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태환이는 내 인생의 꿈이었다”
▲ 박태환을 키운 노민상 감독이 정슬기 성민 등 또다른 유망주들을 조련해 또 한번 세상을 놀라게 하고 있다. 우태윤 기자 wdosa@ilyo.co.kr | ||
지난 8월 19일 어느 수영인의 블로그에 올라 온 글이다. 소신과 신념을 가진 감독은 바로 노민상 감독(51)을 가리킨다. 박태환(경기고3)을 초등학교 때부터 가르쳐 세계적인 선수로 키워냈고, 경영 국가대표 감독으로 정슬기(연세대)의 U대회 우승과 남자배영 4년 만의 한국기록(성민) 그리고 10월 광주전국체전에서는 정슬기-최혜라(서울체고1)-신해인(북원여고3)의 릴레이 한국신기록으로 세상을 놀라게 했다. 10월 25일 노민상 감독을 태릉에서 만났다.
마침 이날은 김봉조 전 수영연맹이사와의 폭행사건에 대한 2심 재판이 열리는 날이었다. 지난 2월 박태환이 노민상 감독의 품을 떠나 드림팀을 구성했고, 이 과정에서 폭행사건이 발생했는데 노 감독은 “맞았다”, 김 이사는 “자작극”이라고 각각 주장하며 진실게임을 벌였다. 1심에서 노 감독이 승소했지만 김 이사가 항소했다.
노 감독은 주문했다. “그 얘기(폭행사건)는 굳이 쓰지 말아 달라. 진실은 밝혀진 셈이니까. 아픔을 딛고 좋은 분위기에서 성적도 잘 나오고 있는데 굳이 안 좋은 얘기를 들춰낼 필요가 없지 않은가.” 그럼 차라리 합의를 하고 법정공방을 중단하는 게 어떠냐는 지적에 대해서는 단호하게 답했다. “다른 건 다 양보해도, 자작극에 대해서는 용서할 수 없다. 내가 자작극을 하는 사람이면 어떻게 아이들을 가르치겠나.”
본격적인 수영 이야기로 화제를 돌렸다. 지난 2월 폭행사건 당시 노 감독은 <일요신문>과의 통화에서 “한국 수영의 군계일학인 박태환은 어차피 품을 떠났고, 이제 쉽지 않겠지만 나머지 선수들을 끌어올리겠다”고 약속했다. 그런데 1년이 채 안 돼, 아니 6개월 만에 이 약속이 실현되고 말았다. 여자수영에서 국제대회 우승과 한국 신기록이 잇달아 터져 나온 것이다.
한국 수영의 돌풍을 이끌고 있는 주역에게 비결을 물었다. 노 감독은 “시스템과 분석, 그리고 끊임없이 연구하는 자세 이 세 가지가 중요하다”고 강조했다. 시스템에 대해서 “나는 별로 하는 게 없다. 방준영 우원기 코치가 열심히 했고, 체육과학연구원의 송홍선 박사가 큰 도움이 됐다. 정말 다들 열심히 했다”고 설명했다. 팀 분위기에 대해서도 “수영 선수들은 정말 혹독한 훈련을 한다. 이 과정에서 체벌 등이 일어난 것도 사실이다. 하지만 이제 더 이상 그런 식으로는 안 된다. 선수들을 인간적으로 대접하는 분위기가 이뤄져야 한다. 예전부터 난 선수들에게 특별한 주문사항이 있으면 책을 한 권 사서 메모를 붙여 전달했다. 그러면 대부분의 선수들은 감동한다. 무엇보다 감독과 선수와의 인간적인 믿음이 중요하다.”
노 감독은 ‘과학 수영’에 대해서도 한마디 덧붙였다.
“난 선수로 운동을 잘하지도 못했고, 배운 것도 없다. 오직 지도자로 성공하기 위해 많은 노력을 기울였다. 인터넷이 발달되기 전에도 미국에서 원서를 구해 선진수영이론을 공부했는데 확실한 것은 더 이상 주먹구구식으로는 안 된다는 사실이다. 특히 지도자들이 많은 공부를 해야 한다”라고 주문했다.
▲ 박태환 | ||
1956년 한강 옆 한남동의 어려운 집안에서 태어난 노민상은 전형적인 ‘60년대 한강아이’였다. 특별히 놀 것이 없었던 시절, 겨울에는 꽁꽁 언 한강 위에서 썰매를 탔고 여름에는 헤엄을 쳤다. 유난히 수영을 잘해 초등학교 3학년 때 한강을 가로질러 반대편 잠실 모래밭에서 놀다오곤 했다. 그러다 우연히 오산중고 수영부가 한강에서 훈련하는 것을 봤고 머리를 물속에 담그는 신기한 영법에 자극을 받아 오산중학교로 진학하며 수영선수가 됐다.
젊은 노민상은 오산고를 졸업하기 전 선수생활을 포기했고 이후 군대를 다녀온 후 초등학교와 수영클럽에서 힘겨운 지도자 생활을 했다. 반원초등학교에서 우승 신화를 달성했지만 결국 쫓겨났고, 대치동 무궁화스포츠센터에서 수영반을 맡아 94년까지 16년 동안 근무했다. 무궁화수영반 때 만난 초등학교 1학년 꼬마가 바로 박태환이었다. 특유의 성실한 지도력으로 스포츠센터 이사까지 됐지만 오너가 바뀌는 바람에 윙수영클럽(현 AW클럽)을 만들어 독립했고 이후 10명이 넘는 국가대표를 배출하며 한국 최고의 수영클럽으로 육성했다.
노 감독은 육상의 고 정봉수 코오롱 감독을 연상시킨다. ‘한’의 지도자였던 정 감독은 불우한 선수시절을 보냈지만 집념 하나로 김완기 황영조 이봉주 권은주를 키워내며 한국마라톤의 중흥을 이끌었다. 마찬가지로 선수 생활이나 학력 등 뭐하나 변변히 내세울 게 없는 노 감독도 노력 하나로 한국 수영의 큰 물줄기를 일으킨 것이다.
자연히 화제는 박태환으로 이어졌다. 이 세상에서 부모 다음으로 박태환을 잘 아는 노 감독은 말을 아꼈다. 온 국민의 관심 속에 드림팀 등이 박태환을 위해 최선의 노력을 기울이고 있기 때문에 자칫 불필요한 오해를 받고 싶지 않다는 뜻이었다. 하지만 노 감독은 한 가지만 강조했다. “정말 태환이는 천재예요. 그리고 실력뿐 아니라 인간성도 바른 녀석이지요. 지금도 대회 때 만나면 참 반가워요. 광주 체전에서 만났을 때 ‘그게 뭐야?’라고 물었더니 ‘그러게요, 저도 모르겠어요’라고 답하더군요. 장거리에서 성적이 안 나오는 것에 대한 얘기였지요. 장거리에서 성적이 나고, 단거리가 부진한 것은 괜찮아요. 하지만 단거리는 좋은데 장거리 기록이 나쁘면 문제가 있어요. 이건 제 생각이 아니라 호주 일본 등 세계적인 지도자들이 다 인정하는 거지요. 태환이가 세계 최고로 우뚝 서기 위해서는 장거리에서 더 분전해야 합니다.”
박태환에 대한 이야기가 나오자 노 감독은 “그 녀석은 정말 내 꿈이었는데…”라는 말로 더없는 아쉬움을 나타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