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생 후반전 뛰려고 축구화 고쳐 신어요”
▲ 지난 독일월드컵 당시 현지에서 만났던 서정원. 30대 후반의 나이에 오스트리아에서 제 2의 전성기를 구가했던 그는 현재 지도자 과정을 밟으며 인생 후반전을 설계하고 있다. | ||
지난 2005년 오스트리아 잘츠브르크에 진출한 이후 그해 6월 SV리트로 이적해 2년 여 동안 ‘제2의 전성기’를 누렸던 서정원(37). 시즌을 마치고 팀과 재계약하지 않기로 결정한 서정원은 현재 선수로서 완전 은퇴냐, 아니면 1년 더 현역 생활을 연장하느냐의 기로에 놓여 있다. 동양인으로선 처음으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 ‘올해의 선수’로 뽑히는 등 오스트리아에서 축구 인생의 절정기를 보냈던 서정원은 차근차근 지도자 과정을 밟는 것에 더 무게를 두며 오스트리아 생활을 정리해 가고 있었다. 지난 23일 서정원과 전화 인터뷰를 나눴다.
“소감이요? 리트 팬들로부터 너무 과분한 사랑과 환대를 받고 떠나는 것 같아 감사하고 아쉬움이 남아요. 프랑스에서도 외국 생활을 해봤지만 이곳은 또 다른 느낌으로 강렬한 인상을 심어줬어요. 구단에서도 끝까지 배려를 아끼지 않았어요. 선수 외적인 부분에까지 눈을 뜨게 한 오스트리아에서의 생활을 잊지 못할 겁니다.”
서정원은 소감에 덧붙여서 ‘(한국에서) 잘 나왔다’는 말도 거듭 강조했다. 수원 삼성 시절 은퇴와 코치 제의를 해왔던 팀을 떠나 홀연히 오스트리아로 날아왔던 그는 당시의 선택이 현실보다 미래를 소중하게 생각한 그로선 탁월한 선택이었다고 한다.
“축구 선수치곤 제 나이가 많은 편이잖아요. 선수 생활에 대한 집착은 갖지 않으려고 해요. 오스트리아에 있으면서 D와 C급 지도자 과정을 마쳤거든요. B 라이센스를 취득해야 하는데 만만치가 않아요. 축구 외적으로 선수 다스리기, 선수 심리, 기초 의학을 다 배워야 해요.” 서정원하면 일부 팬들은 ‘비운의 스타’로 기억한다. 이유는 한 가지. 젊은 시절 좋은 조건에서 유럽 클럽팀으로부터 입단 제의를 받았지만 번번이 피치 못할 사정에 의해 무산되었기 때문이다.
그 첫 번째가 92년 바르셀로나올림픽을 대비해 첫 외국인 감독으로 영입한 데트마르 크라머 감독의 소개로 독일 분데스리가 명문팀 세 곳이 영입 의사를 밝혔던 일이다. 그러나 당시 소속팀 안양LG(현 FC서울)가 이적료를 제기하는 바람에 어쩔 수 없이 파토가 나고 말았다.
이후 92바르셀로나올림픽에서의 활약으로 서정원은 바르셀로나로부터 또다시 ‘러브콜’을 받는다. 이 또한 이적료와 군 문제가 겹치면서 협상을 마치고도 못 가는 안타까운 일이 벌어졌다. 97년 포르투갈 벤피카에선 등번호 9번이 적힌 유니폼까지 만들어 서정원과 입단 합의를 끝냈는데 당시 98프랑스월드컵 대표팀을 맡은 차범근 감독이 월드컵 예선전만 빼달라는 벤피카의 요구를 거부해 또다시 무산되었다.
서정원은 그 후 독일 FC쾰른의 프러포즈를 받았지만 역시 100만 달러 이상의 이적료를 요구하는 안양LG의 브레이크로 인해 결렬됐다가 결국엔 프랑스 스트라스부르로 진출하게 된다.
“해외 진출 도전사를 살펴보면 정말 파란만장했어요. 자다가도 벌떡 일어날 만큼 너무나 아까운 팀들도 있었고 소속팀의 이해 관계와 군 문제로 인해 무산됐을 때는 신세 한탄을 한 적도 많았어요. 하지만 인연이 아니기에 비켜간 거라고 믿었어요. 스페인도, 포르투갈도, 독일도 아닌 프랑스로 건너갔을 때는 스트라스부르가 내 인연이기에 그곳에 닿은 거라고 긍정적으로 생각했죠.”
서정원은 스트라스부르에 입단하자마자 데뷔골을 터트리며 ‘세오’ 열풍을 일으킨다. 시즌 마지막 게임에서는 2부 강등 위기에 있던 팀을 서정원의 결승골로 1부에 남게 되는 드라마틱한 상황도 연출됐다.
“스트라스부르 시내에 대형 간판으로 제 얼굴이 걸리기도 했고 팀 연간 회원권 홍보에 등장하는 등 간판 스타로 대접받았어요. 나중에 감독이 바뀌면서 팀 내 불화로 스트라스부르와의 밀월 관계가 깨졌죠.”
서정원은 스트라스부르와의 관계를 정리하고 수원 삼성으로 U턴하게 된다. 이로 인해 친정팀이었던 안양LG와 법정 소송까지 가는 사건이 발생했는데 더욱 안타까운 건 소송보다 무릎십자인대 부상이었다.
“삼성과 2년 계약을 하면서 1년 후 나가는 조건을 걸었어요. 그 당시에도 유럽팀에서 꾸준히 오퍼가 있었기 때문에 쉽게 나갈 수 있을 거라고 생각했어요. 하지만 무릎 부상으로 모든 계획이 산산조각이 나고 말았죠. 지금 생각해봐도 그때의 상황이 가장 아쉬워요. 스트라스부르에 계속 남아 있거나 다른 팀으로 옮겨갔다면 지금과는 또 다른 모습이 돼 있을 거예요. 너무 빨리 국내로 돌아왔고 부상과 수술, 재활로 1년 넘게 고생하면서 ‘서정원은 끝났다’란 얘기를 들어야 했습니다.”
“얼마 전 지성이가 다치고 나서 가장 두렵고 힘든 게 ‘재활’이라고 말했던 게 기억나네요. 정말 그래요. 그건 당해보지 않고선 도저히 설명이 불가능해요. 6개월 동안 사용하지 않은 부위를 움직이면서 다시 근육을 만들기까지 너무 너무 힘들거든요. 그런 다음 이전의 기량을 되찾아 활발한 플레이를 하기란 보통 오기와 보통 노력, 보통 강심장으론 해낼 수가 없어요.”
서정원은 재기했다. 수원삼성 서포터스들의 열렬한 응원과 지지 속에 그라운드에 우뚝 섰고 자신감을 되찾은 그는 이런저런 방향을 모색하다가 현실 안주가 아닌 또 다른 도전으로 오스트리아 분데스리가를 택한 것이다.
“이상과 현실이란 말 있죠? 제가 아무리 많은 지식과 경험을 갖고 있다 한들 절 필요로 하는 곳이 없다면 무슨 소용이 있겠어요? 제 선배들이 은퇴 후 제대로 자리를 잡지 못하고 방황하는 모습도 봤구요, 코치로 첫 발을 내딛은 선배가 예상치 못한 문제들로 번민하는 얘기도 들었어요. 전 천천히 가고 싶어요. 프로팀 지도자가 아니라 유소년도 좋고 청소년도 좋고 대학도 상관 안 해요. 유럽에서 좀 더 공부를 한 후 한국으로 돌아간다면 정말 마음을 비우고 화려한 타이틀보다는 소박하면서도 어린 선수들에게 유럽 축구를 제대로 가르칠 수 있는 기회를 만들고 싶습니다.”
서정원은 여건이 주어진다면, 아니 수원 삼성에서 허락한다면 은퇴 경기를 수원 삼성에서 마치고 싶다고 밝혔다. 이전 오스트리아에 진출하면서 수원 팬들과 약속한 부분이라 지키고 싶은 마음이 굴뚝 같지만 수원 삼성 측의 배려가 우선시돼야 하기 때문에 지금은 단정지어 말할 수 없다고 한다.
잘 나갈수록, 성적이 좋을수록, ‘행복 만땅’의 충만함을 느낄수록, 겸손함을 잃지 않으려고 마음 속 나사를 단단히 죄었다는 서정원. 그와 인터뷰를 하는 내내 한국의 젊은 축구 스타들의 얼굴이 오버랩됐다. 다른 건 몰라도 겸손함 속에 자존심을 지키며 이름이 아닌 실력으로 우뚝 선 대선배 서정원을 조금이라도 벤치마킹했으면 하는 바람 때문이다.
서정원은 인터뷰 말미에 축구 선수로서 좋아한다는 후배 박지성에게 의미있는 메시지를 남겼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