냐”고 말했다.
A 씨는 또 김근태-손학규 연대설이 청와대에서도 논의되고 있는 사안이라고 언급했다. 그는 “그런 아이디어는 현재 청와대 정무기획 라인에서도 심도 깊게 논의되고 있는 것으로 안다. 내가 만난 청와대 관계자들을 통해서도 그런 사실을 확인했다. 노무현 대통령이 어떤 정계개편 복안을 가졌는지는 알 수 없지만 손 전 지사 영입에 대해서는 구체적 얘기까지 오고 가는 것으로 안다”고 말했다.
정치권 일부에서는 김 의장에게 비전을 제시해줄 인물로 손 전 지사를 주목해야 한다고 말한다. 사실 김 의장은 지난 6월 열린 손학규 전 지사의 출판기념회에 ‘이례적으로’ 참석했다. 특히 그는 “손 전 지사는 대중적인 인기는 낮지만 정치부 기자들 사이에서는 인기 1위로 통해 부러울 때가 있었다”며 손 전 지사를 극찬해 눈길을 끌기도 했다. 또한 김 의장은 최근 고교(경기고), 대학(서울대) 동문인 손 전 지사에게 전화를 걸어 “(100일 전국 민심탐방으로) 고생한다. 출발을 잘하고 있는 것 같다”고 정치적인 격려도 아끼지 않을 만큼 손 전 지사를 적극적으로 ‘챙기고’ 있는 것으로 전해진다.
한편 손 전 지사는 김 의장측과의 연대설에 대해 “다른 당과의 연대에는 전혀 관심이 없다”고 밝히고 있다. 지지율이 바닥인 현재의 열린우리당과의 연대설에 오르는 것 자체가 그에게는 마이너스 요인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김 의장이 열린우리당을 박차고 나와 ‘범민주세력연합론’을 내걸고 손 전 지사를 대권 후보로 영입한다면 손 전 지사의 손익계산서는 달라지게 될 것이다. 손 전 지사는 정계개편과 관련, “여권이 자기들이 표방하는 대로 개혁 세력이라고 자임한다면 시대정신을 담지하는 지도자와 그런 (연대) 구상을 했으면 한다”고 조언한 바 있다. 그런 시대정신을 가진 ‘지도자’가 자신이 될 수도 있다는 뜻은 아닐까.
김 의장은 2년 전만 해도 공중파 방송에서 대권 도전을 당차게 얘기할 정도로 욱일승천 기세였다. 하지만 지금은 그때와 상황이 많이 달라졌다. 그를 잘 아는 한 의원은 “그가 대권에 대한 뜻을 공개적으로 밝히는 것이 물론 정치인으로서 가질 수 있는 권력의지일 수도 있지만 그것보다는 그가 오랫동안 재야 운동을 거치며 다져온 국가 비전에 대한 믿음이 있기 때문이다. 그는 다른 정치인들처럼 대통령 병이 걸린 사람이 아니다. 기회가 있을 때마다 ‘모든 기득권을 버릴 수 있다’고 외치는 게 쉬운 일은 아니다. 김 의장이 대권에 대한 꿈은 강하겠지만 ‘내가 아니면 안 된다’는 식의 일방적 대권욕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그렇다면 김근태 의장은 ‘꿈’은 이루어질까. 그것은 노무현 대통령과의 한판 대결에 달려 있다고 볼 수 있다. 이는 정동영 전 통일부 장관 등 다른 대권주자들도 마찬가지다. 김 의장이 구상하는 권력 재창출 구도와 청와대의 그것은 필연적으로 충돌할 수밖에 없기 때문이다. 그래서 향후 정계개편의 이니셔티브를 누가 쥐느냐가 매우 중요하다. 김 의장이 여당의 의장으로서 새로운 비전을 제시해 국민의 동의를 이끌어낸다면 국민들은 그가 정계개편의 중심에 서는 것을 적극 지지할 것이다. 하지만 반대의 경우는 김근태의 정치적 몰락을 의미한다. 과연 ‘여의도의 햄릿’ 김 의장이 ‘정치 10단’ 노무현 대통령을 이겨내고 ‘친구’ 손학규 전 지사와 함께 차기 권력을 창출해낼 수 있을까 지켜 보아야할 대목이다.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