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필드에서 살아도 골프와는 안 친해’
▲ 1998년 박세리의 미국 진출과 함께 ‘원조 매니저’의 역할을 했던 길성용 씨(왼쪽). | ||
# 열명도 안되는 희귀직종
현재 미LPGA에서 한국선수들을 돕고 있는 매니저들은 열 명이 채 안 된다. 별도로 공식집계를 할 수 있는 방법이 없고, 워낙 선수가 개인적으로 필요에 따라 그때그때 매니저를 쓰는 탓에 정확한 집계가 어렵다. 또 현재 시즌이 끝난 상태로 매니저들도 재계약 시기를 맞은 까닭에 ‘꼭 집어서’ 몇 명이라고 하기가 힘든 것이다. 최고참인 송영군 씨(38·정일미 매니저)에 따르며 ‘8’명 정도인 것으로 추산된다.
미LPGA의 한국선수 매니저는 크게 두 가지 타입으로 구분할 수 있다. 즉 개인적으로 선수와 계약한 경우와, 선수의 소속사를 통해 선수와 인연을 맺은 경우다. 이에 따라 급여를 받는 방식도 다르다. 전자의 경우 전적으로 선수 개인 돈으로 연봉을 받는 반면 후자는 일종의 ‘계약직’으로 소속사로부터 월급을 받는다. 드물기는 하지만 일부는 캐디처럼 성적에 따른 인센티브를 추가로 챙기기도 한다. 박세리가 미LPGA 한국선수의 시초이듯 98년 원조 한국 매니저가 된 길성용 씨(스티브 길)는 당시 박세리의 소속사였던 삼성과 계약을 했다.
모든 선수가 매니저를 필요로 하는 것은 아니다. 투어 경력이 오래돼 미국 현지 사정을 잘 알거나 혹은 가족이 함께 투어 생활을 하는 경우는 미국 생활을 돕는 ‘로드매니저’가 그다지 필요치 않다. 즉, 투어 1~3년의 신인으로 영어에 서툴고, 현지 사정을 잘 모르는 경우에 주로 매니저의 도움을 받는다. 여기에 정일미처럼 미국 현지에서 생활을 함께 할 가족이나 친지가 없는 경우도 특별하게 매니저가 필요하다. 미LPGA 투어는 혼자 다니기에는 이동이 너무 많고, 또 더없이 외롭기 때문이다.
고참선수들을 보면 박세리의 경우 언니 유리 씨가 동행하는 경우가 많고, 김영과 김미현은 오빠 내외, 강수연은 남동생이 주로 투어 생활을 함께한다. 박세리는 세마스포츠의 이성환 이사가 공식 매니저지만 1년에 1~2회 미국을 방문할 뿐 개인 로드매니저는 두고 있지 않다. 신인급 선수들은 대부분 부모 중 한 명이 투어 생활을 함께 하는 경우가 많다.
▲ 정일미 매니저 송영군 | ||
얼마 전 시즌을 끝내고 귀국한 전수영 매니저(27)는 지난해부터 박희영(21)과 함께 미국생활을 하고 있다. 미국진출 전인 지난해 몇몇 초청대회와 또 퀄리파잉스쿨 등을 함께 치렀고, 루키시즌인 올해 투어 일정 전체를 소화했으니 경력이 만 2년인 셈이다.
전 씨는 선수와 직접 계약한 경우다. 보수는 연 4만 달러 정도(한화 6000만 원 상당). LPGA 한국 매니저들의 평균에 해당한다. 1년 내내 집을 떠나 선수와 함께 고된 투어 생활을 하는 남다른 ‘근무환경’을 고려하면 많다고 할 수도 없지만, 항공료와 숙식 등 일체의 경비를 지원받는다는 것을 감안하면 결코 적지 않은 액수다. 투어 일정을 따라 매주 이동을 하는 바쁜 생활로 개인적으로 돈을 쓸 일이 거의 없기에 1년치 급여를 고스란히 모을 수 있는 것이다. 전 씨는 “20대의 나이에 쉽게 벌 수 있는 급여가 아니다. 좋은 대우로 급여에 대해서는 불만이 없다”고 말했다.
정일미와 함께 만 5년 동안 미LPGA투어를 누빈 송영군 씨도 “워낙에 모든 일이 선수 한 명에게 맞춰져 있는 까닭에 신경이 많이 쓰인다. 선수를 위해 최선을 다한다는 마음가짐이 우선이지 돈은 중요하지 않다. 어느 선수의 매니저건 간에 열심히 하고, 또 선수가 성공하면 합당한 보수를 받을 수 있다”고 설명했다. 송 씨의 경우 정일미 외에 2~3명의 선수에게 스케줄 관리나 동계훈련 조율 등으로 도움을 주기 때문에 별도의 추가소득도 있다.
#그들은 짐싸기의 달인
매니저들의 생활은 어떨까. 아주 간단하다. 기본적으로 투어 중에는 선수와 24시간을 함께한다고 보면 된다. 경기는 물론이고, 선수가 훈련을 할 때도 지근 거리에서 모두 지켜본다. 당연히 선수 못지않게 걷는 거리가 많다. 연습라운드와 프로암은 18홀을 전부 따라다니지 않는 경우가 많지만 1~3라운드는 선수를 따라 모든 홀을 돈다.
전수영 씨는 “처음 매니저 제의를 받을 때 박희영 프로의 아버님으로부터 ‘이 직업에서 가장 나쁜 게 종아리가 굵어진다는 것이다. 괜찮겠냐?’는 질문을 받았다. 그래서 ‘어차피 종아리는 굵고 또 좋은 운동을 한다고 생각한다’고 답했다. 어쨌든 엄청나게 걷는 것은 맞다. 하지만 경기 내용에 따라 선수와 함께 울고 웃고를 반복하다 보면 지루한 줄은 모른다”고 설명했다.
매니저는 ‘개인 갤러리’ 노릇은 기본이고, 항공예약과 미LPGA사무국과의 업무협조 등 각종 행정 처리도 도맡는다. 외국인 캐디 관리는 물론이고, 영어실력이 좋지 않은 선수에게는 자연스레 영어까지 가르치게 된다. 여기에 호텔에서의 간단한 한국식 식사와 빨래 등 잡일도 제법 많다.
그렇다면 가장 힘든 작업은 무엇일까. 2008시즌 10개월 동안 3년차 한국선수와 함께 생활한 여성매니저 A 씨는 “워낙 이동이 많다 보니 짐을 싸고 푸는 것이 너무 힘들다”고 토로했다. 투어 선수는 일단 짐이 많다. 골프채는 기본이고, 필수품이 돼 버린 노트북과 의류 등 각종 생활용품을 합치면 큰 여행용 가방 두 개로도 모자라는 경우가 많다. 매니저 짐까지 합치면 더욱 그렇다. A 씨는 “자주 하다 보니 아주 이골이 났다. 보통사람들보다 훨씬 빨리, 그리고 수월하게 짐을 풀고, 다시 싸고 하지만 그래도 힘든 것은 어쩔 수 없다. 아마 시집 가면 이삿짐 싸는 것은 아주 잘할 것”이라고 답했다.
▲ 박희영과 매니저 전수영 씨(오른쪽). | ||
A 씨는 지난 11월 초 시즌을 마치고 귀국하면서 해고 통보를 받았다. 스스로 이 일을 오래하고 싶지는 않았지만 타의에 의해서 일을 관두게 되니 기분이 아주 좋지 않았다. 마음 같아서는 그동안 서운했던 점을 언론이나, 아니면 골프계 주변에 속 시원하게 털어놓고 싶지만 그럴 엄두가 나지 않는다. 기본적으로 밉든 곱든 선수와 정이 들었고, 또 자신으로 인해 말썽이 야기되기를 원치 않는 것이다. 다시 이 업계, 즉 다른 선수의 매니저를 맡을 생각이 없는 A 씨가 이럴 정도이니 현역 매니저들은 자기 선수에 대한 안 좋은 얘기를 거의 입에 올릴 수 없는 것이 현실이다.
그런 까닭에 대부분 매니저들은 스트레스가 심하다. 일의 성격상 선수와 부모, 선수와 협회, 또 스폰서까지 문제가 생기면 무조건 중간에서 양쪽에게 설명을 하고, 원만한 해결을 이끌어내야 하는 경우가 많다. 기본적으로 부모들은 자기 딸이 무조건 성공할 수 있다고 믿는 경우가 많기에 심심치 않게 크고 작은 갈등이 야기된다. 20대 초반의 어린 선수인 경우 아직 사회생활이나 타인에 대한 배려 등이 부족하기도 해 한층 어렵기도 하다. 육체적인 어려움보다 정신적인 스트레스가 더 힘든 경우가 많다.
얼마전 시즌을 모두 마치고 귀국한 송영군 씨는 전날 늦게까지 사람들을 만나느라 잠이 부족해도 다음날 새벽이면 번쩍 눈을 뜬다고 한다. 송 씨는 “일종의 직업병이다. 매니저가 선수보다 게을러서는 절대 안 된다. 아무리 피곤해도 선수의 오전운동에 지장을 줄 수는 없는 것이다. 예전에 한 젊은 매니저는 골프장에서 시도때도 없이 졸아서 눈총을 받은 적도 있다. 매니저는 무조건 성실해야 한다. 모든 생활 자체가 긴장의 연속이다”라고 말했다.
매니저 생활의 희비는 선수의 성적과 같은 사이클을 그린다. 성적이 나쁘면 선수는 몸도 더 피곤하고, 정신적으로도 힘들어한다. 매니저도 마찬가지만 어떻게 해서든 기분을 풀어줘야 한다. 선수의 성격에 따라 말로 위로하기도 하고, 또 어쩔 때는 묵묵히 옆에서 자리를 지키는 것이 효과적일 때도 있다. 거꾸로 성적이 좋을 때면 그렇게 신이 날 수가 없다. 그렇기 때문에 경기를 관전하는 마음이 조마조마하기만 하다.
전수영 씨는 “솔직히 매니저라는 게 원래 한 사람을 위한 직업이지 않은가. 스트레스가 심하고, 일이 힘들어도 선수로부터 그저 ‘언니, 고마워요’라는 한 마디만 들으면 그렇게 기분이 좋을 수 없다”고 말했다. 송 씨도 “기본적으로 성적이 중요하지만 그래도 선수가 정말 나를 필요로 하고, 내가 선수에게 진정 도움이 됐다고 느껴질 때가 가장 기분이 좋다”고 말했다.
매니저 대부분은 매일 골프장에 살아도 골프를 칠 줄 모르는 경우가 많다. 직업적으로 골프에 대한 지식은 박식해도, 스스로 골프를 즐길 만한 여건이 도저히 안 되기 때문이다. 미LPGA에는 워낙 코리언 패밀리가 많기 때문에 말 하나, 행동 하나 잘못하면 매니저 자신은 물론이고 선수에게 크게 누가 되는 경우도 많다. 그래서 다른 한국선수, 특히 선배나 아니면 어머니, 아버지들에게는 한층 깍듯이 해야 한다. 그렇기 때문에 매니저가 평소에 골프를 치는 일은 상상하기도 힘들다. 가장 골프와 가까우면서도 골프는 칠 줄 모르는 ‘특수직업’인 것이다.
유병철 스포츠전문위원 ein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