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금색’이 아니라면 ‘금의환향’은 없다
▲ 지난달 28일 치른 방글라데시와의 도하 아시안게임 조별예선에서 박주영이 헤딩슛을 하고 있다. 연합뉴스 | ||
출범 초기부터 잇단 부진으로 궁지에 몰렸던 핌 베어벡 감독(50·네덜란드) 체제의 축구 대표팀이 2006 도하 아시안게임 무대를 통해 살아나고 있다.
베어벡호는 10일 새벽(한국시간) 카타르 알 라얀 풋볼 스타디움에서 열린 도하 아시안게임 남자 축구 8강전 북한과의 경기에서 3 대 0 완승을 거두고 4강에 올랐다. 예선 최종전에서 일본을 꺾고 올라온 북한의 기세가 만만치 않을 것으로 예상됐지만 승부는 의외로 싱거웠다.
금메달을 따면 병역 특례 혜택을 받게 된다는 목표가 뚜렷한 태극전사들은 군인 선수가 상당수인 북한을 초반부터 강하게 몰아 부쳤다. 전반 31분 수비수 김치우(인천)의 통쾌한 중거리 슛으로 포문을 열었고 3분 뒤 염기훈(전북)이 추가골을 뽑아냈다. 후반 12분엔 정조국(서울)의 쐐기골까지 터졌다.
경기 후 인터뷰 때 베어벡 감독은 모처럼 자신감이 넘쳤다. 그는 “압박과 부담이 심했지만 90분간 완벽하게 경기를 컨트롤해냈다”고 말했다. 분명히 조별예선 후 가졌던 인터뷰 때와는 사뭇 다른 분위기였다.
아시안게임 대표팀을 이끌고 있는 베어벡 감독은 한국 축구 대표팀 사령탑 부임 후 최근 최고의 성적을 내고 있다. 지난 달 28일 치른 방글라데시와의 아시안게임 조별예선 첫 경기에선 3 대 0으로 이겼다. 2일 베트남과의 2차전에선 2 대 0, 그리고 6일 열린 바레인과의 예선 최종전에선 1 대 0으로 이겼다.
▲ 핌 베어벡 감독. | ||
상대가 아시아권의 한 수 아래 팀들이라고 하지만 5경기에서 11골을 넣고 실점이 없는 것도 특기할 만한 ‘사건’이다. 아직은 미덥지 못한 수비라인이지만 실점이 없었다는 건 그래도 전보다는 나아졌다는 의미이기 때문이다.
그러나 조별예선에서 보여준 경기들은 실망스런 부분도 많았다. 방글라데시, 베트남, 바레인을 잇달아 꺾었지만 팬들은 결코 베어벡호의 승리에 환호하지 않았다. 오히려 ‘저런 플레이로 20년 만에 아시안게임 금메달이라는 목표 달성이 가능할까’라는 의구심만 커졌다.
이미 방글라데시, 베트남, 바레인 같은 팀은 우리의 적수가 안 된다는 인식이 박힌 축구팬들에게 3 대 0, 2 대 0, 1 대 0 승리가 성에 찰 리 만무했다. 스코어도 그랬지만 공격수들의 마무리 볼 처리 미숙, 여전히 불안한 수비, 감독의 색깔 없는 전술은 경기를 지켜보는 이들의 가슴을 답답하게 만들었다.
같은 기간 베어벡 감독의 표정 역시 밝지 않았다. 경기에선 이겼지만 그 내용이 좋지 않았기 때문이다. 아시안게임 선수촌 개방 행사 때 일광욕을 즐기던 자신을 촬영한 사진기자와 실랑이를 벌인 것도 불편한 심기의 일단을 드러낸 사건 중 하나였다.
아시안게임 경기 중간 TV 중계 화면에 잡힌 베어벡 감독의 모습 중엔 고개를 절래절래 흔들거나 떨구는 장면이 유난히 많았다. 조별예선 경기 후 베어벡 감독의 인터뷰엔 어느 때보다 선수들에 대한 질타가 많았다. 방글라데시와의 경기 후엔 “출발은 좋았지만 전반적으로 실망스럽다”고 했다. 그는 또 “전반 10분 이후부터 패스도 느리고 코너킥도 크로스도 안 좋았다. 훈련했던 내용이 전혀 나오지 않았다”는 말도 했다.
베트남과의 경기 후엔 “많은 골을 넣지 못한 것에 대해 핑계를 대는 건 적절치 않다. 우리 선수들은 더 잘 할 수 있었다”고 아쉬움을 나타냈다. 오범석(포항)의 결승골로 바레인을 힘겹게 꺾은 뒤엔 “바레인에게 골을 먹지 않은 것은 행운이었다”고 말했다.
사실 아시안게임은 부임 후 계속된 부진으로 위기에 몰린 베어벡 감독이 국면을 전환시킬 수 있는 절호의 기회다. 이번 대회 한국의 예선 조 편성은 주요 경쟁국들과 비교하면 큰 행운이 따랐다. 또 2006 독일 월드컵 멤버가 9명이나 포함된 23세 이하 선수들로 팀을 구성해 라이벌 팀들보다 나은 전력을 갖춘 것도 베어벡 감독에겐 적잖은 호재다.
물론 K-리그 팀들과의 선수 차출을 둘러싼 갈등, 무리한 국제친선경기 일정에 따른 훈련 부족 등 호재를 적극 활용할 수 없었던 걸림돌도 있었다.
불안한 구석도 있었지만 일단 4강까지는 그런대로 순항을 해왔다. 하지만 아직 가야 할 길이 멀다. 12일 밤 10시에 펼쳐지는 4강전 상대는 중동의 복병 이라크다. 이라크는 8강전에서 만만치 않은 전력의 우즈베키스탄을 맞아 연장 접전 끝에 2 대 1로 이겼다.
이라크 축구는 국내외 정치 상황 때문에 한동안 국제무대에 나서지 않아 전력이 베일에 가려져 있다. 역대 A매치 전적은 4승9무2패로 한국이 약간 앞서 있다. 무승부가 9차례나 된다는 점에서 알 수 있듯이 결코 무시할 수 없는 상대다. 가장 최근에 치른 A매치는 13년 전인 1993년 10월 당시 미국월드컵 최종예선.
베어벡 감독은 이라크와의 준결승전 전망에 대해 “이라크에 대해선 아는 바가 전무하다. 앞서 열린 이라크와 우즈베키스탄의 8강전에 전력 분석관을 보냈다. 이틀 동안 이라크전 전략을 짜겠다”고 말했다. 그는 “이라크가 강팀 우즈베키스탄을 누르고 올라온 팀이라 어려움이 있을 것이지만 걱정하진 말라”고도 했다.
베어벡호가 4강전에서 이라크를 넘는다면 결승전 상대는 이란-카타르전 승자가 된다. 한국 축구 20년 만의 아시안게임 금메달과 베어벡호의 첫 국제대회 우승이라는 목표까지는 아직도 두 번의 고비가 남아 있는 셈이다.
베어벡 감독의 지도력에 대한 1차 평가는 이번 아시안게임 메달 색깔에 따라 결정될 것이다. 조별예선에서의 부진을 씻고 8강전에서 변화의 기미를 보여준 베어벡호가 금메달을 목에 걸고 돌아올 수 있을 지 주목된다.
조상운 국민일보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