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사권의 굴욕’ 어차피 가만 있어도 죽는다
▲ 김병준 교육부총리 낙마와 문재인 전 수석 법무장관 내정 논란 등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은 노무현 대통령이 이 정국을 어떤 카드로 돌파할지 의견이 분분하다. 청와대사진기자단 | ||
노 대통령은 이미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임명을 강행하다 한나라당의 집중 포화는 물론 열린우리당의 십자 포화까지 맞고 자진 사퇴를 용인하며 한발 물러선 상태다. 그러나 그것으로 끝난 것은 아니다. 산 넘어 산 형국이다. 천정배 의원의 사퇴로 현재 공석인 법무부 장관 자리에 자신의 최측근 문재인 전 민정수석을 내정하려다 김근태 의장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가 ‘절대 불가’ 입장을 밝히면서 당·청 갈등이 재연됐다.
노 대통령은 이미 김 부총리의 ‘낙마’로 리더십에 큰 상처를 입고 조기 레임덕에 빠진 것으로 평가받는다. 언론의 어투도 심상치 않다. ‘계륵 대통령’이라는 표현도 보이고 ‘대통령만 모르는 노무현 조크’도 버젓이 신문에 등장한다. 어떻게 생각하면 표현의 자유지만 청와대는 레임덕 상황을 연상시키는 이러한 표현에 펄쩍 뛰며 취재 거부를 선언했다. 여기서 더 이상 밀리지 않겠다는 뜻이다.
여기에 문 전 수석의 ‘입각’ 문제의 후유증이 커질 경우 인사권 ‘하나도’ 제대로 행사하지 못하는 식물 대통령이 될 수밖에 없어 청와대로서는 노 대통령이 하는 일에 사사건건 시비를 거는 당 측에 짜증이 나지만 열린우리당 측으로서도 옆길로만 새는 노 대통령의 행보가 짜증스럽다.
과연 노 대통령은 레임덕 상황에 그대로 침몰할지 아니면 노 대통령 특유의 정치력으로 헤쳐 나올지 정국은 크게 요동치고 있다.
“내가 웃는 게 웃는 게 아니야... 요즘 청와대는 청와대가 아니야….”
여권 한 고위 인사의 푸념이다. 집권 만 4년도 되기 전에 노무현 대통령은 이미 레임덕에 빠진 ‘식물 대통령’이 되어버렸고 그에 따라 청와대의 권위마저도 추락했다는 것이다. 실제로 최근 청와대에서 3급 행정관으로 근무했던 한 인사가 여당 한 의원의 보좌관으로 자리를 옮겼다는 이야기가 여권에서 화제로 등장하고 있다. 직급상으로도 3급에서 4급으로 ‘강등’됐고 파워 면에서도 청와대 행정관과 국회의원 보좌관은 하늘과 땅 차이다. 그럼에도 여권 관계자들 사이에서 ‘청와대는 더 이상 권력기관이 아니다. 이제 기피 부서가 되었다’는 의식이 퍼지면서 자신의 직급을 하향 조정해서라도 청와대를 떠나려 한다는 것이다.
그런 예는 또 있다. 최근 청와대 한 관계자는 국정원에 굉장히 섭섭한 감정을 토로하기도 했다. 이 인사에 따르면 청와대가 국정원에 청와대 파견 요원 3~4명에 대해 진급을 의뢰했다고 한다. 하지만 국정원은 청와대의 청탁을 매몰차게 거절했다고 한다. 그리고 청와대는 파견 요원들에게 아무런 ‘선물’도 안겨주지 못한 채 다시 국정원으로 복귀시켰다고 한다. 청와대 한 인사는 이에 대해 “아무리 국정원이 파워가 세지만 어떻게 청와대에서 특별히 진급을 좀 시켜달라고 부탁한 것을 거절할 수가 있느냐. 노무현 정부 들어 국정원 힘 빼기를 했지만 소용없었던 것 같다. 하지만 더욱 가슴 아픈 것은 청와대의 권위가 이렇게까지 떨어졌다는 것이다”라며 자괴감 섞인 감정을 털어놓았다.
정치권에서는 이런 청와대의 권위 추락은 집권 하반기에 들어선 노무현 대통령의 레임덕에 기인한 것이라고 평가한다. 특히 역대 정권을 보면 대통령의 레임덕은 대부분 인사권 문제에서 비롯되었다. 아직 임기를 1년 8개월씩이나 남겨놓은 노 대통령이 자신의 ‘청와대 입문 동기’인 김병준 교육부총리의 임명마저 벽에 부딪치자 정치권에서는 대통령의 레임덕이 본격적으로 시작되었다고 보고 있다. 이것은 김대중 전 대통령의 예에서 쉽게 그 ‘학습효과’를 확인해볼 수 있다.
2001년 8월 노 대통령과 비슷한 1년 8개월의 임기를 남겨두었던 김대중 대통령(DJ)은 당시 임동원 통일부 장관의 자리를 지키는 데 실패하면서 급격한 권력 누수를 맞았다는 게 정치권의 공통된 평가다. 당시 DJP(김대중+김종필) 공동정권의 한 축이었던 자민련이 임 장관의 해임건의안을 통과시키는 데 ‘일조’하면서 DJ는 급격하게 레임덕 논란으로 빠져들고 말았다. DJ는 자민련의 행태에 격분해 DJP 공동정권도 깨지고 말았다.
DJ의 권위는 그 뒤 ‘시름시름’ 힘을 잃기 시작했고 대통령이 국정 장악력도 현저히 떨어졌다. 결국 석 달 후인 2001년 11월, DJ는 민주당 총재직까지 내던지며 두 손을 들어야 했다.
노 대통령이 역대 정권의 인사권과 관련한 레임덕 현상을 모를 리 없다. 이병완 비서실장이 최근 여당의 대통령 인사권 ‘관여’와 관련해 강한 불만을 토로한 것도 대통령의 레임덕 논란을 잠재우려는 의도에서 한 발언이라고 볼 수 있다. 정치권은 이 실장의 발언이 곧 노 대통령의 현재 심경이라고 보고 있다. 김 부총리의 사의표명이 있었던 지난 2일 청와대 관저에서 열린 정무관계 비서관회의에서 노 대통령은 강한 불쾌감을 토로한 것으로 전해진다. 청와대의 한 핵심참모는 “임기 1년 반을 남겨두고 마지막으로 남은 게 인사권인데, 고유권한인 인사권이 침해된 데 대해 노 대통령이 화가 나 있다”고 전한 바 있다.
▲ 웃으며 걸어나오는 노무현 대통령과 문재인 전 수석. 과연 끝까지 웃을 수 있을까. | ||
먼저 노 대통령이 이번에도 한발 물러설 가능성이다. 이병완 실장이 기자회견을 통해 당을 공격한 것은 ‘문재인 카드’의 관철 목적보다는 레임덕으로 비치는 것을 차단하기 위한 모양 갖추기일 가능성이 높다는 것이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 관계자는 이에 대해 “노 대통령이 이번에도 당 입장을 존중해 줄 가능성이 있다. 아직 정계개편이 시작된 것도 아닌데 문재인 카드 하나로 탈당을 하지는 않을 것이다. 더욱이 여당에서는 문 전 수석 기용을 김병준 부총리 때보다 더 심각한 상황으로 보고 있다. 지금 여당에서는 문 전 수석이 노 대통령을 망친 최악의 정무 보좌역이라는 의식이 팽배해 있다. 노 대통령도 여당의 그런 기류를 무시할 수만은 없을 것이다”라며 낙관론을 펴고 있다.
하지만 노 대통령의 ‘성격’을 잘 아는 또 다른 전략통 A 씨는 이번 사태를 다르게 보고 있다. 이 실장의 발언은 여당에 대한 강력한 경고라는 것이다. 집권여당이 대통령의 인사권을 흔들고 있는데 대해 “더 이상 좌시하지만은 않겠다”는 강한 뜻을 전달한 것이라는 해석이다. 장기적으로는 여당의 향후 태도에 따라 탈당을 통해 당·청 간의 결별을 먼저 결단할 수도 있다는 점도 내비치고 있다는 것이다. 일단 노 대통령은 지난 6일 김근태 의장 김한길 원내대표 등 열린우리당 지도부와의 오찬 간담회에서도 인사권 존중을 강조했지만 “탈당하지 않겠다”는 입장도 분명히 했다.
A 씨는 또한 “지금은 정동영 전 의장계가 전략적 협조 관계를 맺은 김근태 현 의장을 내세워 노 대통령을 압박하는 형국이다. 하지만 그들은 어차피 차기 대권주자가 되지 못하기 때문에 노 대통령과 정면 대결을 할 수 없는 사람들이다. 노 대통령이 아무리 힘이 없다고 하더라도 장관 한 명 정도 임명할 정도의 파워는 있다. 앞으로 확실한 차기 대권주자가 나오기 전까지 이런 소란은 계속될 것으로 본다”고 밝히면서 “노 대통령은 문재인 카드를 관철할 것이다. 김병준 부총리의 경우 개인적 하자가 많아 그의 낙마를 지켜볼 수밖에 없었지만 문 전 수석은 다르다. 이병완 실장의 말처럼 행정능력도 있고 사생활도 깨끗하고 재산문제도 없는 사람인데 여당이 계속 거부할 명분이 있겠느냐”고 반문했다.
특히 A 씨는 문 전 수석의 임명 뒤에 대해서도 언급하면서 “문 전 수석이 법무부 장관이 되면 정치권에 한바탕 사정 바람이 불 것이다. 어차피 문 전 수석은 정치권에 아무런 부채도 없지 않느냐. 노 대통령도 정치개혁을 명분으로 여의도에 사정국면을 조성한다면 낮아진 지지도도 회복하고 레임덕 논란에서도 벗어날 수 있다는 점에서 문 전 수석에게 그런 역할을 기대할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인사는 노 대통령의 측근들과 깊은 교분을 맺고 있다는 점에서 노 대통령 측의 대응책을 엿볼 수 있게 한다.
이런 기류로 볼 때 앞으로 노 대통령은 문재인 법무부 장관 카드를 던져놓고 열린우리당의 선택을 강요하는 수순을 밟을 가능성도 있다. 대통령의 인사권을 받아들이든지 결별을 요구하든지 양자택일하라는 것이다. 이 경우 열린우리당의 선택은 쉽지 않다. 이미 김 부총리의 인사권 거부로 한 차례 당·청 관계에 생채기를 냈기 때문에 이번에 또 다시 그것을 거부할 명분이 약하다. 또한 김근태 의장이 확실한 대권 주자가 아닌 상황에서 조기 당·청 결별을 하게될 경우 여당 프리미엄이 없어져 ‘식물 여당’이 될 수도 있기 때문에 김 의장으로서도 모험이 될 수밖에 없다. 그래서 노 대통령이 문재인 카드를 계속 강경으로 밀어붙일 때 여당은 친노-반노 그룹으로 나뉘어 심각한 자중지란을 먼저 맞을 것으로 보인다.
노 대통령이 장기적으로 선택할 수 있는 또 다른 정국 돌파 카드는 차기 대권 주자들을 계속 띄우는 것이다. 이는 천정배 전 법무부 장관이 당으로 복귀할 때의 경우를 통해서 확인해볼 수 있다.
청와대 정무 라인을 잘 아는 열린우리당의 한 관계자는 “천 전 장관은 당으로 복귀하면서 치밀한 언론 플레이를 통해 자신을 차기 대권 주자의 반열로 올리는 데 상당한 공을 들였던 것으로 안다. 그것은 또한 노무현 대통령의 의지이기도 했다. 앞으로 정세균 산업자원부 장관과 유시민 보건복지부 장관 등도 당으로 복귀할 것이다. 그때마다 노 대통령과 두 장관은 차기 대권주자라는 이미지를 인식시키기 위해 많은 노력을 할 것이다. 이는 차기 대권주자들이 활발한 경쟁을 하도록 함으로써 여권이 정국 돌파를 하는 데 디딤돌 역할을 하겠다는 뜻이 담긴 것이다”라고 밝혔다.
이 관계자는 또한 노 대통령이 완전 국민경선을 여권에 전격 제안할 가능성이 있다고 보고 있다. 청와대 실무라인도 검토 중인 이 안은 여당에서 말하는 완전 국민경선제(오픈 프라이머리)와는 그 개념이 약간 다르다. 신기남 의원 등이 주장하는 완전 국민경선제는 기간당원제를 현실에 맞게 보완해 ‘제한적 국민경선제’를 도입하자는 것이다. 하지만 청와대는 여당 후보의 프리미엄이 없이 외부 영입인사와 여당 후보가 똑 같은 조건 속에서 국민경선제를 통해 대권 후보를 뽑자는 것이다. 그럴 경우 여당에서 나온 인사가 대권 후보가 될 가능성이 그만큼 적어진다. 노 대통령이 여당에게 대권에 관한 프리미엄을 전혀 주지 않겠다는, 일종의 대여 견제책의 일환이라는 것이다.
이밖에 다소 현실성은 떨어지지만 ‘실세총리’의 임명도 꼽을 수 있다. 열린우리당의 한 전략관계자에 따르면 “한명숙 총리가 청와대의 기대에 못 미친다는 평가가 나온다. 최근 청와대가 FTA 관련 문제를 총리실에 일임했는데 한 총리가 맡기를 꺼렸다는 것이다. 한 총리가 국정을 잘 관리하고 있지만 정치 총리가 아니라는 점에서 청와대가 그의 역할에 고심하는 것도 사실이다. 그래서 앞으로 노 대통령이 정국 쇄신책 차원에서 총리를 교체한다면 차기 대권 주자 가운에 힘있는 인사를 총리로 임명해 국정을 내정-외치에 확실히 나누어 레임덕도 방지하고 안정적인 국정을 이끌어나갈 수도 있다. 김영삼 전 대통령 때는 이회창 이홍구 이수성 씨 등을 차기 대권을 염두에 둔 실세 총리로 임명해 대통령의 레임덕을 막는 역할을 했다고 할 수 있다. 노 대통령도 이해찬 총리가 재직할 때는 레임덕 논란 없이 편하게 할 수 있었지 않았느냐”고 말했다.
노무현 대통령은 문재인 카드의 관철 여부로 레임덕의 문턱에 바짝 다가와 있다. 과연 그는 어떤 카드로 그 문턱을 넘을 수 있을까.
성기노 기자 kino@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