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과거는 묻지마’ 살길 찾아 대이동
▲ 그래픽=장영석 기자 zzang@ilyo.co.kr | ||
당의 진로 문제와 정계개편 방향을 놓고 열린우리당 내 여러 계파 간 이해관계가 첨예하게 맞서고 있다. 일촉즉발의 위기상황으로 치닫던 계파 간 갈등은 2일 의원총회를 기점으로 일시 소강국면을 맞이하고 있지만 물밑에선 계파 간 기 싸움과 차기 대권주자를 중심으로 한 세 대결이 더욱 치열하게 전개되고 있다.
여기에 범여권 차기주자인 고건 전 총리가 ‘독자신당’ 창당을 선언하면서 여권 내 계파 갈등 기류는 더욱 복잡한 양상으로 꼬이고 있다. 친노세력을 중심으로 한 재창당파와 대립각을 세우고 있는 통합신당론이 고 전 총리의 신당 노선과 일정부분 상통하고 있기 때문이다.
정치권 일각에선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 논의가 지지부진할 경우 대통합론을 주장하는 일부 세력들이 고 전 총리가 추진하는 신당에 합류할 가능성도 배제할 수 없다는 분석을 내놓고 있다.
정계개편 과정에서의 주도권 장악 및 내년 대선정국을 겨냥한 차기주자들의 이해관계가 맞물리면서 “사느냐 죽느냐” 생존게임으로 비화되고 있는 열린우리당의 신 계파지도를 파헤쳐 봤다.
현재 열린우리당의 정계개편론은 세 가지로 나눌 수 있다. 첫째는 통합신당론으로 비노무현 성격을 띠면서도 열린우리당의 분당파가 주도권을 잡고 새로운 당을 만들자는 것이다. 둘째는 재창당론으로 현재의 열린우리당을 리모델링하자는 것으로 친노 성격이 강하다. 세 번째는 열린우리당의 주도권까지도 포기하고 고건 전 총리의 신당이나 민주당과의 연합도 고려할 수 있다는 대통합론이다.
현재 열린우리당의 최대 지분은 여전히 김근태(GT) 의장이 이끄는 재야파와 정동영(DY) 전 의장을 정점으로 한 당권파가 양분하고 있다. 여기에 양적인 측면에서는 이 두 세력에 크게 미치지 못하지만 노무현 대통령의 후광을 업고 있는 친노직계와 개혁당 출신의 개혁파도 적잖은 영향력을 발휘하고 있다. 또 문희상 김혁규 유인태 염동연 의원 등 친노 성향의 중진들은 거중 조정역할을 하며 당내 무게중심을 잡고 있다.
하지만 정계개편이 정치권 화두로 부상하면서 이들 제 세력들의 이해관계도 크게 엇갈리고 있다. 상호 경쟁관계였던 계파가 협력체제를 구축하는가 하면 유연한 관계였던 계파 간에 반목이 생기는 등 정계개편에서 비롯된 신 계파지도가 구축되고 있는 형국이다. “순간의 선택이 정치생명을 좌우할 수 있다”는 과거 정계개편 사례를 반면교사로 삼겠다는 분위기다.
2일 의총을 기점으로 일시 봉합 국면에 접어든 여권 내 정계개편론은 통합신당론, 재창당론, 대통합론을 축으로 이들 세력들의 합종연횡이 활발히 벌어지고 있는 형국이다. 일단 표면적으로는 당분간 별다른 움직임이 나타나지 않을지 몰라도 수면 하에서는 엄청난 난기류가 계속될 수밖에 없다.
그동안 차기 대권주자로서 보이지 않은 경쟁과 갈등관계를 유지해왔던 GT계와 DY계, 천정배 의원 진영은 미묘한 입장차를 보이고 있다. 당초 당 의장 신분이라는 점을 의식해 재창당론에 무게를 두었던 GT도 “더 이상 친노세력에 끌려 다니면 안 된다”는 측근 의원들의 조언을 받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열린우리당 실패론’을 거론해 당내 논란을 야기했던 DY는 공개적인 발언은 자제하고 있지만 친 DY계로 분류되는 김한길 원내 대표 등의 발언을 놓고 볼 때 역시 통합신당론에 동조하고 있다고 보아야 할 것이다. 친노세력으로 분류됐던 천정배 의원은 통합신당론을 앞장서 외치며 노 대통령과 대립각을 세우고 있다. 그러나 소위 대권주자들의 입장은 아직 분명하지는 않다. 당장 입장을 분명히 하고 태도를 정할 경우 과연 당내외 역풍을 이겨낼 수 있을지 다시 한번 계산을 해야 할 입장이기 때문이다.
한 가지 흥미로운 것은 최근 통합신당론의 기수를 자처하고 있는 천 의원에 대해서는 또 다른 시각이 있다는 점이다. 일부에서는 노 대통령과 천 의원의 각별한 정치적 인연을 고려할 때 또 다른 노림수가 내포돼 있는 게 아니냐는 것이다. 즉 2단계 정계개편(위장이혼 후 재결합)을 겨냥한 여권 지도부의 고도의 대권전략이 숨겨져 있을 것이란 의혹도 나온다. 한마디로 지금 열린우리당의 내부는 누구를 믿고 누구를 따라야 할지 전혀 감이 잡히지 않는 절대 혼란의 상태라고 말할 수 있다.
그런 상황 속에서도 당 중진들의 입장은 비교적 분명하다. 김원기 전 의장과 정대철 고문 등 원로 창당주역들은 통합신당론에 가세하고 있다. 특히 노 대통령 배제 논리를 펼쳐왔던 정 고문은 지난달 30일 한 라디오 프로그램에 출연해 “정부와 여당이 모두 국정 실패를 자인하고 지난 대선을 승리로 이끌었던 선거구도를 해체한 것을 깊이 반성하고 재고해야 한다”며 신당 논의 기구 설치를 주장하기도 했다.
▲ 지난 3일 열린우리당 의원총회 모습. 정계계편과 관련해서 우리당 내에선 각 계파의 세싸움이 시작됐다. | ||
하지만 통합신당론을 주장하는 제 계파들도 신당의 성격과 추진 주체, 시기와 명분 등과 관련해서는 적잖은 시각차를 보이고 있어 제 계파들이 통합신당론 울타리 안에서 합의점을 도출해낼지 또한 불투명한 상황이다.
현재 호남 세력의 좌장격인 염동연 의원을 주축으로 한 일부 호남 의원들은 통합신당론에서 더 나아가 이참에 고건 전 총리와 민주당 등을 재결합해 민주개혁세력 대통합을 이끌어내야 한다는 주장을 펼치고 있다. 기성 정당의 모든 기득권을 포기하고 제3지대에서 범여권 세력은 물론 시민사회세력까지 포괄하는 대통합신당을 만들자는 논리다. 특히 이들 세력들의 논리는 고 전 총리가 주장하고 있는 국민통합론과 상통하는 면이 적지 않아 정계개편 논의 과정에서 양측의 연대 여부도 초미의 관심사로 부상하고 있다.
현재 열린우리당 지도부를 구성하고 있는 비대위원들의 입장도 관심사다. 5·31 지방선거 참패 후폭풍으로 DY가 백의종군을 결정하고 비상 체제로 돌입한 열린우리당은 6월 9일 진통 끝에 15명의 비대위원을 구성했다. 최고위원회의 역할을 수행할 7명의 상임위원은 김근태 의장과 김한길 원내대표 등 당연직 상임위원 2명과 문희상 이미경 정동채 김부겸 정장선 의원으로 구성됐고, 8인의 비상임위원으로는 박명광 윤원호 유인태 배기선 이강래 이호웅 이석현 박병석 의원 등이 임명됐다. 이중 이호웅 전 의원이 의원직을 상실하고 정동채 의원이 당직을 사퇴해 현재는 13명의 비대위원이 지도부를 이끌어가고 있다.
지난 2일 의원총회에서 정계개편 논의를 정기국회 이후로 미루고 세부적인 사항에 대해서는 비대위에서 논의키로 결정한 만큼 비대위원들의 입장도 적잖은 변수로 작용할 것으로 관측되고 있다. 이들 비대위원 개개인이 정계개편과 관련한 입장을 공식적으로 언급하지는 않았지만 대다수 비위위원들은 통합신당론에 무게를 두고 있는 것으로 확인되고 있다. 실제로 지난달 29일 여의도 렉싱턴 호텔에서 김근태 의장 등이 참석한 가운데 열린 비대위 회의에서 13명의 비대위원 중 대다수는 ‘통합신당론’에 동조한 반면 문희상 배기선 윤원호 의원 등 3명만이 ‘재창당론’을 주장한 것으로 알려졌다. 반대한 비대위원들도 정기국회 기간임을 고려해 정계개편 논의를 미루자는 취지였지 통합신당론에 반기를 들지는 않았다는 게 한 참석자의 전언이다.
재창당론을 고수하고 있는 친노직계와 개혁파 의원들이 비대위에 포함돼 있지 않다는 점은 차치하더라도 정계개편 방향과 관련한 현 당 지도부의 입장은 통합신당론으로 기울고 있는게 현실이다. 여기에 유력한 차기주자인 GT·DY·천정배 의원 등이 통합신당론을 지지할 경우 향후 논의 과정에서도 재창당파의 입지는 더욱 좁아질 것이란 시각이 많다.
그러나 친노직계와 개혁파 의원들은 여전히 “통합신당론은 지역주의 구도로의 회귀”라며 강하게 반발하며 재창당론 입장을 고수하고 있다. 당의 정체성을 부정하는 통합신당론은 스스로 개혁의 정체성을 포기하는 ‘정략적 발상’인 만큼 조기 전당대회를 통해 재창당 작업에 나서야 한다는 게 이들의 논리다.
친노 의원 모임인 참여정치실천연대(참정연)와 의정연구센터 소속 의원들은 “정계개편 방향과 관련해 1월중 전대를 열어 전체 당원들의 뜻을 물으면 된다”는 입장이다. 친노파 중진인 장영달 의원도 “열린우리당의 출범 자체가 원죄라고 생각하는 창당 인사가 있다면 탈당하고 정계에서 은퇴하는 것이 책임 있는 자세일 것”이라며 통합신당파를 비판하고 있다.
노 대통령의 핵심측근인 안희정 씨와 여택수 전 청와대 행정관, 백원우 의원 등은 ‘노사모’의 단합과 재결집에 나서는 등 ‘당 사수’를 위한 구체적인 행동에 돌입한 상태다. 특히 8·15 특사 후 정중동 행보를 보여 왔던 안 씨는 최근 여의도에 개인 사무실을 열고 정계개편 및 차기 대선전략 구상에 몰입하고 있는 것으로 알려졌다.
개혁파는 내년 초 당에 복귀해 본격적인 대권행보를 보일 것으로 예상되는 유시민 복지부 장관을 정점으로 당내 지분을 확고히 다지는 동시에 ‘유시민 대통령 만들기’ 플랜을 가동시킨다는 전략이다. 따라서 이들 재창당파 의원들은 10여 명이 남더라도 열린우리당을 사수한다는 결의를 다지고 있어 대세를 이루고 있는 통합신당파가 이들을 설득하지 못한다면 결국 파국을 피하기 힘들 것으로 관측된다.
재창당파가 고집을 꺾지 않을 경우 통합파는 ‘탈당’이라는 최후의 카드를 꺼내들 수밖에 없지만 ‘철새 정치인’이란 국민적 비난과 국고보조금 감소로 인한 자금난 등을 감안하면 섣불리 탈당을 결행할 수 없을 것이란 관측도 만만치 않다. 그렇지만 결국은 분당을 피할 수 없는 현실이라고 보는 것이 일반적인 시각이다. 문제는 시기이며 그때 나타날 정계 모습에서 차기 대선 구도가 그려질 수 있느냐는 점이다. 아무튼 열린우리당으로서는 누가 보다 많은 세력을 결집시킬지가 ‘당사수’ 내지는 ‘탈당’ 명분 경쟁에서 우위를 선점하는 주요 잣대가 될 것으로 보인다.
홍성철 기자 anderia10@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