문화재 제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 19
안견, <몽유도원도>, 1447년, 비단에 수묵담채, 38.7×106.5cm, 일본 덴리대학 중앙도서관 소장.
<몽유도원도>가 탄생해서 일본의 현 소유자의 손에 들어가기까지 어떤 사연이 숨겨져 있을까? <몽유도원도>의 탄생은 1447년 어느 이른 봄날 젊은 왕자의 꿈에서 시작된다. 세종의 셋째아들 안평대군은 꿈속에서 박팽년과 함께 기암괴석의 골짜기를 돌고, 폭포를 지나, 복숭아 꽃나무가 핀 첩첩산중 무릉도원으로 들어간다. 그리곤 뒤따라 온 신숙주, 최향과 함께 시를 지으며 거닐다가 잠에서 깼다. 안평대군은 화가인 안견을 불러 이 꿈의 내용을 화폭에 담게 했다. 사흘 만에 안평대군의 꿈은 <몽유도원도>로 완성되었다.
<몽유도원도> 본 그림의 높이는 38.7㎝, 길이 106.5㎝다. 하지만 덧붙여진 제발(題跋)의 길이가 6척(187㎝)이다. 제발이란 화가가 작품의 제목이나 배경을 설명하는 글을 말한다. 감상자의 감상평을 일컫기도 한다. 중국 원나라 이후 생겼다는 제발문화는 그림의 묘미를 살리면서 그림의 탄생 배경, 화가의 세계관을 알려준다. 이런 문화 덕분에 <몽유도원도>의 탄생배경을 알게 됐다. <몽유도원도>에는 안평대군, 김종서, 신숙주, 박팽년, 성삼문, 박연, 서거정 등 당시 무계정사(武溪精舍: 안평대군의 사저)에 모여 문학과 예술을 논하던 당대 최고의 선비 21명이 제발을 적었다. 미술사, 서화사를 넘어 문화사적으로 그 가치가 높다. 15세기 조선의 예술과 사상이 동시에 담겼다.
<몽유도원도>는 안평대군이 계유정난(癸酉靖難, 1453년)으로 왕이 내린 독약을 먹고 죽으면서 함께 자취를 감췄다. 그러다가 440년 만인 1893년 11월 일본 궁내성에서 주최한 ‘임시전국보물취조국’ 조사위원회가 <몽유도원도>를 감정하면서 세상에 진본이 존재한다는 것이 알려졌다. 이후 1929년 ‘조선 안견의 몽유도원도’라는 논문(동양미술, 1929년 9월호)이 발표됐다. 사연은 이랬다. 소노다 사이지(園田才治)라는 사업가가 동양미술전문가 나이토 고난(內藤湖南) 교수를 찾아가 한 고서화를 보여줬다. 나이토 교수는 이 서화가 안견의 <몽유도원도>임을 알아보고 바로 연구에 착수했다.
<몽유도원도>은 어떻게 일본에서 발견된 것일까? 정확한 경위를 파악하기는 어렵다. 임진왜란 때 제4진으로 조선에 출병한 시마즈 요시히로(島津義弘: 이순신이 전사한 노량해전의 일본 측 지휘관)가 경기도 영평 소재 대자암(大慈庵)에서 약탈한 것으로 추정한다(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김경임). 대자암은 죽은 사람의 명복을 비는 왕실의 사찰이었다. 안평대군이 사직의 안녕을 기원한 이 그림을 대자암에 봉헌했을 것으로 봤다. 시마즈가(島津家)에서 70여 년 동안 내려오다가, 쇼와공황으로 파산한 시마즈 시게마로가 도쿄의 고미술상에게 넘기고 이후 소노다 사이지가 구입했다. 사이지가 소장하던 중 1933년에는 일본의 중요 미술품에, 1939년에는 일본의 국보로 지정됐다. 1950년 무렵 일본 덴리대학(天理大學)이 구입해 지금까지 소장하고 있다.
사실 <몽유도원도>를 우리가 소장할 수 있는 기회가 몇 번 있었다. <동아일보>(1931년 4월 10일자)에 실린 우경(友鏡) 오봉빈(嗚鳳彬·1893~납북)의 ‘조선명화전람회(1931년 3월 도쿄부립미술관)’ 감상 소감이 애절하다.
“…이것은 조선에 있어 둘도 없는 국보입니다. 금번 명화전의 최고 호평입니다. 일본 문부성에서 국보로 내정하고 가격은 3만 원(쌀 2300가마 정도)가량 입니다. 내 전 재산을 경주하여서라도 이것을 내 손에 넣었으면 하고 침만 삼키고 있습니다. 이것만은 꼭 내 손에, 아니 조선 사람의 손에 넣었으면 합니다….”
1946년 김재원 당시 국립중앙박물관장에게 일본에서 떠돌아다니던 몽유도원도를 사겠느냐는 제안이 들어왔다. 하지만 구입할 만한 돈이 없었다. 1950년에는 장석구라는 골동품상이 부산으로 들어와 최순우 씨에게 80만 엔에 구입을 권유하였다. 하지만 전쟁 중이라 발만 동동 구를 뿐 방법이 없었다. 결국 소유권은 덴리대로 넘어갔다.
<몽유도원도>가 불법 반출되었다면 반환 요구를 할 수 있을 텐데, 그런 증거는 아직 없다. 게다가 문화재 보유 국가가 그것을 국가의 문화재로 등재하면 국내법을 우선 적용해 소유권을 인정하기 때문에 일본의 국보로 등재된 몽유도원도를 돌려받을 수 있는 방법은 거의 없다. 그러나 <몽유도원도>는 조선 화가 안견이 그렸다는 건 명백한 사실이다. 환수가 전혀 불가능한 건 아니다. 문화재의 원소유주 환수에 성공한 ‘Lady in Gold’의 사례도 있다. 우리도 장기적으로 문화재 환수를 담당하는 전문 변호사를 육성할 필요가 있다. 문화재는 제 자리에 있을 때 아름답다.
참고문헌 1. 「유홍준의 국보순례」, 유홍준, 눌와, 2011. 2. 「조선의 그림수집가들」, 손영옥, 글항아리, 2010. 3. 「몽유도원도 그 유랑의 시간을 추적하다」, 연합뉴스, 2013.10.25 4. 「日 국보 몽유도원도 되돌려 받을 수 있을까」, 세계일보, 2009.06.21 5. 「일본인들, 조선에서 마구잡이로 문화재를 약탈하다」, 노컷뉴스, 2014.10.08 6. 「사라진 몽유도원도를 찾아서 – 김경임」, 월간조선, 2014. 1월호 7. 「조선명화전람회 –하」, 동아일보, 1931.04.12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