비행기 태웠다 내렸다… ‘홍명보 멀미 났겠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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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지난 2일 환송식에서 베어벡 감독과 홍명보. 홍명보는 베어벡 후임으로 사람들의 입에 오르내리면서 꽤 마음고생을 한 것으로 알려졌다.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대한축구협회는 7월 29일 새벽(한국 시간) 베어벡 감독이 사임을 발표한 이후 6일 만인 8월 3일 오후 박성화 부산 아이파크 감독에게 앞으로 1년간 올림픽대표팀 지휘봉을 맡긴다고 선언했다. 7월 30일 성인 축구대표팀과 올림픽대표팀 감독을 분리하고 올림픽대표팀 감독에는 국내 지도자를 임명한다는 원칙을 세운 지 5일 만에 부임한 지 17일밖에 안 된 K리그 감독을 ‘올림픽호’로 빼온 것이다.
# 설마가 사실로
축구협회 가삼현 사무총장은 7월 29일 아시안컵 한-일전 직후 베어벡 감독이 공식기자회견장에서 사임을 발표하자 곤혹스러운 표정을 지었다. 가 총장은 경기가 열리기 몇 시간 전 베어벡 감독과 식사를 함께했다. 이영무 기술위원장도 있던 그 자리에서 베어벡 감독은 가 총장에게 불쑥 사임 의사를 밝혔다.
가 총장과 이 위원장은 베어벡 감독이 여론과 언론의 비판에 중압감을 느끼고 즉흥적으로 사임을 결정했다고 생각하고 “한국에 돌아가서 다시 얘기를 하자”며 다독였다. 하지만 베어벡 감독은 가 총장 등의 만류에도 불구하고 공식기자회견장에서 사임 의사를 공개적으로 밝혔다. 한국에 있던 축구협회 수뇌부들은 베어벡 감독이 30일 귀국 인터뷰에서 사임 번복이 없음을 못 박기 전까지 베어벡이 정말 떠날 것으로 생각하지 않았다. 인천국제공항으로 선수단을 마중 나간 김호곤 전무가 베어벡 감독의 귀국 기자회견에 귀를 기울이며 진의를 파악할 정도였다.
축구협회는 베어벡의 뜻이 확고한 걸 알자 바쁘게 움직였다. 인도네시아에 머무르고 있던 정몽준 회장이 베어벡에게 직접 전화를 걸어 사퇴 결정을 재고해줄 것을 요청했고 가 총장은 베어벡과 점심을 함께하며 올림픽대표팀 감독직은 계속 맡는 게 어떠냐고 권유했다.
베어벡 감독은 부산을 떠는 축구협회에 “내 결정은 바뀌지 않는다”고 전한 뒤 4일 네덜란드로 떠났다.
# 뻔한 카드였다
축구협회는 30일 오후부터 부랴부랴 올림픽대표팀 감독 선정에 나섰다. 가 총장, 김 전무, 김재한 부회장 등이 수시로 회동을 하며 대책을 논의했고 이 위원장은 매일같이 기술위원들을 불러 의견을 나눴다.
축구협회가 난리법석을 떠는 가운데 한 고위 관계자는 “박성화, 김호곤, 홍명보 셋 중에 하나”라고 귀띔했다. “시간적인 여유가 있다면 다른 대안을 찾을 수 있겠지만 8월 22일 우즈베키스탄과의 베이징올림픽 아시아 2차 예선이 코 앞으로 다가온 터라 올림픽대표팀을 이끌 만한 지도자가 한정돼 있다”고 전했다.
1순위 박성화 감독은 20세 이하 청소년대표팀을 지도하면서 현 올림픽대표팀 주축 선수 대부분을 길러낸 주인공이다. 2순위 김호곤 전무는 2004 아테네올림픽 8강을 이끈 공로가 있고 3순위 홍명보 코치는 지난 1년 동안 베어벡을 도와 올림픽대표팀을 지도한 경험이 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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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올림픽 대표팀 새 사령탑으로 내정된 박성화 감독.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 홍명보는 수석 코치로
홍명보 코치는 수많은 생각을 했다. 감독으로 모시던 분이 나간 마당에 계속 팀에 남아있는 게 옳은 일인지를 따져봤다. 지도자 경험은 부족하지만 한번 올림픽대표팀을 맡으면 어떨까하는 야망도 불태웠다. 홍 코치는 너무도 힘들었기에 친한 선배들에게 전화를 걸어 조언을 부탁하기도 했다.
홍 코치의 뜻과는 상관없이 언론에 홍명보 감독 내정설이 오르락내리락 거렸다. 소위 ‘홍명보 대세론’이 신문의 헤드라인을 장식하자 지도자들 사이에서는 미묘한 반응이 나왔다. 소장파 지도자들은 “명보가 못할 게 뭐 있냐. 능력 있는 친구다. 로이 킨이나 가레스 사우스게이트는 선수에서 감독으로 바로 변신했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연륜있는 지도자들은 “훌륭한 선수와 훌륭한 감독은 차이가 있다. 명보는 아직 경험과 연륜이 부족하다. 명보의 앞날을 봐서라도 지금은 때가 아니다”라는 의견을 내놓았다. 물론 일부에서는 “올림픽대표팀이나 대표팀은 모든 지도자들의 꿈이다. 그런데 젊은 친구가 그 자리를 차지하면 다른 선배들은 뭐가 되느냐”며 노골적으로 불만을 보이기도 했다.
언론 보도로 축구 지도자들의 의견이 나뉘자 축구협회의 한 관계자는 비웃듯 말했다. “언론이 헛다리짚고 있는 건데….” 이 관계자는 “홍 코치가 감독 후보로 거론된 건 맞지만 박성화, 김호곤 카드 다음이었다. 장외룡 감독이나 조광래 감독 등이 후보로 올랐다는 건 소설”이라고 주장했다.
한편 이영무 기술위원장은 3일 박성화 감독 선임을 발표하는 자리에서 “아시안컵 3~4위전에서 홍 코치가 퇴장해 추후 징계를 받을 수 있는 점 때문에 마지막 순간 감독 후보에서 뺐다”고 알렸다.
박성화 감독은 기자회견에서 “부산 구단과 팬들에게 백번 사죄해야 한다. 올림픽대표 선수들에 대한 관심도 있었지만 급박한 상황 때문에 올림픽대표팀을 맡게 된 면이 강하다”라고 밝혔다. “홍명보 코치에게 올림픽대표팀에 합류해줄 것을 제의했고 긍정적인 답변을 받아냈다”고 전했다.
홍 코치는 측근을 통해 “박 감독을 잘 보좌하겠다”며 수석코치 제의를 받아들이겠다고 밝혔다. 베어벡 감독 사임 발표 후 6일 동안 축구협회와 담당 기자들은 다양한 시나리오와 소설들을 쏟아냈다. 그 소설 속의 주·조연을 맡았던 사람들은 한동안 속깨나 끓이고 있을 것 같다.
전광열 스포츠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