클린턴처럼 되지 말란 법 있수?
▲ 김근태 의장. 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5·31 지방선거와 7·26 재보선 패배로 위기의 당을 구해내려는 김 의장이 ‘뉴딜론’을 들고 나왔을 때 당내에서는 “장고 끝에 기껏 내놓은 것이 뉴딜이냐” “늘 하던 얘기 아니냐”고 수군거렸다. 뉴딜론의 핵심이라 할 수 있는 출자총액제한제도 폐지 검토, 경영권 보호장치 마련 등의 규제완화는 그가 늘 해왔던 얘기다. 물론 그때마다 여권에서는 정체성을 거론하며 비판이 쏟아졌다.
재계에서도 “청와대, 정부와 협의를 거치지 않고 가능할까”라는 반응을 보이며 김 의장의 뉴딜론에 대해 반신반의하는 눈치다. 더욱이 이번 8·15 광복절 특사에 김 의장이 건의했던 경제인 사면은 기대만큼 이뤄지지 않았다. 결국 “일회성 이벤트로 끝나는 것 아니냐”는 반응이 주를 이뤘다. 그럼에도 김 의장의 ‘뉴딜 투어’는 “절박한 심정으로” 계속되고 있다. 재계와의 순회간담회에 이어 지난주부터 한국노총을 방문해 노동계와의 뉴딜에 착수했다. 그가 뉴딜론에 집착하며 마이웨이 행보를 계속하는 것은 그 길만이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를 가시적으로 보여줄 수 있기 때문이다.
현재 당 안팎의 상황은 김 의장에게 달리 선택의 기회를 주고 있지 않다. 김병준 교육부총리와 문재인 법무장관 카드로 불거진 청와대와의 갈등은 겉으로 봉합된 것처럼 보이지만 깊은 감정의 골만을 확인한 채 돌이킬 수 없을 정도로 김 의장과 노무현 대통령을 갈라놓았다. 당내에서도 김 의장이 청와대와 싸울 땐 싸우고 할 말은 하라고 부추기는 주전론자들은 정작 김 의장이 청와대와 각을 세우면 한발 물러나 구경만 하고 있다고 한다.
유력한 대권주자로서 김 의장은 본격적인 대선레이스가 펼쳐질 때까지 당을 깨뜨리지 않고 잘 유지해야 한다. 김 의장 측의 한 인사는 “깨진 당의 선장보다는 깨지지 않고 그런대로 당을 이끌어가는 선장이 낫지 않느냐”고 전했다.
여기에 노 대통령이 최근 ‘외부선장론’을 언급하며 대권후보의 영입가능성도 흘리고 있는 마당이다. 어떤 의미에서는 김 의장의 대권주자 가능성을 부인하는 말로 들리기도 한다. 여기에 발맞추듯 친노직계 그룹에서는 ‘오픈 프라이머리’(개방형 국민경선제)에 대한 논의가 급물살을 타고 있다.
▲ 클린턴 전 미국 대통령 | ||
또한 이 뉴딜론에는 정치공학적 정교함도 숨겨져 있다. 92년 미국 대선에서 민주당의 클린턴이 공화당의 단골메뉴인 ‘감세론’을 들고 나와 이슈를 선점했다. 클린턴은 이 감세론으로 재선이 유력했던 아버지 부시 대통령을 누르고 대선에서 승리했다. 클린턴의 감세론이 김 의장에게는 뉴딜론이 되는 것이다. 이에 대해 김 의장 측은 “꼭 그런 것을 염두한 것은 아니다. 서민경제를 살리기 위한 절박한 심정에서 나온 것”이라고 말했다.
김 의장 측의 한 인사는 “만일 뉴딜론을 다른 사람이나 한나라당이 들고 나왔다면 가능했겠나”라고 반문하며 “뉴딜론은 GT이기 때문에 가능한 것이고 주목을 받는 것이다”라고 강조했다. 즉, 전혀 예상치 못했던 재야파의 수장 김 의장이 뉴딜론을 주장하기 때문에 의미가 있고 ‘사회적 대타협’이 되는 것이다. 그리고 이것이 정치공학적으로 계산된 변신이 아니라 오래 전부터 김 의장이 고민해왔고 보건복지부 장관시절부터 지난 2월 전당대회, 7·26 재보선 이후 의장직을 승계하면서도 약속했던 공약이라는 것이다.
이런 강한 의지는 지난 18일 영등포 당사에서 열린 확대간부회의에서도 밝혔다. 김 의장은 “정치공세와 이기심을 버리고 바라보면 지금 국민이 정치권에 간절히 바라는 것은 오직 한 가지 경제, 특히 서민경제를 어떻게 할 것인가밖에 없다”며 “정치권이든 경제계든 시민사회든 머리를 맞대고 대화를 시작해야 한다. 이것은 당위가 아니라 국민에 대한 의무”라고 역설했다. 비장함마저 느껴지는 대목이다.
그러나 김 의장이 재계에 이어 노동계로까지 ‘뉴딜 투어’를 하고 있지만 성사여부는 불투명하다. 먼저 청와대가 불쾌하다는 반응을 보인다. 청와대는 뉴딜론이라는 것이 결국 노 대통령과의 차별화 전략으로 보며 뉴딜이 성공한다면 그건 곧 참여정부가 이제까지 공들여 완성해놓은 것을 허무는 것이라고 받아들이고 있다. 인사문제로 야기된 당과 청와대 간의 갈등을 일단 봉합하고 서로 코드를 맞추는 모양새를 취했지만 청와대로서는 마무리 차원의 개혁입법과 조치를 위해 9월 정기국회에서 당의 도움이 절실한 입장이다. 청와대가 당장은 당과 발을 맞추겠지만 정기국회가 끝나면 당과 청와대가 완전히 갈라설 것이라는 것이 여권의 대체적인 시각이다.
여기에 당내 대권주자 간 역학관계도 무시할 수 없다. 정동영 전 의장이 일선에서는 물러났지만 정동영계는 여전히 건재하다. 이들이 김 의장의 성공을 가만히 구경하지는 않을 것이다. 김 의장이 뉴딜론을 발표했을 때 정동영계인 김한길 원내대표는 ‘절차상의 문제’를 두고 걸고 넘어졌다. 정동영계에서는 김 의장의 뉴딜론을 양극화 해소를 위한 대선 전략으로 보고 있다. 또한 김 의장은 뉴딜론에 대한 여론을 이달 말까지 수렴해 올 연말쯤 최종 완결판을 선보이겠다는 나름의 타임 스케줄을 가지고 있다. 그러나 열린우리당의 투톱체제상 김 의장에게 시간이 별로 없어 보인다. 당장 9월 정기국회가 열리면 김 원내대표가 주인공이 된다. 원내 일정과 상황이 많은 정기국회 기간에는 당 운영을 맡은 김 의장보다 원내를 맡은 김 원내대표에게 힘이 더 실린다. 김 의장으로서는 힘이 빠질 수밖에 없다.
그러나 당의 지지율을 제고하고 김 의장 자신의 대권가도에서 마지막으로 승부수를 던질 수 있는 지금이 그에게 주어진 위기이자 기회이다. 정치적 운명을 건 김 의장의 ‘뉴딜 행보’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이기도 하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