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립운동 위해 중국으로 간 청년이 중국 ‘혁명가곡의 아버지’로…
윤봉길 의사. 1932년 훙커우공원에서 조국의 독립을 위해 자신을 불사른 영혼. 그날이 4월 29일입니다. 이날처럼 훙커우에는 며칠째 봄비가 부슬부슬 내립니다. 파리와 뉴욕에서 더 알려졌던 한국인 화가 백철극. 그도 상해에서 살던 10년간 수조강가에서 그린 수많은 스케치와 유화를 남겼습니다. 그가 남긴 스케치 현장은 지금도 변함없이 그 자리에 남아 있습니다. 마지막 한 사람, 중국인들이 사랑하는 작곡가 정율성. 중국에서는 ‘혁명가곡의 아버지’로 불리는 사람. 인민해방군가를 작곡한 한국인입니다. 이들 모두 상해에서 자신의 꿈을 키우며 이 작고 아름다운 강을 거닐었을 것입니다.
상해 수조강 철교와 브로드웨이 맨션호텔(중앙), 그리고 당시의 러시아대사관(오른쪽)이 그대로 남아있다.
지금에야 우리에게 잘 알려진 중국의 작곡가 정율성이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고 꿈을 키운 곳이 상해입니다. 그는 중국인들이 가장 많이 부른다는 ‘중국인민해방군가’와 ‘연안송’을 만들었습니다. 중국 창건 50돌인 2009년엔 ‘신중국 창건 영웅 100인’에 선정되었습니다. 중국 노인들은 한국의 광주에 있는 그의 생가를 찾기도 합니다. 하지만 오랫동안 우리에겐 금기의 인물이었습니다. 그의 북한에서의 음악활동 때문입니다. 중국의 혁명이 성공을 거두자 그는 북한으로 건너가 평양음대 학장으로 지내며 ‘조선인민군가’ 등을 작곡한 이력이 있습니다.
세월이 많이 흐른 지금, 시진핑 주석도 한국 방문 기간 중 서울대 특강에서 작곡가 정율성을 얘기합니다. 우리 대통령이 중국을 방문했을 때 천안문 광장에 울려퍼지던 곡이 바로 그의 곡이기도 합니다. 이제 고향 광주에서는 그를 기리는 국제음악제가 매년 열리고, 중국 하얼빈 쑹화강변에는 ‘인민음악가 정율성 생애사적 전시관’이 세워졌습니다. 하얼빈은 그가 생전에 농공업 생산현장에서 일했던 곳입니다. 하얼빈에서는 베이징에 거주하는 유족들과 협의해 그의 유품들을 기념관에 영구전시하고 있습니다.
작곡가 정율성.
1914년 광주시 양림동에서 태어나 1976년 베이징에서 짧은 삶을 마감하기까지, 그의 생애는 드라마틱합니다. 그는 광주 숭일소학교를 마치고 전주 신흥중학교에 입학했으나 부친의 갑작스런 죽음으로 학업을 중단합니다. 1933년 봄. 그는 셋째 형을 따라 중국으로 갑니다. 19세 때입니다. 그의 집안은 독립운동가 집안으로 형제들도 대부분 중국으로 건너가 독립운동을 하다 목숨을 잃었습니다. 그의 본명은 정부은입니다. 하지만 상해에서 음악공부를 하며 이름을 바꾸었습니다. 그는 난징의 의열단에 가입하여 항일운동에 뛰어들었던 열혈청년이었습니다.
하지만 상해를 오가며 음악공부를 하게 됩니다. 그의 인생은 러시아 레닌그라드 음대 출신의 음악가 크리노와 교수를 만나면서 크게 바뀌게 됩니다. 성악, 작곡, 피아노, 바이올린을 배우면서 그는 자신의 음악적 재능을 발견하게 됩니다. 그때 자신의 이름 ‘부은’을 버리고 ‘율성’으로 개명을 합니다. ‘선율로 성공하겠다’는 뜻을 담은 이름입니다. 그가 상해를 오가며 결심한 것이 훗날 약 400편의 곡으로 남는 결실을 이루게 됩니다.
4년간의 음악공부를 마치고 그는 중국내 항일투쟁의 근거지인 연안으로 향합니다. 연안의 노신예술학교에 들어간 그는 모택동이 참석한 대규모 집회에서 ‘연안을 노래하다’라는 곡을 불러 청중들의 마음을 사로잡습니다. “아, 연안, 너 장엄하고 웅대한 옛 도시여!”로 시작되는 이 노래는 웅장하면서도 서정적이어서 중국 전역에서, 우리의 아리랑처럼 사랑받는 곡이 되었습니다. 바로 ‘연안송’입니다. 이어 ‘팔로군행진곡’을 창작했습니다. 이 곡이 북경아시안게임 개막식에 연주되던 ‘중국인민해방군가’가 되었습니다.
훙커우 지역 루쉰공원 안에 있는 윤봉길 의사 기념관 앞 추모비. 그날처럼 비에 젖어 있다.
딸 샤오티는 “아버지가 생전에 즐겨부르던 노래는 ‘메기의 추억’입니다. 옛날의 금잔디…로 시작하는 노래입니다. 늘 고향의 집을 그리워했습니다”라고 회고합니다. 그의 집안은 고향의 오래된 교회를 다녔는데 여기서 어린 시절 이 노래를 배웠다고 합니다.
그에게도 문화혁명은 큰 시련이었습니다. 모든 예술활동이 금지되었습니다. 약 10년간의 대동란 이후 현역으로 복귀했지만 그 시기의 고통이 너무 큰 탓인지 작곡하던 중 고혈압으로 쓰러졌습니다. 1976년 12월. 조국독립을 위해 19세에 이국으로 떠난 청년, 음악으로 혁명과 전투에 나섰던 천재 작곡가는 숨을 거두었습니다. 그는 중국 국립묘지인 빠바오산 혁명묘역에 안치되었습니다.
작고 고요한 상해 수조강. 이 강을 따라 그 시절의 중앙우체국과 철교와 브로드웨이 맨션호텔이 그대로 보입니다. 그 옛날 그도 이 강을 따라 걸으며 두고 온 고향집과 가슴속을 흐르는 음악과 조국의 슬픔을 생각했을까요.
정선교 Mecc 상임고문
필자 프로필 중앙대 문예창작과 졸업, 일요신문, 경향신문 근무, 현 국제언론인클럽 미얀마지회장, 현 미얀마 난민과 빈민아동 지원단체 Mecc 상임고문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