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 PK권 최병렬 의원과 민주계 서청원 대표 등 한나라당 내 중진들이 개혁파 득세에 맞서 보수 대결집의 시동을 걸고 있다. 이종현 기자 | ||
최근 한나라당의 한 영남권 중진 의원실에서 흘러나온 말이다. ‘마주치기도 싫다’는 대상은 소위 ‘개혁파’로 분류되는 한나라당의 젊은 의원들. 매스컴만 본다면 최근 한나라당엔 젊은 개혁파 의원들밖에 없다는 인상마저 든다.
당내 젊은 초재선 의원들 모임 ‘미래연대’를 중심으로 대선 패배의 책임과 당내 구 정치문화 청산을 부르짖는 개혁파의 목소리가 한나라당을 온통 뒤덮은 까닭이다. 그리고 현 지도부의 전당대회 불출마 선언 역시 개혁파의 발걸음에 힘을 실어주는 형국이다.
그런데 최근 ‘미래연대’를 주축으로 한 개혁파 의원들의 득세를 무섭게 흘겨보는 당내 인사들이 늘고 있다는 지적이 나온다. 이번 대선이 ‘보수 대 진보’의 격돌이었다는 평을 듣는 것처럼 민주당이 진보적 색채를 띤다면 한나라당의 대표 정체성은 ‘보수’라는 것이 중론이다.
다소 이례적일 수도 있는 한나라당 내 개혁파 의원들의 득세는 그에 대한 반발로 당내 여러 보수세력들의 규합을 가져올 수 있다는 평이 나온다. 소수 개혁파에 대한 한나라당 내 보수세력의 대결집 그리고 대반격의 물결이 거세질 것이란 지적이다.
정가에선 최근 한나라당에서 제기되는 굵직한 사안들이 당내 보수파 대반격의 신호탄일 것으로 보고 있다. 내각제 개헌 주장과 북핵 문제 적극 대처가 그것. 얼마전 한나라당 이규택 원내총무는 ‘내각제 개헌’이란 화두를 들고 나왔다. 원내총무라는 당직 때문에 이규택 총무가 내각제에 대한 검토 여부를 대외적으로 발언했지만 실제로 당내에서 내각제에 대한 의견을 제시한 것은 대구•경북(TK) 출신 중진 의원들이었다.
대선 패배의 후유증 그리고 정권교체를 예감하다가 5년을 다시 기다려야 한다는 중압감 탓인지 당내에선 내각제 논의가 광범위하게 확대되는 분위기다. 민주당의 한 관계자는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의 쇄신 논의가 활발해져서 당내 보수세력의 입지가 약해지면 노 당선자의 국정운영에 대한 잠재적 장애물의 높이가 얕아지는 것”이라 평했다.
이 관계자는 “그러나 정치경험이 많은 한나라당의 주류인 보수세력이 그런 것을 좌시하겠는가”라며 “내각제 개헌 논의는 개혁파 목소리를 약화시키고자하는 더 큰 이슈 생산이 주된 목적일 것”이라 밝혔다. 북핵 문제에 대한 논의도 뜨거워질 전망이다. 당내 북핵문제특위 위원장 최병렬 의원이 적극적으로 대처할 것을 시사하고 있다.
▲ 5일 한나라당 개혁파 의원들이 ‘국민속으로’라는 당 개혁 모임을 만들고 ‘세력화’를 천명했다. 임준선 기자 | ||
얼마 전까지 최고위원직을 수행하던 한 영남권 의원실 관계자는 “전쟁 위험이 코앞에 도사리는데 한가롭게 당내에서 늙은이들 물러가라고 이야기할 때인가”라며 “당장은 원내 제1당인 한나라당이 정책적 규합을 해야할 시점이며 북한 문제만큼은 경험 많은 보수 중진들이 나서야 할 것”이라 역설한다.
이 같은 정서는 그동안 당내에서 수적으로나 영향력 측면에서 제일 큰 힘을 보여왔던 PK권 중진 인사들 사이에 특히 확산된 것으로 알려진다. 북핵문제는 개혁 중시 분위기에서 소외된 PK권 보수 중진 인사들이 제 목소리를 낼 수 있는 구실인 셈이다.
얼마전 한나라당 내 개혁파 의원들 10명은 ‘국민속으로’라는 당 개혁모임을 만들었다. 이들은 당 개혁 추진을 위해 ‘독자세력화’와 ‘세 확산’을 천명했다. 대선 패배 책임론과 낡은 정치 청산이라는 명분은 그럴듯하지만 수적으로 열세에 놓인 개혁파 의원들이 세확산을 위해 양팔을 걷어붙인 것이다.
한나라당 한 중진 의원측은 “개혁과 진보를 외치려면 민주당에 들어가서 국회의원이 될 것이지 왜 한나라당에 들어왔나”라며 개혁파 의원들을 비난한다. 이 의원측은 “어차피 야당하려면 과반수 넘을 필요없다”고까지 주장한다.
“지난 12월19일 개표 당일날 당사 상황실에 파견 나온 개혁파 의원측 보좌관들이 ‘노무현이 당선되어도 앞으로는 양당간 정책 차이가 별로 없을 것이기 때문에 별 상관없다’라며 노닥거리는 장면까지 봤다”고 덧붙인다.
이 같은 정서는 결국 보수파 인사들 사이에 “절을 고치려 하지말고 뜻이 안맞는 중들이 나가라”는 식의 의견을 확산시키고 있다. 개혁파들에 대한 비판 정서와 개혁요구를 희석시키는 더 큰 정치적 이슈 생산을 통해 보수파의 결집을 모색하려는 것이다.
북핵문제 적극 대처를 주장하는 최병렬 의원 등의 PK 세력과 윤여준 의원 등을 중심으로 한 ‘친이회창’세력, 내각제 논의 불을 지핀 TK 세력, ‘네티즌 회의론’을 주창한 서청원 대표 중심의 민주계 등 여러 보수 정파가 ‘반 개혁파 정서’의 한 목소리를 내는 것에 이목이 집중되는 이유도 여기에 있다.
한나라당 영남권 중진 의원실 관계자는 “현재 구도로 봐서는 3월쯤 치러질 전당대회가 ‘젊은 피’일색일 가능성이 높다”라며 “그러나 남은 두 달 가량 동안 내각제나 북핵문제 같은 이슈들이 확산되면 당 정체성에 맞지도 않는 개혁파들의 목소리가 희석될 가능성이 크다”고 밝혔다.
이 인사는 “전당대회 이전에 다시 보수세력의 목소리가 커질 수 있으며 전당대회 이후에도 당 정체성을 잃고 표류하는 한나라당에 대한 비판에 대한 책임론이 개혁파 의원들을 향해 거세질 것”이라 전망했다. 결국 이번 대선에서 이회창 후보를 택했던 유권자들의 지지는 개혁파가 아닌 보수파를 향해 있다는 자신감 표출인 셈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