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를 한 건 내 인생 최고의 선택”
▲ 팔꿈치 수술이라는 어려운 상황임에도 추신수는 환한 웃음으로 맞아주었다. 사진=소피 J 신 프리랜서 | ||
클리블랜드 인디언스 산하 트리플A 버팔로 바이슨스에서 외야수로 뛰고 있는 추신수를 만날 때만 해도 그는 왼쪽 팔꿈치 부상 때문에 수술이냐 대표팀 합류냐를 놓고 갈등 중이었다. 기자와 인터뷰하기 전날 클리블랜드의 마크 샤피로 단장과 전화 통화를 했다는 추신수는 “팀에서 올림픽 대표팀 합류를 완강히 반대한다”며 “대표팀보다 팔꿈치 부상을 치료하거나 하루 빨리 수술하길 바란다”라고 전했다. 그동안 추신수가 얼마나 간절히 대표팀에 발탁되길 소원했는지를 잘 아는 기자로선 그의 갈등과 번민이 제대로 와 닿았다.
결국 추신수는 지난 9월 26일(한국시간) LA 조브센터에서 LA 에인절스 팀 닥터인 루이스 요커 박사로부터 왼쪽 팔꿈치 인대 접합 수술(일명 ‘토미 존 서저리’)을 받았다. 이로써 올림픽대표팀 합류는 무산됐고 그는 오랜 재활을 거쳐 내년 4월 이후나 야구장에 모습을 드러낼 예정이다.
마이너리그 시즌이 끝나기 직전 버팔로 바이슨스 더그아웃에서 진행된 추신수와의 인터뷰를 정리해 본다.
추신수가 몸 담고 있는 버팔로 바이슨스 팀은 지난해 최향남(롯데)이 ‘눈물 젖은 빵’을 먹으며 메이저리그 등판을 위해 절치부심했던 바로 그곳이었다. 그래서인지 버팔로 바이슨스 구장을 찾았을 때 분위기가 낯설지가 않았다. 구단 직원들은 물론 선수들까지 한국에서 찾아 온 취재진에게 깊은 관심과 친절을 보이며 추신수와의 인터뷰를 업그레이드 시켜줬다.
―왜 이렇게 표정이 안 좋아요?
▲어제 단장이랑 통화를 했거든요. 팀에선 제가 대표팀에서 뛰지 않기를 바라요. 수술 여부를 빨리 결정하라는 거예요. 어제부터 공을 조금씩 세게 던지고 있는데 공을 던져서 또다시 통증이 생기면 수술 여부를 결정해야 할 것 같아요.
―그렇다면 올림픽 대표팀 합류가 불투명한 거네요.
▲그렇죠. 솔직히 제 팔에 대해 확신이 안 서요. 통증이 심하진 않지만 이전처럼 마음 놓고 송구를 못해요. 어느 해보다 내년 시즌이 굉장히 중요하거든요. 올해로 마이너리그 옵션을 다 썼기 때문에 팀에선 절 무조건 메이저리그 40인 로스터에 포함시켜야만 해요. 몸이 좋은 상태에선 좋은 기회지만 부상 상태에선 너무나 불안한 기회인 셈이죠.
―부상도 불편할 텐데 마음까지 더더욱 편치 않겠어요.
▲사실 제가 여기서 인정받은 부분이 다른 외야수보다 송구 능력이 뛰어나기 때문이거든요. 투수 출신이라 비거리와 파워가 상당한 편이에요. 그런데 만약 공을 이전처럼 던지지 못한다면 전 정말 평범한 선수에 불과합니다. 그렇다고 홈런 타자도 아니잖아요. 정말 기구하다고 느끼는 게 WBC나 아시안게임은 팀에서 허락했는데 한국에서 안 뽑고, 지금은 뽑혔는데 팔도 그렇고 팀에서도 반대하고…. 아! 머리가 돌 지경입니다.
―부상 정도가 얼마나 심한 거예요? 훈련하는 것 보니까 멀쩡해 보였는데.
▲일반 인대가 이렇게 생겼으면 난 이 정도까지 벌어졌대요. 투수 같으면 바로 수술을 해야 한다고 합니다. 외야수니까 일단 지켜보자는 게 의사의 진단이었어요. 수술은 마지막 방법입니다. 내년 시즌이 너무 중요하기 때문에 수술 전에 해볼 수 있는 건 다 해볼 생각이에요. 지금 수술하면 내년 5~6월이나 뛸 수 있거든요. 그런데 만약 대표팀에 합류하고 스프링캠프 때 수술할 경우 내년 시즌은 물 건너가게 되는 거죠.
―팔꿈치 부상으로 플로리다에서 재활훈련을 했잖아요? 그 과정도 만만치 않았을 것 같아요.
▲제가 야구를 시작한 이후 부상자 명단에 오른 것도 처음이고 2~3일 이상 야구를 쉰 것도 그때가 처음이었어요. 적응이 안 됐죠. 한창 야구할 시기에 더운 지역에서 가족들과 아침 저녁으로 함께 지내니까. 뭐랄까, 착잡하면서도 행복하고 행복하면서도 불안한 상태라고나 할까. 미국 오고 나서 그 시기에 야구를 안 한 적이 없었기 때문에 처음엔 상당히 이상했죠. 시애틀에선 그 좋은 기록 가지고도 팀에서 기회를 주지 않아 못 뛰었고 여기선 기회를 주는데도 아파서 못 뛰니까 미치겠더라구요. 올해 정말 제 인생이 제대로 꼬이는 해인가 봐요.
그 순간 갑자기 사마귀 한 마리가 더그아웃에 나타났다. 기자도 놀랐지만 기자보다 더 놀란 사람이 추신수였다. 훈련하던 선수들까지 달려와 사마귀 출현에 정말 다양한 반응들을 나타냈다. 추신수는 세상에서 가장 싫어하는 곤충이 사마귀라고 한다. 선수들은 인터뷰를 하는 추신수를 보며 “추야! 추야!”하고 불렀다. 무슨 소리냐고 물었더니 추신수 왈, “한국에선 친한 친구 이름 뒤에 ‘야’를 붙인다고 알려줬더니 그 후론 계속 절 부를 때 ‘추야’라고 부른다.”
―시애틀 매리너스에 입단한 게 2001년이니까 벌써 7년이 지났네요. 긴 시간들이었던 만큼 그동안 많은 일들이 있었죠.
▲한국에서 용병이 못하면 어떻게 합니까. 바로 쫓아내잖아요. 여기서도 마찬가집니다. 저도 용병 신분이라 만족할 만한 성적을 내지 못하면 곧바로 퇴출당해요. 세계 각국에서 최고의 선수들만 모이는 곳이 미국이잖아요. 경쟁 자체가 살벌할 수밖에 없어요. 더블A, 트리플에도 못가고 그만두는 선수가 한두 명이 아닙니다. 200명 선수들 중에 두세 명만 메이저리그에 올라가요. 그런 점에서 박찬호, 김병현, 서재응 선배 등은 정말 대단한 거예요.
▲ 기자가 구장을 찾던 날, 버팔로의 할아버지 팬이 마술을 보여주겠다며 연습 중인 추신수에게 카드를 한 장 뽑아달라고 부탁하기도 했다. | ||
▲지금은 (한국으로 돌아갈 생각이) 전혀 없죠. 그래도 절 필요로 하는 팀이 있다는 게 감사해요. 그 일 이후로 5월경에 SK 구단 관계자분들이 절 찾아오셨더랬어요. 한국 복귀 의사를 타진해보는 차원의 방문이었습니다. 하지만 제 꿈이 여기서 야구하는 것임을 분명히 밝혔고 돈보다 더 중요한 게 미국에서 야구하는 거라고 말씀드렸습니다.
―올시즌 대부분의 한국 선수들이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시작했고 결국 마이너리그에서 시즌을 마치게 됐어요. 어리석은 질문 한 번 해볼게요. 과연 진짜 이유가 뭘까요.
▲음, 제 생각엔 한국 선수들의 직업 정신이 너무 투철해서 그런 게 아닐까요? 이거 아니면 안 된다는 생각 말이죠. 미국 애들은 야구말고도 할 게 많다고 생각해요. 즉 야구를 그만두더라도 다른 일을 할 수 있다고 생각해요. 하지만 우리는 어떤가요? 나를 포함해서 어렸을 때부터 야구만 보고 달려왔잖아요. 공부를 한 것도 아니고 돈이 많은 것도 아니고 야구가 아니면 내 인생 끝이라는 생각으로 매달려 왔죠. 너무 절실하기 때문에 과하게 집착하게 되고 야구만 파고 살다 보니까 종종 부작용도 나타나는 것 같아요.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건가요?
▲전 다시 태어나도 야구를 할 것이고, 다시 태어나도 미국 야구에 도전할 겁니다. 한국 야구가 수준이 낮아서가 아니에요. 야구선수로서 세계적으로 야구 잘 하는 선수들이 모인 큰 무대에서 뛰고 싶을 뿐입니다. 사실 메이저리그는 모든 야구 선수들의 꿈의 무대잖아요.
―미국 야구에 도전하거나 도전을 꿈꾸는 후배들에게 해주고 싶은 말이 있다면.
▲메이저리그에 대한 허황된 꿈만 꾸지 말고 철저히 준비하고 철저히 자신을 낮추라는 말을 해주고 싶어요. 한국에선 최고의 타자, 투수로 대접받았을지 몰라도 여기선 그냥 평범한 선수일 뿐이거든요.
―좀 뜬금없는 얘긴데 왜 (류)제국의 전화를 받지 않았어요? 노포크에서 류제국을 만났는데 여러 차례 전화를 했는데도 받지 않더라며 뭐라 하더라구요.
▲그래요? 제국이 번호가 뜨질 않았는데…. 요즘 워낙 여기저기서 전화가 많이 와서 아는 번호 아니면 받질 않거든요. 한 번 전화해 놓구 뻥 치는 거 아닌가? 하하.
―오늘 인터뷰하면서 새삼 느낀 점이라면 ‘추신수=진지맨’이라는 것. 정말 말 한 마디 한 마디가 진지하다 못해 진중할 정도예요. 집에서도 그래요?
▲제가 좀 생각이 많은 편이에요. 쉽게 선택하거나 쉽게 결정하는 법이 없어요. 그리고 전 뭐든지 준비된 상황이 좋아요. 아침에 나간다면 그 전날 저녁에 입을 옷과 바지, 양말, 신발까지 다 준비해 놓고 자요. 시간 약속도 굉장히 중요하게 여깁니다. 와이프한테도 종종 작은 부분까지도 신용을 잘 지키라고 말하곤 해요.
―정말 철저하시네. 너무 그러면 속으로 많이 부대껴요. 때론 대충하고 사는 것도 필요해요. 물론 야구는 예외지만. 지금도 전광판에 있는 기록을 보지 않나요(추신수는 다른 숫자는 못 외우는데 유독 전광판에 올려진 기록만큼은 머리에서 지워지지 않는다고 한다. 한때 그 기록이 오랫동안 기억이 나 굉장히 고생을 했다는 후문이다).
▲기록을 보고 싶을 만큼 올시즌 야구 성적이 신통치 않았잖아요. 타석에 들어서면 정면에 전광판이 보여요. 그걸 보지 않으려고 헬멧을 내려 써요. 투수만 보일 정도로요. 그 기록을 보면 야구에 집중이 안 되거든요. 그러고보니 기록 안 본 지도 한참 된 것 같네.
추신수는 인생 최고의 선택을 묻는 질문에 결혼과 야구라고 말했다. 결혼 전에는 야구가 최고의 선택이었는데 결혼 후에는 결혼이 최고의 선택이라며 가정적인 면모를 드러냈다. 자신의 야구를 ‘항상 열심히 하는 것, 항상 후회없이 하는 것’이라고 결론 지은 그는 비록 대표팀과 또 다시 인연을 맺지 못한다고 해도 크게 좌절하거나 아파하지 않을 것이라고 다짐하듯 말을 옮겼다. 수술을 통해 야구 인생에 잠시 ‘쉼표’를 찍은 추신수가 내년 시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제대로 된 ‘마침표’를 찍을 수 있기를 진심으로 소원해 본다.
버팔로=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