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여성 공포 이해해라” vs “죄책감 강요 말아라”
강남역 추모집회 채널A 방송 화면 캡처.
[일요신문] 여성들이 폭발했다. 남성들은 반발했다. 추모 집회가 진행 중이던 강남역 10번 출구는 “여성들의 공포를 이해하라”는 여성 진영과 “모든 남성을 잠재적 범죄자 취급하며 죄책감을 강요하지 마라”는 남성 진영으로 나눠졌다. 지난 17일 발생한 ‘강남역 묻지마 살인사건’이 그 도화선이었다. 그 시작은 묻지마 살인사건 희생자에 대한 추모였다. 그렇지만 점차 추모 집회는 수년 전부터 온라인과 SNS를 통해 불거지기 시작한 남혐와 여혐의 대결구도로 변모해 가고 있다.
평소에 여성으로부터 무시를 받아 왔다고 주장한 조현병 환자 김 아무개 씨(34)가 일면식도 없는 20대 여성을 흉기로 수차례 찔러 숨지게 한 이번 사건에 대해 여성들은 “사회에 팽배한 여혐 정서가 가장 극단적인 형태로 나타난 사건”이라고 주장했다. 이에 남성들은 “정신병자의 개인적 범행일 뿐 여혐과는 관계없다”고 반박에 나섰다. 이들의 서로 상반되는 주장은 지난 5월 19일부터 22일까지 강남역 10번 출구에서 진행된 추모행사에서 더욱 팽팽하게 맞섰다. 행사를 주관한 것은 SNS를 통해 모인 일반 여성들이었으나, 참여한 여성들 중 인터넷 커뮤니티 ‘워마드(Womad)’와 ‘여성시대’의 회원들이 다수 있었다는 사실때문에 해당 커뮤니티의 운영진이 행사를 주관했다는 소문이 퍼지기도 했다. 그리고 이들에 맞서기 위해 나선 남성 진영 가운데 가장 선두에 섰던 커뮤니티는 ‘일간베스트(일베)’였다.
추모행사에 참여한 ‘워마드’와 ‘여성시대’는 여성들만이 가입할 수 있는 인터넷 커뮤니티다. 워마드는 2014년 웹사이트 ‘디시인사이드’의 ‘메르스 갤러리’에서 출발한 반(反) 여혐 커뮤니티 ‘메갈리아’가 그 전신이다. 지난해 말 메갈리아가 성소수자 문제로 분열되면서 이 가운데 극렬한 반 여혐이자 ‘남혐’ 성향의 회원들이 새로운 커뮤니티인 워마드를 만들었다. 워마드란 여성을 뜻하는 영어단어 우먼(Woman)과 유목민을 뜻하는 노마드(Nomad)가 합쳐진 말로 현대 사회 전반에서 주도적인 역할을 하는 진취적인 여성을 가리킨다. 이들과 추모 집회를 함께 한 ‘여성시대’는 다음 인터넷 카페로 반 여혐 정서를 함께 하고 있다.
포스트잇 메시지를 통해 추모한 이들은 “살女(려)주세요. 살아男(남)았다”라는 문구로 여성이라서 살해당한 피해자를 추모하고 자신들 역시 여성이라는 이유로 피해자가 될 수 있었다는 점에 주목했다. 다소 자극적이었던 “(남자라서) 살아男았다”라는 문구는 사건 현장인 화장실을 들렀던 6명의 남성들은 그대로 보낸 뒤 단 한 명이었던 여성 이용자만을 살해한 피의자 김 씨의 행동에 대한 메시지이기도 하다.
이에 평소 메갈리아의 반 여혐 혹은 남혐 사상을 비난해왔던 일베가 나섰다. 극보수사이트를 표방하는 일베는 이용자들이 수만 명에 이르는 대형 커뮤니티였지만 그런 위상치고는 일베 이용자라는 사실을 외부에서 쉬쉬해야 할 정도로 대외적인 이미지가 좋지 않았다. 그러나 이번 사태를 계기로 디시인사이드, 오늘의 유머, 다음 카페 ‘이종격투기’ 등 남성 위주의 커뮤니티가 일베를 두둔하며 한 목소리를 내기 시작했다. 이들은 목소리를 모아 “모든 남성에게 책임과 죄책감을 전가해 추모의 현장을 ‘남혐’으로 퇴색시키지 말라”고 외쳤다. 이들의 태도 변화에는 ‘핑크 코끼리’가 한몫했다.
지난 5월 20일 강남역 추모집회에 참석했다가 폭행을 당했다고 주장하는 ‘핑크 코끼리’의 유튜브 영상 화면 캡처.
일베의 한 이용자는 지난 5월 20일 분홍색 코끼리 인형탈을 쓴 채 “육식동물이 나쁜 게 아니라 범죄를 저지르는 동물이 나쁜 겁니다. 선입견 없는 편견 없는 주토피아 대한민국. 현재 세계 치안 1위이지만 더 안전한 대한민국 남, 여 함께 만들어요”라고 적힌 화이트보드를 들고 추모 현장에 나타났다. 그러자 추모를 위해 모인 인파들이 순식간에 핑크 코끼리를 에워쌌다. 사람들은 핑크 코끼리에게 “왜 이곳에 그런 팻말을 들고 왔느냐” “당당하면 탈을 벗고 이야기하라”라며 탈을 잡아당기고 ‘이 사람은 일베 이용자’라는 포스트잇을 붙였다. 핑크 코끼리에게 돌려차기를 날린 남성도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강남역 핑크 코끼리 사건’으로 이름 붙여진 이 사건의 영상이 동영상 사이트 유튜브를 통해 전파되면서 온라인상에서 남혐과 여혐 전쟁은 격화됐다. 여성 네티즌들은 “여성이라는 이유만으로 살해당한 피해자의 추모 현장에서 대한민국 치안이 세계 1위라며 남녀 갈등을 멈추라는 것은 불 난 집에 기름을 붓는 짓”이라고 비난했고, 남성 네티즌들은 “핑크 코끼리가 한 말이 틀린 것이 없는데 일베 이용자라는 이유만으로 폭행한 것은 당연히 비난받을 일”이라며 맞붙었다. 특히 일부 남성 위주 커뮤니티에서는 폭행을 주도한 것이 ‘워마드’와 ‘메갈리아’ 등 여성 커뮤니티이며 실제로 영상에 찍히지 않은 집단 폭행을 이들이 주도했다는 주장이 제기되기도 했다. ‘핑크 코끼리’ 김 아무개 씨(31)는 사건 당일 자신에게 포스트잇을 붙인 여성, 자신을 피해자의 남자친구라고 주장한 남성과 돌려차기를 가한 남성 등 4명을 지난 5월 21일 경찰에 고소했다. 일베, 디씨인사이드 등 남성 커뮤니티에서는 김 씨를 위해 자발적으로 소송비용 등을 모금해 준 것으로도 알려졌다.
이처럼 인터넷 커뮤니티 간 남녀 갈등이 깊어지면서 여성들 역시 상대 진영의 ‘신상 털기’와 ‘몰카’로 인한 모욕 발언 등에 피해를 입기도 했다. 특히 집회를 주관한 것으로 알려진 김 아무개 씨(여·26)는 ‘워마드’의 운영자라는 허위 소문에 휘말려 극심한 성적 모욕 발언에 시달렸다. 심지어 ‘살해협박’ 메시지까지 받아 정신적 고통을 호소하고 있는 것으로 전해졌다. 한국여성민우회는 이번 집회에 참여한 여성 추모객 중 온라인에서 신상 털기, 외모 및 성적 비하 등으로 피해를 입은 여성들의 피해사례를 제보 받아 집단 소송도 제기할 방침을 밝힌 바 있다.
한편 이 같은 현상이 ‘더 이상 침묵하지 않는 한국 여성’의 모습을 보여준다는 시각도 존재했다. ‘강남역 추모 집회’를 직접 방문했던 LA타임스 한국 주재 기자 스티븐 보로윅(Steven Borowiec)은 이번 사태에 대해 “이제까지 젊은 한국 여성들은 간섭과 피해를 우려해 공개적으로 목소리를 내는 일이 적었지만 지금부터는 더 이상 침묵하지 않겠다는 것을 보여준 것”이라고 말했다. 이어 “‘강남역 살인사건’으로 논의되고 있는 ‘여성혐오’와 ‘성평등’은 한국에서 주로 다뤄지는 이슈가 아니었다”라고 지적하며 “비록 충돌과 갈등은 있었지만 젊은 사람들이 직접 중요한 사회 문제에 관여하고 공개적으로 논의한다는 것은 양극화가 심한 한국사회에서 하나의 긍정적인 변화라고 생각한다”고 말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