월드컵도 히딩크도 떠난 지금 ‘제2의 박지성은 없다’
![]() |
||
▲ 지난해 2월 4일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에서 시즌 첫 골을 터뜨린 박지성. 이제 박지성처럼 유럽에 진출하기는 힘들 것이라고 한다. | ||
목표가 무엇이냐는 질문에 축구선수 열에 아홉은 이 같은 대답을 한다. ‘제2의 박지성’, ‘제2의 이영표’가 되겠다는 야망을 거침없이 밝힌다. 2002년 한일월드컵 전까지 유럽 운운 하는 선수는 흔치 않았다. 하지만 잉글랜드 프리미어리그나 스페인 프리메라리가 경기가 생중계되고 박지성이 ‘천하의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 입단하면서 세상이 바뀌었다.
유럽진출에 대한 의지를 밝히지 않으면 ‘꿈도 없는 한심한 놈’이 되는 상황이지만 현실은 그리 만만하지 않다. 유럽 구단들과 직접 접촉하는 에이전트들은 “빅3(잉글랜드, 스페인, 이탈리아)는 고사하고 독일, 프랑스, 네덜란드에 가기도 힘들다”고 귀띔한다.
#실력+구단 협조+운
지난 몇 달간 K리그 스타급 선수의 프리미어리그 이적을 추진했던 한 에이전트의 말이다. 이 에이전트는 지난 5월 중순 선덜랜드가 측면 공격수를 찾는다는 얘기를 듣고 자신에게 위임장을 써준 선수의 프로필을 선덜랜드 스카우트 담당자에게 건넸다. 한 달 넘게 선덜랜드와 의견을 주고받던 이 에이전트는 지난달 말 아무런 소득도 얻지 못한 채 일을 접었다. 스타급 선수의 소속 구단이 ‘마른하늘에 날벼락 같은 결정’을 내렸기 때문이다.
“프리미어리그에서 한국선수가 4명이나 뛰니까 그곳에 가는 게 어렵지 않은 줄 아는 사람들이 많아요. 하지만 현실은 그렇지 않습니다. 유럽 구단들은 K리그 수준을 높이 평가하지 않아요. 계약기간이 남아있는 K리그 선수를 데려오기 위해서 10억 원대의 이적료가 필요하다는 얘기를 하면 황당한 표정을 짓죠. 문제는 또 있습니다. 유럽으로 가고 싶어 하는 선수 중 대부분이 병역미필자잖아요. 그것도 무시 못 할 걸림돌입니다.”
#유럽서 검증돼야 영입
맨체스터 유나이티드 알렉스 퍼거슨 감독은 지난달 우라와 레즈(일본)와 친선경기를 벌인 뒤 의미심장한 얘기를 했다. 맨유를 상대로 우라와 선수들이 선전했다고 생각한 일본 기자들이 맨유의 아시아 선수 추가영입 계획을 묻자 “유럽 무대에서 검증된 아시아 선수만 영입할 것”이라고 심드렁하게 대답했다. 이어 “박지성을 봐라. 그는 네덜란드 에인트호번에서 뛰면서 유럽무대에서 자신이 통한다는 걸 보여줬다. 우리는 그걸 보고 영입했다”고 덧붙였다. 퍼거슨 감독의 인터뷰는 유럽 정상급 구단 관계자들이 아시아 선수 영입에 대해 어떤 방침을 세웠는지를 단적으로 보여준다.
![]() |
||
▲ 설기현. | ||
이 선수가 K리그 고액 연봉 5위 안에 드는 스타이자 독일월드컵 최종엔트리에 든 국가대표 출신인 터라 이적은 급물살을 탈 것처럼 보였다. 하지만 그 선수의 엄청난 이적료와 병역문제를 전해들은 유럽 구단들은 입에 발린 말만 할 뿐 아무런 관심도 보이지 않았다.
#꿈같은 시절 얘기일 뿐
한일월드컵이 끝난 뒤 6명의 선수(박지성, 이영표, 이을용, 송종국, 차두리, 이천수)가 유럽 구단에 입단했다. 지금은 상상조차 할 수 없는 무더기 유럽진출이었다. 이런 일이 가능했던 건 ‘월드컵 효과’다. 유럽 구단들은 월드컵 경기에서 포르투갈, 이탈리아, 스페인을 상대로 펄펄 나는 한국선수들을 주목했다. 또 그들을 응원하는 열광적인 붉은 물결을 보며 마케팅적인 가치가 대단할 걸로 내다봤다.
한일월드컵의 열기가 식을 때쯤 유럽구단들은 한국선수에 대한 환상에서 깨어났다. 한국선수들의 마케팅적인 가치가 예상보다 낮음을 파악했고 병역문제와 고액의 이적료 탓에 한국선수를 영입하는 게 생각만큼 쉽지 않다는 걸 깨달았다.
![]() |
||
▲ 이동국. | ||
#확률 반반 도전은 계속
최근 몇 년 동안 적지 않은 선수들이 ‘제2의 박지성’을 꿈꾸며 유럽무대로 떠났다. ‘젊어서 고생은 사서도 한다’며 자신만만하게 도전장을 내던졌다. 김동현(수원 삼성)은 포르투갈과 러시아, 현영민(울산 현대), 이호, 김동진(이상 제니트)은 러시아 프로리그에 진출했다. 자의반 타의반이긴 하지만 홍순학(수원 삼성)은 오스트리아, 이호진(무적)은 스페인으로 향했다. 하지만 딕 아드보카트 감독이 데려간 김동진과 이호를 뺀 모든 선수들이 1년도 못 버틴 채 짐을 쌌다. 군소리그에서 실력을 쌓고 빅리그로 간다며 떠났지만 군소리그에서도 버티지 못한 채 귀국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현실은 냉혹하지만 지금도 도전을 선택하려는 선수들은 많다. 20세 이하 대표팀의 간판공격수로 활약했던 제주 유나이티드의 심영성은 최근 러시아 프로리그 진출을 추진했다. 내년 6월 성남 일화와의 계약이 끝나는 김두현도 이적을 희망한다. 일본 시미즈 S 펄스에서 뛰는 조재진 역시 잉글랜드와 네덜란드 무대를 저울질하며 유럽행을 검토한다. 성공할지 실패할지 장담할 순 없지만 어차피 확률은 반반이라는 게 이들의 생각이다.
전광열 스포츠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