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가평 촌뜨기’ 밭 빌려 연습
▲ 연합뉴스 | ||
혹시 결례가 되지 않을까 조심스럽게 던진 질문에 지은희는 이렇게 시원시원하게 답했다. 알다시피 ‘미키마우스’는 남자다. 엄연히 ‘미니’라는 여친이 있다. 그런데도 이 여자선수는 그게 좋단다. 그렇게 중성적일까? 알고 보니 고교(가평종고) 시절 남자들도 건드리지 못하는 ‘짱’이었다고 한다. 완력뿐 아니라 과묵한 성격의 은근한 카리스마가 대단했기 때문이란다. 지난 6월 23일(한국시간) 웨그먼스LPGA챔피언십에서 우승, 한국 여자골프의 새로운 기대주로 떠오른 지은희(22). 알수록 흥미로운 그의 짧은 골프인생을 들여다봤다.
“제가 운동을 했잖아요. 그러니까 말 많고, 예절에 어긋나고 이런 거 절대 못 참아요. 운동보다 사람이 먼저죠. 우리 (지)은희는 골프를 떠나 정말 성격이 좋아요. 싫어하는 사람이 없어요.”
여자프로대회로는 세계 최고 권위인 US오픈이 열리는 주간인 까닭에 지은희의 부친 지영기 감독(53)과의 통화는 어렵게 이뤄졌다. ‘감독’이라는 특별한 호칭이 붙는 이유는 그가 전 국가대표 수상스키 감독이기 때문이다. 골프계에서 ‘지 감독님’으로 통하는 지 씨는 우승 비결을 묻는 질문에 딸의 골프실력 대신 인성을 먼저 언급했다.
“골프는 마인드컨트롤이 중요한 운동이잖아요. 은희는 그런 점에서 참 장점이 많아요. 프로 초창기 국내 최고 수준의 샷 실력을 갖고도 지독하리만큼 우승 운이 없었어요. 하지만 한 번도 남의 탓을 하거나, 인상을 쓰지 않았어요. 예컨대 제가 캐디를 많이 봤는데 아빠랑 함께 라운드를 하면 오히려 심적 부담감에 실수가 많아지곤 했죠. 그런데도 은희는 아빠가 실망할까봐 그런 얘기를 단 한 번도 꺼낸 적이 없어요. 제 스스로 그냥 캐디를 관뒀죠.”
맞다. 지은희는 주니어시절 박희영 최나연 이지영 등과 함께 우승컵을 나눠가졌다. 2002년 한국여자아마추어선수권대회에서 우승할 정도로 이미 기량을 검증받았다. 하지만 돈 없는 ‘가평 촌뜨기’였기 때문일까. 아시안게임 국가대표에서 석연찮은 이유로 탈락하는 등 불이익도 제법 당했다. 그래도 조용했다.
자웅을 겨루었던 박희영 최나연은 아마추어 신분으로 프로대회에서 우승해 ‘가볍게’ 프로관문을 뚫었지만 지은희는 2부투어를 거치는 역경을 거쳤다. 1부투어에서도 종종 우승을 노크할 정도로 좋은 성적을 냈지만 이상하리만큼 우승 운이 따르지 않았다. 여기에 실제로 뜯어보면 빠지지 않는 외모지만 워낙 선머슴처럼 하고 다닌 까닭에 중성적인 이미지가 강했다. 그래서인지 박희영 최나연 이지영이 우승컵을 들어 올릴 때 전혀 언론의 주목을 받지 못했다.
지영기 감독은 “이 놈의 골프계가 참 말이 많잖아요. 그렇게 따지면 은희가 억울한 건 책으로 한 권이에요. 하지만 정말 묵묵히 골프만 쳤어요. 예전에 절친했던 라이벌 선수의 골프채가 캐디의 실수로 은희의 캐디백에 잘못 놓였다가 벌타를 받은 사건 있잖아요. 그때도 은희는 말을 아꼈어요”라고 설명했다.
이 대목에서 ‘지은희 골프장’을 언급할 필요가 있다. 원체 부녀가 남 신세를 지는 것을 싫어하기 때문에 지 감독은 지은희가 본격적인 아마추어 선수로 활약하기 시작할 때 아예 남이섬 근처 남의 밭을 빌렸다. 그리고 직접 골프연습장을 차렸다. 농경지를 바라보며 샷을 하는 독특한 ‘지은희 골프장’에는 요즘 우승축하 손님들로 때 아닌 문전성시를 이루고 있다.
지은희는 최근 미LPGA 코리언 낭자부대 사이에서 인기가 높다. 최고참인 정일미는 “함께 라운드를 도는데 어린 선수가 참 됐더라고요. 말도 별로 없으면서 선배 얘기를 정말 잘 들어줘요. 특히 저한테는 어렸을 때 따라다니면서 플레이를 보며 동경했다라고 하더군요. 요즘 어린 선수들, 조금만 볼을 잘 치면 건방진 경우가 참 많은데 은희는 좀 달라요”라고 칭찬을 아끼지 않았다.
지은희는 지난해 국내에서 2주 연속 우승 등으로 우승 갈증을 한 번에 풀었고, 조건부 출전자임에도 불구하고 미LPGA에서 브리티시여자오픈 공동 5위, 하나은행-코오롱챔피언십 준우승 등으로 올시즌 풀시드를 따냈다.
지은희는 “아직도 꿈인지 생시인지 모르겠어요. 생각지도 않았는데 우승이 선뜻 다가와서 너무 좋아요. 이제 시작이라고 생각하고 더 열심히 해야죠”라고 우승 소감을 밝혔다. 거구의 수잔 페테르손을 꺾은 한국의 ‘성격 좋은 미키마우스’. 그 속에는 단순한 1승 이상의 많은 미래형 의미가 담겨 있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