한국인 위령비 앞은 ‘쓸쓸’…“일본의 역사 인식 바뀌어야”
조니 어니스트 백악관 대변인은 지난 10일(현지시간) “오바마 대통령이 오는 5월 26일과 27일 일본 이세시마에서 열리는 주요7개국(G7) 정상회의에 참석한 뒤 히로시마에 방문할 예정”이라고 밝혔다. 오바마 대통령은 지난 2009년 노벨평화상 수상 당시 핵무기 확산 방지와 폐기를 주장한 바 있다. 또한 지난해 8월 원폭 희생자 위령식에 로즈 고테밀러 국무차관이 파견됐고 지난달 11일에는 존 케리 국무장관이 히로시마 평화기념공원을 방문하기도 하며 꾸준히 오바마 또한 히로시마를 찾을 것이 점쳐져 왔다.
히로시마 시는 수년 동안 오바마 대통령의 방문을 요구해왔고 아베 신조 일본 총리도 방송을 통해 “원폭 피해 실상을 접하면 왜 일본이 ‘핵무기 없는 세계’를 호소하는지 이해할 수 있을 것”이라며 기대감을 나타냈다.
오바마의 연설이 펼쳐질 장소로 알려진 원폭돔.
퇴임을 9개월가량 앞두고 있는 오바마 대통령은 임기 내 세계 평화와 핵무기 사용 근절이라는 업적을 위해서도 히로시마를 방문할 것으로 예상돼 왔다. 그는 히로시마 평화공원을 찾아 공개 연설을 진행할 계획이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일요신문>은 먼저 오바마의 연설이 펼쳐질 장소부터 찾았다. 히로시마 평화공원은 원폭의 잔해인 ‘원폭 돔’을 중심으로 조성됐다. 원폭 투하 당시의 모습을 그대로 보존하기 위해 최소한의 지지대만이 설치돼 있었다.
‘원폭 돔’이라는 이름이 붙은 돔 형식의 천장은 폭발 당시 열로 인해 철골 구조만 앙상하게 남아 있다. 지붕 아래 건물의 중심부는 일부 외벽이 남아 피폭 당시의 참혹함을 보여주고 있다.
기자가 히로시마를 찾은 지난 4일은 서일본 최대 축제라는 ‘히로시마 플라워 페스티발’ 기간과 겹쳐 방문객들로 도시 자체가 붐볐고 ‘원폭 돔’ 역시 수많은 인파가 몰려 인산인해를 이뤘다. 일본 내 다른 도시뿐만 아니라 각국의 관광객들이 ‘인류가 만든 부끄러운 문화유산’을 바라보며 전쟁과 핵무기의 위험성에 대해 다시 한 번 생각하는 시간을 가지고 있었다.
원폭 돔에서 오타 강을 건너면 히로시마 평화공원이 본격적으로 펼쳐져 있다. 공원 곳곳에 희생자들의 넋을 기리고 평화를 기원하는 기념물들이 자리했다.
공원의 서쪽 끝에는 한국인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도 세워져 있다. 위령비는 멀리서도 한눈에 한국인 희생자를 위한 것임을 알아 볼 수 있었다. 위령비가 전형적인 한국식 비석의 형태를 띠고 있었기 때문이다. 거북이 모양의 받침대 위로 글자가 새겨진 사각기둥이 세워져 있다. 거북이의 목에는 히로시마 내 한인들이 걸어놓은 것으로 보이는 글귀 등이 걸려 있다.
한국인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에 걸려 있는 글귀들.
공원의 가장자리에 세워진 위령비 앞에서 한국인을 만날 기회가 있을 것 같은 기대감에 30여 분을 기다려 봤지만 위령비에 1분 이상 머무르는 사람조차 만나기 힘들었다. 가까운 거리에서 다른 기념물이나 플라워 페스티발을 즐기기 위해 인파가 몰리는 것과는 대조되는 모습이었다. 공원 관리인으로 보이는 일본 남성만이 위령비 주변을 정리하고 거듭 묵념을 반복할 뿐이었다.
원폭 투하 당시 히로시마에는 약 10만 명의 한국인이 살고 있었고 이 가운데 2만 3000여 명의 희생자가 발생했다. 히로시마 희생자 23만 명의 10%에 해당되는 적지 않은 인원이다. 하지만 이 비석이 평화공원 내에 세워진 것은 아직 20년도 지나지 않은 최근의 일이다. 한국인 위령비는 현지 당국의 불허로 최초 1970년에는 공원밖에 건립될 수밖에 없었다. 이후 30여 년이 흐른 1999년에서야 공원 안으로 이전, 설치될 수 있었다.
공원을 나서 히로시마의 중심부인 나카 구 번화가로 접어들며 한인들을 만나 목소리를 들어볼 수 있었다. 이들은 오바마의 히로시마 방문에 대해 환영하면서도 일본인의 오만에는 경계하는 모습을 보였다.
히로시마의 대학에서 강의를 하고 있는 김 아무개 씨는 “오는 오바마의 방일 일정은 이곳의 일본인이나 한인 모두 대체로 환영하는 분위기다. 하지만 한인들은 그의 방문이 일본이 일으킨 전쟁에 면죄부를 주는 격이 되지 않을까 걱정하고 있다”고 말했다. 백악관에서는 이처럼 일각에서 거론되는 ‘원폭 투하에 대한 사죄를 구하러 오바마가 방문하는 것 아니냐’는 의문에 “사죄가 아닌 추모의 의미”라고 선을 그었다. 그럼에도 김 씨는 일본인들이 오바마의 방문으로 전쟁에 대한 책임감을 완전히 잊는 것은 아닌지 우려했다.
한국인 피해자를 위한 위령비.
이어 김 씨는 “일본의 역사 교육이 문제”라며 “그들은 원폭 피해에 대해서만 이야기할 뿐 왜 그런 사건이 일어났는지에 대해서는 모르고 있다”고 꼬집었다.
그는 일부 한국 언론에서 제기하는 ‘오바마는 한국인 위령비도 찾아야 한다’는 주장에 대해서는 “그렇게 된다면 좋겠지만 현실적으로 이뤄지겠나”라며 회의감을 드러냈다.
5년째 유학중인 이 아무개 씨는 “일본의 젊은 층들은 오바마의 방일에 대해 잘 모르거나 관심이 없는 편”이라며 일본 내 여론을 전했다. 그 또한 일본인들의 원폭에 대한 인식과 관련해선 “일본의 젊은 세대는 전쟁을 치르던 중 원폭이 떨어진 것은 알고 있지만 그 전쟁이 누가 어떻게 시작했는지는 잘 모른다”며 목소리를 높였다.
그러면서 “한인 원폭 피해자들이 아직 소수 생존해 계신 것으로 알고 있다. 중요한 것은 이들에 대한 사과와 일반인들의 관심이 더 필요하다는 것이다”라고 말했다.
김상래 인턴기자 scourge25@naver.com