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러나 은퇴는 아직 내 얘기 아닙니다”
▲ 남성 패션몰을 창업한 안정환. 뒤에 아내 이혜원 씨의 모습도 보인다. 사진=이종현 기자 jhlee@ilyo.co.kr | ||
(www.liahnhomme. com)’를 창립했다는 소식에 더더욱 그를 직접 만나고 싶었다. ‘리안옴므’는 아내 이혜원 씨가 운영하는 ‘리안
(www.liahn.co.kr)’의 계열사로 안정환이 축구 선수라는 본업 외에 패션몰 사장과 모델로 활약하는 부업인 셈이다. 모델, 운영 및 관리 등을 담당하는 안정환은 처음에 자신의 진로가 결정되지 않은 상황에서 인터뷰에 나서는 걸 다소 꺼려했지만 오랜만에 만난 기자 앞에서 자신의 축구 인생과 새로운 도전에 대해 솔직한 심경을 표현해냈다.
약속 시간에 맞춰 강남구 청담동에 위치한 ‘리안’의 사무실에 나타난 안정환의 표정은 무척 밝았다(밝지 않을 이유도 없지만^^). 방금 운동을 마치고 돌아오는 길이라는 안정환은 비시즌 중에도 새벽훈련과 오전, 오후 훈련을 거르지 않고 있었다. 피부색도 훨씬 좋았고 몸놀림이 한층 가벼워진 것 같아 최근 진로 문제로 고민하고 있을 거란 예상을 보기 좋게 넘겨버렸다.
‘리안옴므’ 대표로 나선 배경에 대해 안정환은 이런 설명을 곁들인다.
“전 오래 전부터 은퇴 후에 지도자로 나설 생각이 없었어요. 다른 경험을 해보고 싶었고 기회가 주어진다면 새로운 분야에서 일하고 싶었거든요. 마침 아내가 쇼핑몰을 하는 걸 지켜보면서 간접경험을 하게 됐고 아내의 노하우와 전폭적인 지원 하에 ‘리안옴므’를 만들게 되었어요. 물론 안정환이 패션 쇼핑몰을 운영하는 데 대해 의아하게 생각하는 분들이 계실 거예요. 지금까지 축구선수가 이런 일을 한 사례도 없었구요. 하지만 앞으로 운동할 시간이 많이 남지 않았기 때문에 지금부터 준비하지 않으면 힘들어요. 축구에 지장을 주지 않는 선에서 일을 할 예정입니다.”
원래 ‘리안’은 안정환의 장모가 운영하는 ‘토브’란 음식점의 창고를 개조해서 사업을 시작했다. 아내 이혜원 씨가 밤잠 설치고 발품을 판 덕분에 세련미와 퀄리티가 높은 옷들이 많다는 입소문이 나면서 사업을 시작한 지 1년 만에 청담동의 빌딩 한 층 전체를 사용할 만큼 급성장했다. 이 과정을 제대로 지켜본 안정환은 아내의 존재가 없었다면 ‘리안옴므’도 탄생하지 못했을 것이라고 말한다.
“초라한 창고 같은 데서 일하는 아내를 보면서 때론 안쓰럽고 미안하기도 했는데 이만큼 성장시킨 부분이 정말 대단하다는 생각밖에 안 들어요. ‘리안’도 자체 디자인을 하는데 ‘리안옴므’도 독특한 감각이 돋보이는 디자인으로 승부를 걸려구요. 특징이라면 ‘안정환스러운’ 디자인이 많다는 거겠죠.”
어린시절 가난하고 불우한 환경을 보낸 안정환은 ‘옷’에 대한 철학을 이렇게 풀어낸다.
“어렸을 때는 옷이 없어서 부끄러웠던 기억만 있어요. 가질 수 없다보니까 갖고 싶은 욕심이 많았죠. 돈을 벌기 시작하면서 옷과 신발 구입에 신경을 많이 썼던 것 같아요. 한이 있었죠. ‘없어 보인다’는 소리가 너무 듣기 싫었거든요. 그러다보니까 그때는 제 스타일이 없었어요. 비싸고 좋은 것이 전부인 줄 알았죠. 하지만 이젠 많이 달라졌어요. 아내의 조언도 도움이 됐지만 ‘나다운 걸’ 알고 찾아내는 안목이 생기더라구요. 요즘 축구선수들도 대중에 노출이 많이 되는 만큼 외적인 이미지 가꾸기에 노력을 많이 해야 해요.”
안정환은 ‘리안옴므’를 자신의 브랜드라고 말하기엔 아직 더 많은 노력과 정성을 기울여야 한다며 자세를 낮춘다. 지금은 시작하는 단계이기 때문에 숱한 시행착오를 겪을 수 있지만 이런 과정이 반복되는 가운데 제대로된 패션 브랜드가 탄생할 수 있을 것이란 기대를 갖게 한다.
안정환-이혜원 부부만큼 질투와 질시, 비난의 ‘3종세트’를 이룬 커플도 드물다. 미스코리아 출신이라는 화려한 타이틀과 뛰어난 미모, 그리고 화제를 몰고 다니는 잘생긴 축구선수는 ‘한국의 데이비드 베컴 부부’라는 달갑지 않은 수식어와 함께 이런저런 시선들 속에서 엄청난 희로애락을 겪어냈다. 이에 대해 안정환은 “지금은 시간이 지나서 많이 편해졌지만 한때 그런 일들로 자주 다툴 만큼 힘든 시기도 있었다”면서 “남들의 시선과 관심, 평가에 신경 쓰다보니 우린 아무 일도 못하고 손가락 빨고 있어야 했다”며 이미 지난 일이란 부분을 강조했다.
안정환이 결혼할 당시 그의 나이 스물여섯 살. 아내는 스물두 살이었다. 주위에선 빠른 결혼에 말도 많고 만류도 했었지만 안정환은 만약 자신이 일찍 결혼하지 않았다면 주위의 많은 유혹과 태클들로 인해 힘든 축구 인생을 보냈을 것이라고 단정짓는다.
오랜 외국 생활을 접고 K리그로 복귀했을 때 안정환의 성공 여부에 대해 정작 그 자신은 어떤 생각을 했을까.
“공백기가 있어서 힘들 거라고 예상했어요. 그러나 막상 돌아와 보니까 K리그가 발전한 부분도 있지만 반면에 변하지 않은 것도 많더라구요. 그런 부분들이 답답했어요. 구체적으로 언급하기는 어려워요. 개인적으로 안타까운 부분으로 남아 있다는 말씀밖에 드릴 수가 없네요.”
안정환은 K리그에서 이룬 자신의 성적표에 대해서도 냉정한 평가를 보여줬다.
“전혀 보여드린 게 없잖아요. 가장 큰 원인은 제 자신이지만 여기서 말씀 드릴 수 없는 복합적인 문제들도 있었어요. 팬들에게 죄송할 따름이죠. 특히 팀 서포터스인 ‘그랑블루’에서 제가 불미스런 일로 힘들어 했을 때 많이 도와주셨거든요. 다른 사람에겐 미안하지 않는데 그 분들에게는 정말 죄송해요. 하지만 아직 제 축구 인생이 끝나지 않았잖아요. 겨울 동안 준비 잘해서 내년 시즌에, 어디서든 좋은 모습 보여드릴 수 있도록 노력할 겁니다.”
안정환을 만난 날 영국의 한 축구 전문지 기자가 자신의 블로그에 한국축구의 문제점을 꼬집는 글을 올려 화제가 되었다. 이에 대해 안정환은 “한국 축구는 퇴보가 아닌 멈춰있는 상태”라고 수정했다.
“앞으로 2002년 때의 성적을 기대하는 건 무리라고 봐요. 어쩌면 2002년 4강 진출이 우리에게 ‘약’이자 ‘독’이 된 것일 수 있어요. 하지만 희망은 있어요. 젊은 선수들이 열심히 하고 있으니까. 요즘 젊은 선수들의 ‘거품론’이 회자됐지만 선수들에겐 그런 비난에 신경 쓰지 말라고 당부하고 싶어요. 성적이 좋지 않으면 항상 나오는 말이니까. 그런 ‘거품론’은 오래 전부터 나왔던 얘기예요.”
내년 시즌 진로를 모색하고 있는 안정환에게 ‘은퇴’란 단어를 꺼내기가 참으로 민망했지만 오히려 안정환은 담담히 그 단어를 받아 들였다.
“아직 ‘은퇴’란 단어가 저에게 해당되는 건 아니라고 봐요. 하지만 지금 제 상황이 변화에 대한 갈증을 느끼고 있고 준비해야 하는 시점이라 축구에 대해 더욱 애착을 느낀다는 게 솔직한 심정입니다. 전 멋있게 은퇴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만약 별 볼일 없이 은퇴하려면 아예 조용히, 싹 사라질 겁니다.”
인터뷰를 달가워하지 않는 안정환이지만 인터뷰를 하면 자신의 속내를 많이 표현해 내는 그이다. 하지만 외국 클럽에 있을 때 만난 안정환과 K리그에 몸을 담고 있는 안정환의 인터뷰 내용은 많이 달랐다. 이전에는 말하는 데 대해 거침이 없었던 반면에 지금은 언어 구사에 신중을 기해 남에게 상처가 되거나 피해주는 발언은 하지 않으려고 애쓰는 모습이 역력했다. 팬도 많고 안티팬도 많은 안정환. 그러나 그가 우리에게 선물한 ‘기쁨들’만큼은 쉽게 잊을 수 없을 것이다. 그는 ‘부진할 수밖에 없었던’ 올시즌을 정리하고 내년 시즌, 새로운 도약과 도전을 약속하며 이렇게 마무리를 지었다.
“내년에 어디서 뛰든 올해 못한 것 두세 배 이상으로 갚을 게요. 욕도 많이 먹었고 과분한 사랑도 받았어요. 욕하신 분들도, 사랑을 보내주신 분들도 모두 저에 대한 관심의 표현이라고 생각해요. 거듭나는 안정환이 될 수 있도록 열심히 살겠습니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