그라운드 ‘산삼’ 쏙쏙 캐는 ‘심마니’ 떴다
▲ 우여곡절 끝 축구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허정무 감독. 앞으로 활약에 축구팬들의 관심이 모아지고 있다. 사진은 지난 7일 허 감독의 기자회견 모습. 임준선 기자 kjlim@ilyo.co.kr | ||
허정무 감독은 현재 축구대표팀의 주축 선수 대부분을 발굴했다. 남들은 외면했던 박지성(맨체스터 유나이티드)과 이영표(토트넘 홋스퍼)에게 태극마크를 달아줬고 설기현(풀럼), 이천수(페예노르트), 송종국(수원 삼성) 등의 잠재력을 간파해 대표팀의 기둥으로 길러냈다.
허 감독이 ‘흙속의 진주’를 발굴하는데 일가견이 있다 보니 그의 대표팀 감독 취임을 바라보며 많은 축구인이 고개를 끄덕인다. 또 외국인 감독이 왔다면 지금 대표팀에 있는 선수 파악에만도 적지 않은 시간을 보내겠지만 현 대표팀 선수들을 속속들이 알고 있는 허 감독은 그 시간에 한국 축구의 다음 10년을 이끌어 갈 ‘제2의 박지성’을 찾을 것이라고 기대한다.
심마니가 산삼을 캐듯 잠재력 있는 선수들을 기가 막히게 찾아내는 허 감독은 단기전 성적이 유달리 좋은 지도자로 유명하다. 지난 2005년 전남 지휘봉을 잡고 K리그에 복귀했던 허 감독은 정규리그에서는 별 재미를 못 봤지만 지난해와 올해 FA컵 정상에 연거푸 오르며 대회 사상 첫 2연패를 달성했다.
허 감독이 단기전에 강한 이유는 그의 실용적(?)인 축구 때문이라는 분석이 있다. 이런 분석을 내놓는 전문가들은 “‘허정무 축구’의 골자는 수비축구에 이은 역습이다. 이 때문에 경기는 재미없지만 최소한 지지는 않는다. 이런 축구는 장기레이스에서는 큰 힘을 발휘하지 못해도 단기 레이스, 단판 승부에서는 확실하게 빛을 발하는 경우가 많다”고 주장한다.
2010년 남아프리카공화국월드컵 아시아 3차 예선과 최종예선은 한 경기 결과에 따라 희비가 엇갈릴 수 있는 단기 레이스 무대다. ‘허정무 축구’가 빛을 낼 수 있는 환경이다.
그러나 허정무 감독이 대표팀 지휘봉을 잡은 것에 부정적인 의견을 보내는 사람들도 적지 않다. 허 감독의 소극적인 축구와 시류에 뒤처지는 전술을 걱정해서다. 허 감독이 이끈 전남은 올해 정규리그에서 10위에 머물렀다. 26경기에서 7승9무10패를 거두며 24득점 27실점을 기록했다. 이 과정에서 재미없는 축구의 상징인 0-0 무승부(4회)가 서울(9회)에 이어 가장 많은 팀이라는 불명예를 안았다. 무득점 경기도 11경기에 달해 ‘허정무 축구=소극적인 수비축구’라는 인상을 풍겼다.
허 감독은 공부를 게을리하는 K리그 감독 중 한 명이란 소문에도 휩싸여 있다. 성남 김학범 감독이나 인천 장외룡 감독처럼 선진축구의 흐름을 적극적으로 배우려 하지 않고 기존의 낡은 지도방식과 축구 스타일을 고수한다는 이야기다. K리그의 한 지도자는 “전남은 정말 분석이 안 되는 팀”이라며 ‘허정무 축구’의 후진성을 지적했다.
▲ 지난 7월 우즈베키스탄과의 아시안컵 평가전을 앞두고 소집된 축구 국가대표 선수들. 연합뉴스 | ||
허 감독은 세련되지 못한 지도방식이나 독선적인 성격 때문에 비판을 받기도 한다. 전남 소식에 밝은 한 관계자는 “선수들이 가장 가기 싫어하는 팀이 전남이다. 연고지가 ‘깡촌’인 광양이란 점도 있지만 허 감독이 워낙 고강도 훈련을 시키기 때문에 선수들이 전남 가는 걸 귀양가는 것처럼 생각한다”고 귀띔한다.
이 관계자는 “허 감독은 전남 감독 부임 이후 선수단 계약권을 쥐고 연봉협상을 주도했는데 이 과정에서 독선적인 행동을 보여 선수들은 물론 코치들이나 구단 프런트와도 마찰음을 냈다”고 알렸다. 이어 “허 감독의 군기 잡기식 지도법이 당장은 나태해진 대표팀에 긍정적인 영향을 줄 수 있겠지만 ‘1980년대식 지도법’이 계속될 경우 선수단의 사기와 전력에 오히려 해가 될 수 있다”고 우려했다.
한편 허 감독의 지도방식에 특별한 문제가 없다는 의견도 있다. 그의 지도방식이 강도 높은 것은 사실이나 이것을 꼭 구시대적인 것으로 봐서는 안 된다는 말이다. 이런 주장을 펴는 이들은 “오히려 강도 높은 훈련을 소화하지 못하고 ‘앓는 소리’를 내는 젊은 선수들의 정신자세가 문제 있지 않은가”라고 반문하며 “선수들을 잡는 게 구시대적인 지도방식이라면 모든 것을 꼼꼼하게 통제하는 성남 김학범 감독의 지도방식도 문제 삼아야 하지 않느냐”며 선입관을 갖고 허 감독을 바라보면 안 된다고 말한다. 이어 “허 감독은 7년 전(대표팀을 이끌고 2000년 레바논 아시안컵을 치렀던 때)에 비해 여러 면에서 성숙했다. 그의 선임을 무작정 잘못된 선택이라고 비난하기보다는 지도자로서 한 단계 성장한 허 감독을 차분하게 지켜본 뒤 평가를 내리는 게 옳다”고 덧붙인다.
전광열 스포츠칸 축구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