차기 전대 개입 논란 차단…친노 아킬레스건 극복할지는 미지수
문재인 전 대표가 19대 마지막 본회의에서 동료 의원들과 인사를 나누고 있다.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문 전 대표는 이르면 7월 중, 늦어도 8월에 해외로 나가 체류하는 방안을 검토 중이다. 이른바 ‘여의도와 거리 두기’다. 정확한 시기와 대상 국가 등은 미정이다. 현재로선 미국과 중국, 일본이 유력한 것으로 알려졌다. 단순한 체류가 아닌 영원한 혈맹인 미국과 한반도 정세와 직결한 중국, 일본에서 의미 있는 외교적 성과를 꾀하려는 행보로 분석된다. 또한 ‘8월 말∼9월 초’로 예정된 더민주 차기 당권 구도에 친문(친문재인) 개입 논란을 차단하려는 의도로도 받아들여지고 있다.
이처럼 문 전 대표의 해외 체류는 차기 대권 구도를 위한 다중 포석 성격이 짙다. 문 전 대표 승부수가 성공할지는 미지수다. 경우에 따라 미국의 1992년 대선처럼 ‘정치에서는 이기고 선거에서는 패배’하는 역설적 상황을 맞을 수도 있다. 당시 정치 분석가들은 “정치에서는 부시가 이기고 선거에서는 클린턴이 이겼다”고 평가했다. 문 전 대표 앞에 ‘부시의 길이냐, 클린턴의 길이냐’가 놓인 셈이다.
통상적으로 정치인의 외국행은 함의를 담고 있다. 먼저 여의도와 거리 두기는 ‘구원 등판’을 위한 판 깔기다. 1992년 제14대 대선에서 패배한 DJ(김대중 전 대통령)는 1993년 1월 영국으로 출국, 옥스퍼드 대학에서 연설 정치에 나섰다. DJ는 당시 6개월 만에 귀국해 아시아태평양평화재단(아태평화재단) 이사장으로 활동하다가 1995년 제1회 전국동시지방선거에서 조순 민주당 서울시장 후보를 지원, 대세론을 이어가던 박찬종 무소속 후보를 격침하는 데 일조했다.
1996년 제15대 총선을 앞둔 DJ는 ‘지역등권론’을 앞세워 정계복귀를 공식 선언했다. 40년간 지속된 영남의 패권주의에 맞서 ‘모든 지역은 평등하게 권리를 가질 수 있다’는 선언이 지역등권론이다. 호남을 맹주로 자리 잡은 그는 1997년 제15대 대선에서 DJP(김대중·김종필) 연합을 통해 첫 수평적 정권교체의 주인공이 됐다.
DJ의 유학은 종국적으로 볼트와 너트의 관계처럼 시너지효과를 냈다. 호남의 맹주였던 DJ가 유학길에 오른 뒤 야권 안팎에서 제기된 호남 등권론을 전면에 내걸고 구원 등판한 것이다. DJ라는 강력한 리더십과 지역적 기반이 구원 등판으로 이어졌다는 분석도 있다.
2012년 제18대 대선 당시 민주통합당 경선에서 참패한 손학규 전 상임고문도 이듬해 1월 15일 독일로 떠났다. 그 후 손 전 고문은 2014년 정계은퇴를 선언하고 강진에 칩거해 왔다. 다만 손 전 고문은 이른바 ‘새판 짜기’를 언급하며 1년 반 정도 남은 대선판의 최대 이슈메이커로 등극했다. 손 전 고문은 2013년 출국 당시 독일의 연립정부 체제에 대한 당위성을 주장하며 연정론을 꺼냈다. 2013년 7월 16일 자신의 싱크탱크인 ‘동아시아미래재단’ 회원들에게 보낸 이메일에서 “독일의 정치적 안정은 연립정부 체제 때문”이라고 밝히기도 했다. 지난 4·13 총선이 여소야대로 귀결되면서 현 정치권의 최대 화두는 ‘협치’ ‘연정’ 등 체제 변화다.
이제 정치권 안팎의 눈은 문 전 대표에게 쏠린다. ‘문재인 한계론’에도 불구하고 그는 차기 대권에 가장 근접한 주자다. 대중적 지지율도 당내 세력구도도 ‘문재인 파워’를 뒷받침한다. 그러나 지난 대선 때의 ‘박근혜 대세론’과 같은 슈퍼 파워는 없다. 2% 부족하다. 정치적 상황도 좋지 않다. 안철수 국민의당 상임 공동대표의 호남 내 위력은 여전하다. 같은 당 박지원 원내대표조차 차기 대선에 나설 수 있다고 공언했다.
더민주 내부에선 박원순 서울시장과 안희정 충남도지사가 사실상 대권 도전 의지를 피력했다. 새누리당은 지도 체제 변경을 검토하며 강력한 리더십 구축에 나섰다. 여권 후보로 분류되는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도 5월 25일 제주 롯데호텔에서 열린 관훈포럼 간담회에서 “한국 시민으로 어떤 일을 할지 임기 종료 후 결심하겠다”며 대선 출마를 시사했다. 20대 국회 개원과 동시에 문 전 대표가 여의도에서 증발되자 차기 대권을 둘러싼 정계개편이 봇물 터지듯 나오는 모양새다.
이런 상황에서 문 전 대표는 외국행을 만지작거리고 있다. 문제는 문 전 대표의 ‘야인 행보’와 ‘친노(친노무현) 딜레마’의 상쇄 효과 여부다. 문 전 대표 외국행이 현실화된다면 직접적인 차기 전대 개입 논란을 차단할 수는 있다. 또한 G2(미국·중국)를 비롯해 ‘잃어버린 20년’에 처한 일본 등에서 저성장에 빠진 한국 경제의 대안 모색과 평화통일 방안 등을 구상할 수 있다.
하지만 딱 거기까지다. 친노가 가진 아킬레스건을 극복할지는 여전히 알 수 없다. ‘친노의 폐쇄성’이 대표적이다. 그간 정치적 국면마다 친노의 비선 실세 논란이 끊이지 않았다. 이른바 ‘삼철’(전해철 더민주 의원·양정철 전 청와대 홍보기획비서관·이호철 전 청와대 민정수석)로 불리는 비선 그룹은 외연 확장의 최대 걸림돌이라는 지적이 적지 않았다.
특히 문 전 대표 측이 지난 2015년 2·8 전대 당시 차기 대선 경선에서 반기문 유엔 사무총장에게 패할 것을 우려, 영입을 막았다는 주장까지 제기됐다. 박지원 국민의당 원내대표는 반 총장이 방한 중이던 5월 25일 TV조선 <이것이 정치다>에 출연해 “당시 문 전 대표 측 인사가 ‘만일 박지원이 당 대표가 되면, 정치 9단이기 때문에 반 총장을 데려다가 (대선) 경선을 시킬 텐데 그러면 자기들이 위험하다’는 얘기를 했다”고 주장했다.
박 원내대표의 ‘당권·대권’ 분리를 반대한 문 전 대표 측이 반 총장보다 열세인 경쟁력을 우려해 차기 대선 주자급의 영입을 꺼렸다고 해석할 수 있는 대목이다. 범야권 내 가장 강력한 지지층을 보유한 문 전 대표가 고립되는 역설에 처하는 결과를 초래하는 셈이다. ‘배제의 정치’를 탈피하지 않은 문 전 대표가 해외 체류를 통해 시대정신을 구현한다고 한들, 외연 확장을 꾀할 수는 없다는 얘기다. 이에 대해 더민주 범주류 한 관계자는 “전형적인 친노 프레임”이라면서 “친노가 없으면 어찌할 뻔했느냐”라고 반박했다. 반면, 국민의당 관계자는 “문 전 대표 측의 패권주의는 누구나 다 아는 사실”이라고 꼬집었다.
이뿐만이 아니다. 문 전 대표는 2015년 2·8 전대 당시 밝힌 세 번째 고비 중에서 두 번째와 세 번째를 넘지 못했다. 당 혁신도 무력화됐고, 계파의 ‘ㄱ’ 자도 나오지 않겠다고 약속했지만 문 전 대표는 당 수장 시절 내내 ‘친노 프레임’ 덫에 빠졌다. 20대 총선에서는 더민주가 제1당으로 올라섰지만 막판 문 전 대표가 지원했던 호남에서는 광주 0석을 비롯해 28석 중에서 25석을 국민의당에 내줬다.
문 전 대표의 리더십과 전략 부재 등도 여전히 아킬레스건으로 남아있다. 전계완 정치평론가는 문 전 대표의 해외 체류에 대해 “대선 플랜을 가동한 것치고는 좋은 선택은 아니다”라며 “집권 이후 플랜 등을 위해 외국행을 선택할 수는 있겠지만, 본인이 풀어야 할 과제가 산적한 상황이다. 민심에 대한 화답은커녕 회피한다고 비판해도 별다른 말을 못할 것”이라고 말했다.
차기 대선 플랜을 위한 정책 입안 등은 선거 결과와 정비례 관계는 아니다. 미국의 1992년 대선에서 아칸소 주지사였던 빌 클린턴은 선거 초반 어려움을 겪었다. 걸프전 승리로 기세를 올린 부시는 정국 이슈를 주도했지만, 딕 모리슨의 지원을 받은 클린턴이 ‘바보야, 문제는 경제야’라는 슬로건을 내걸면서 판을 뒤집었다. 경제민주화를 비롯해 기업 구조조정, 평화통일 방안 등의 일반적인 정치 행위와 선거 승리 사이에는 적지 않은 갭이 존재한다는 얘기다. 문 전 대표가 이 딜레마를 풀지 못한다면, ‘한국의 부시’가 될 수도 있다. ‘대선을 위한 승부수냐, 위험한 도박이냐’, 그것이 문제다. 키는 문 전 대표가 쥐고 있다.
윤지상 언론인