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세장 간 코치진 정풍 불면 병풍 노릇
▲ 정몽준 대한축구협회 회장의 국회의원 출마 당시 유세 현장. | ||
‘2008베이징올림픽이 열렸던 해’로 기억될 2008년이 저물어 간다. 올해도 국내 축구계에서 일어난 별의별 일 가운데 네 가지를 골라봤다.
▶▶ 기자회견장의 ‘불청객’들
축구선수를 대상으로 한 ‘축구 인터뷰’에 연예기자가 당당하게 자리를 잡고 축구와 상관없는 질문을 하는 건 한국 외에 다른 나라에서는 찾아보기 힘들다.
지난해 티에리 앙리(FC바르셀로나)가 내한했을 때 한 음악방송 VJ가 기자회견에 나타나 앙리에게 “축구대결을 하자”는 등 횡설수설하면서 추태를 부린 일이 있었는데 올해도 비슷한 사건이 일어났다. 지난 2월 27일 열린 LA 갤럭시 코리아투어 기자회견 때였다. 분명 3월 1일 열릴 LA 갤럭시와 FC 서울 간의 친선경기를 위한 자리였는데 엉뚱한 질문이 꼬리에 꼬리를 물었다. 지상파 연예프로그램 아나운서는 “본인의 매력 포인트가 뭐라고 생각하세요”라고 물었고 패션 관련 케이블 방송에서 나온 PD는 “패션 감각이 남다르다. 옷 입을 때 어떤 부분을 신경 쓰나. 아내에게 조언을 받느냐”라는 질문을 던졌다. 순간 축구 관련 기자회견인 줄 알고 참석했던 데이비드 베컴은 어이없다는 표정을 지었다.
11월 19일 사우디아라비아전을 앞두고 이운재(수원 삼성)가 1년여 만에 태극마크를 달았을 때도 주위의 눈살을 찌푸리게 하는 일이 있었다. 한 케이블 방송은 2명의 리포터를 대표팀이 훈련하는 파주트레이닝센터로 보내 “요즘도 술 먹느냐”는 질문을 던졌다. 회사의 지시를 받고 ‘아주 독한 인터뷰’를 하겠다며 열의를 보이던 리포터들은 인터뷰를 끝내고 돌아가는 이운재에게 ‘파이팅’을 외치고 선물을 주는 등 대표선수들이 땀을 흘리는 훈련장에서 ‘쇼’를 했다.
▲ 변석화(왼쪽), 이용수 | ||
18대 국회의원 선거에 출마했던 대한축구협회 정몽준 회장은 구설에 오를 만한 유세를 벌였다. 서울 동작을 지역구에 출마한 정 회장은 3월 30일 동작구 사당동 거리 유세 현장에 축구협회 이회택 부회장·프로축구 부산 아이파크 황선홍 감독과 공격수 안정환 그리고 프로농구 KCC 허재 감독을 병풍처럼 세웠다. 이에 앞서 축구대표팀 허정무 감독과 울산 현대 김정남 감독을 투입(?)해 ‘정풍(鄭風)’이 불게 했다.
정 회장의 유세 현장에 스포츠스타가 나왔다는 걸 무조건 잘못됐다고 할 수는 없다. 스포츠스타 스스로가 정치적인 신념에 따라 자발적으로 정 회장을 도울 수 있기 때문이다. 다만 정 회장 유세 현장에 나타난 스포츠 스타들이 전부 ‘현대맨’이나 축구협회 인사라는 점이 석연치 않았다. 더욱이 스포츠스타들 중에는 한창 시즌을 치르는 중인 지도자가 있었다. 황선홍 감독은 유세 하루 전 부산에서 K리그 정규시즌 광주전을 지휘했고, 4월 2일에는 제주에 가서 컵 대회 원정경기를 치러야 했다. 허재 감독 역시 팀이 프로농구 4강 플레이오프에 진출해 몹시 바쁜 상태였다.
▶▶ 지도자들의 막말
11월 26일 오후 서울 종로구 신문로 축구회관. 검은색 양복을 입은 경호업체 직원들이 정문 앞에 서있었다. 정문 안에는 뭘 하는지 보지 못하게 만든 병풍이 구렁이처럼 똬리를 틀고 있었다. 병풍 안에서는 사상 첫 경선으로 대학축구연맹회장 선거가 열리고 있었다.
대한축구협회 집행부와 교감을 나누는 변석화 현 회장을 미는 축구인과 허승표 한국축구연구소 이사장을 지지하는 야권인사인 이용수 세종대 교수를 지지하는 축구인의 불협화음은 정기총회 초반부 결산보고부터 불거졌다.
투표가 시작되기 전까지 “저 XX 좀 끌어내지” “밖에 나가서 한판 붙자” “너! 대학 감독 맡은 지 얼마나 됐어” “당신이 왜 내 선배야” 등 시정잡배의 싸움에서나 나올 법한 유치한 막말들이 쏟아졌고 생채기 끝에 변석화 회장이 총 68표(무효표 1장 포함) 가운데 38표를 얻어 29표에 그친 이용수 후보를 제치고 연임에 성공했다.
대학축구연맹 회장 경선에서 떨어진 이용수 교수는 얼마 후 서울중앙지방법원에 “선거가 연맹의 자의적인 규정 해석 속에 불공정하게 치러졌다”면서 신임 변석화 회장의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냈다.
이 교수는 직무정지 가처분 신청을 낸 직후 취재를 요청한 기자의 질문에 “언론을 통해 축구계가 분열되는 모습을 보이고 싶지 않다”면서 보도 자제를 강력하게 요청했지만 무슨 이유에서인지 며칠 뒤 언론에 가처분 신청을 공개했다.
수원 삼성 차범근 감독은 지난 9일 서울 광진구 유니버설 아트센터에서 열린 2008 프로축구 대상 시상식에서 감독상을 받은 뒤 올해 가장 큰 수확으로 엘리트 의식을 벗어던진 걸 꼽았다.
“사람이 갖고 있는 사고나 습관을 바꾼다는 게 어렵지만 주어진 환경이 많은 것을 변하게 했다. 올해는 소중한 경험을 한 해였다”고 시즌을 돌아본 차 감독은 “그동안 자의적이라기보다 주변에서 나를 만들었다. 늘 많은 사람의 부러움의 대상이었고 선수 때도 벤치에 앉아본 적이 거의 없이 순탄한 길을 걸어왔다. 늘 최고의 찬사를 받으면서 달려왔기 때문에 나도 모르는 사이 내가 만들어졌다고 생각한다”고 털어놓았다. 이어 “틀을 깬다는 건 어려웠지만 올 한 해 나 스스로 마음을 열고 놀라운 경험을 했다. 더불어 성공했고 그런 것들이 귀중한 경험이었다”며 환하게 웃었다.
항상 근엄했던 차 감독은 서울을 꺾고 우승을 확정한 뒤 아이처럼 껑충껑충 뛰며 기뻐하는 의외의 모습으로 주위를 놀라게 했다. 아들인 차두리의 결혼이 발표된 뒤 “이제 마누라를 뺏기지 않아도 된다니 기쁘다”는 농담으로 기자들의 배꼽을 잡게 했다.
‘차붐’이라는 전설을 벗고 인간 차범근으로 거듭난 그의 변신에 많은 사람이 반가워한다.
전광열 스포츠칸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