봤지? 이제부터 시작이야
▲ 지난 18일 이봉주 선수가 2007서울국제마라톤대회에서 1위로 골인하고 있다. 사진제공=삼성전자육상단 | ||
큰 결심을 했다. 이봉주를 취재한 기간이 10년이 넘고, 또 현장에서 이봉주의 레이스를 본 횟수도 두 자릿수지만 감독(오인환)과 함께 코스를 돌며 취재한 적은 없었다. 대부분 기자실에서 TV화면으로 이봉주의 레이스를 봐 왔던 것이다. 전날부터 잠이 오지 않았다. 이번이 이봉주의 마지막 레이스가 될 수도 있다는 생각 때문이었다. 사실 이번에도 실패하면 은퇴압력이 거세질 것이고 이봉주가 제풀에 포기할 가능성이 높았다. 그래서 이번만큼은 기자실이 아닌 도로 위에서 오인환 감독과 함께 이봉주의 레이스를 지켜보기로 했다.
06:00 - “그래? 7시까지 와”
오인환 감독에게 전화를 했다. 사실 따지고 보면 결례였다. 기자가 코칭스태프와 함께 이봉주의 레이스를 따라 돈다는 것 자체가 관례를 깨는 일인데 그마저도 레이스 당일 아침 전화를 해서 동행 취재를 부탁했으니 말이다. 첫 마디가 “안된다”였다면 깨끗이 포기하고 그저 8시 이전에 광화문에 나가 이봉주가 출발하는 모습이나 보려고 했다. 그러나 오 감독은 “유 기자가 같이 움직이겠다고? 그래? 좋지 뭐. 지금 봉주 아침 식사하니까 7시까지 미대사관 뒷길로 와.”
예상외로 쉽게 승낙이 떨어졌다. 오랜 경험에 비춰 감독의 기분이 좋으니 이봉주의 컨디션도 나쁘지 않을 것 같다는 느낌이 들었다. 코스 전체가 교통 통제를 하는 까닭에 개인 승용차는 필요가 없었다. 서둘러 버스를 타고 광화문으로 향했다.
07:00 - “방금 몸풀러 나갔어”
미대사관 뒷길에서 문화관광부 쪽으로 걸어가다 보니 푸른 색의 회사 로고가 칠해진 삼성전자 차량 3대가 눈에 들어왔다. 삼성전자육상단의 조덕호 사무국장이 먼저 알아보고 반갑게 맞았다. 이어 오인환 감독, 안재근 단장과 인사를 나눴다.
“봉주는요?”
습관적으로 질문하자 오 감독은 “방금 몸 풀러 나갔어”라고 답했다. 표정과 목소리 모두 밝았다. 그만큼 훈련을 잘했다는 뜻이다.
“훈련 잘 됐어요?”
“훈련은 잘했어. 하지만 유 기자도 알다시피 훈련 잘했다고 다 잘 뛰는 거 아니잖아. 시드니올림픽 때 너무 훈련을 완벽히 해서 못해도 동메달이라고 했다가 넘어지는 바람에 실패한 거 직접 봤잖아.”
예전 쓰라린 실패담까지 농담조로 하는 걸 보니 정말 훈련이 잘 됐다는 느낌이 들었다.
점잖은 인상에 말수가 별로 없는 안재근 단장도 “날씨가 정말 예술이네. 마라톤하기에 딱 좋아”라며 은근히 기대감을 표출했다.
07:30 - 가족들도 총출동
이봉주는 한창 워밍업 중이었다. 200~300m 거리를 30분간 계속 달렸다. 다른 삼성 차량 근처에선 한 꼬마가 보였다. 응원하러 나오기도 벅차 보이는 작은 아이였다. 이상하다 싶어 자세히 보니 이봉주의 큰 아들 우석이(4세)였다. 가까이 가니 그 차에 우석이 엄마(김미순 씨)와 둘째 승진이(3세), 그리고 봉주 어머니(공옥희 씨)까지 함께 있었다. 삼성전자육상단에서 이봉주 가족을 위해 차량 한 대를 따로 내준 것이다.
이봉주는 워밍업을 마치고 경기복으로 갈아입기 위해 차량으로 들어갔다. 오 감독은 짬을 내 봉주에게 작전지시를 하기에 바빴고, 프런트들은 풀코스의 어느 어느 지점으로 이동할지에 대해 의논하고 있었다.
오 감독이 차에서 나온 사이 슬쩍 차 안으로 들어갔다.
“왔어?” 웃통을 벗은 이봉주가 특유의 썰렁한 인사를 했다. 기자가 “오늘은 머리띠 안 해?”라고 묻자 씩 웃으며 자기 머리를 한 번 쓰다듬었다. 정말이지 컨디션은 좋아 보였다. 벌써 이마에 땀이 송골송골 맺혀있었다.
몇 차례 대중목욕탕을 같이 간 적 있어 잘 알고 있었지만 다시 봐도 만 37세 이봉주의 몸은 대단했다. 옷을 입으면 왜소해 보이지만 실제로는 군살이 하나 없는 조각같은 몸매다. 문득 갈수록 튀어나오는 동갑내기 내 배가 부끄러워졌다.
출발 10분 전 이봉주가 시끌벅적한 출발지점으로 향해 먼저 떠나자 오 감독은 미처 하지 못한 말이 있었는지 급히 뒤쫓아 갔다. 마스터스 참가자들이 워낙 많아 이봉주를 찾기 힘들었다. 잠시 후 아나운서 “출발” 소리가 울려 퍼졌다. 이봉주도 뛰어나갔다. 그런데 출발 총소리가 울리지 않았다. 이봉주 등 선수들이 잠시 머뭇거리며 갸우뚱하다 그냥 레이스를 시작했다.
차량은 모두 세 대였다. 오인환 감독과 단장, 사무국장, 그리고 내가 탄 스타렉스 선도차량에 이봉주 가족의 승합차와, 삼성전자 후배들이 탄 미니버스가 함께 움직였다. 차량은 원래 계획했던 대로 청계천의 마지막 다리인 고산자교로 향했다. 11㎞ 지점이었다. 도착해 보니 바로 옆에 파출소가 있었다. 교통통제에 바쁜 경찰들도 TV중계를 보며 이봉주 응원에 한창이었다.
이봉주 어머니는 차에서 쉬고 있고, 대신 미순 씨가 두 아들을 데리고 거리에 나와 있었다. 작은 아이는 어린 탓에 아빠가 뛰는지 어쩌는지 관심이 없고, 그저 엄마에게 안겨 떨어질 줄 몰랐다. 길거리에서 언제 아빠가 오나 하염없이 기다리는 우석이가 안쓰러워 TV가 있는 파출소 안으로 데리고 들어갔다. 이봉주 아들이라는 설명에 경찰들이 “정말이냐? 정말 예쁘다. 안 닮았다”를 연발했다. 이미 ‘이봉주 얼짱 아들’로 인터넷 검색어 순위까지 오른 우석이였다. TV화면이 선두그룹을 비췄고 우석이에게 “아빠 찾아보라”고 하니 고사리같은 손가락으로 정확히 아빠의 얼굴을 짚었다. “아빠만 하얘”라는 설명과 함께. 모두가 웃었다.
조금 뒤 선두그룹이 고산자교 앞으로 다가오자 우석이를 데리고 길거리로 나갔다. 키가 작은 우석이가 아빠를 잘 볼 수 있게 들어서 난간에 세웠다. 벌써 30분을 넘게 달린 이봉주가 쓱 지나가면서 그 바쁜 와중에도 우석이를 쳐다보며 미소를 지었다. 기다림은 길었지만 보는 것은 순간이었다. 오 감독은 우리 일행과 떨어져 이봉주를 가장 가까이에서 볼 수 있는 지점으로 가 작전 지시를 했다.
09:40 - “초반 스피드 느려”
이봉주가 지나가자 일행은 또 바삐 움직여야 했다. 목표 지점은 32.5㎞인 영동대교북단 국민은행 사거리. 이봉주 같은 A급 마라토너는 15~20㎞지점까지는 거의 선두그룹에서 달린다. 따지고 보면 지금부터 승부인 셈. 장소는 작전지시를 내리기 가장 좋고, 또 승부처로 예상된 지점이다.
오 감독은 시간이 갈수록 긴장이 되는지 말수가 줄었고, 눈길을 스톱워치와 TV화면으로 바쁘게 옮기며 작전구상을 했다.
“생각보다 초반 스피드가 느려. 조금 속도를 내라고 주문했는데 모르겠네. 후반에 스퍼트하면 (2시간) 8~9분대는 가능할 것 같은데….”
페이스가 어떠냐는 질문에 오 감독이 조심스레 답했다.
마침내 이봉주가 지나갔다. 바짝 마른 입술에 초조해하던 오 감독은 봉주를 포함한 4명의 선두그룹이 지나가자 순간을 놓치지 않고 소리쳤다.
“봉주야 35㎞야. 그리고 계속 페이스 유지해!”
가장 힘들다는 30㎞ 지점을 통과한 탓인지 이봉주는 이번엔 표정도 없었다. 감독의 지시를 제대로 들었는지 의문이었다.
“됐다. 어서 가자!”
오 감독의 목소리로 봉주에게 제대로 작전지시가 전달된 것을 알 수 있었다. 이제 골인점을 향해 다들 차에 올랐다. 모두 페이스를 궁금해 하는 것을 알고 있다는 듯이 오 감독은 타자마자 “조금 빨라졌어요. 7분대 후반이나, 늦어도 8분대는 가능할 거 같아요”라고 말했다. 이제 골인지점인 잠실종합운동장으로 급히 가야했다. 긴장 상태는 최고조에 이르렀고, 레이스 초반과는 달리 누구도 쉽게 입을 열지 못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