지갑 닫고 ‘’동작 그만!‘’
몇 년 전 팀 재정 상황이 좋지 않았던 한 시민구단 관계자는 “돈도 없는데 굳이 외국에 가서 훈련할 필요가 있느냐”는 기자의 질문에 “선수들 사기도 생각해야 하고…. 1억 원 정도면 호주 정도는 갔다 올 수 있다”라며 조금 무리를 해서라도 외국에서 훈련하는 게 낫다는 답을 내놓았다.
경제 불황이 사회 전반을 꽁꽁 얼어붙게 만든 2009년 초. 프로축구 대다수 구단은 전훈지로 ‘싸게 먹히는’ 중국이나 일본을 택했다. 기간도 3주 안팎으로 줄이며 기름기를 쏙 뺐다. 지난해 말 메인스폰서인 GM대우로부터 당분간 후원금을 중단하겠다는 가슴 철렁한 얘기를 들은 인천 유나이티드의 경우 막판까지 전지훈련을 떠날지 말지를 놓고 고심하다 두 눈 질끈 감고 중국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몇 년 전까지 만해도 대외적인 위상과 선수단 사기를 생각해 두말없이 떠났던 전훈에 대해 많은 구단이 식은땀을 흘리다 가까스로 떠난 건 돈 때문이다.
적지 않은 구단이 올 시즌 전체 예산을 지난 시즌에 비해 삭감한 게 K리그의 현실이다. 지방 A 구단 프런트는 2009년 예산을 80억 원에 맞추라는 상부의 지시를 받았다. 2008년보다 20억 원이나 깎인 금액이다. 또 다른 지방의 B 구단 역시 110억 원에서 100억 원으로 하향 조정된 예산계획서를 놓고 착잡한 표정을 짓는다.
부자 구단의 대명사인 수원 삼성조차 올 시즌 예산을 전년도에 비해 20%나 줄였다. 차범근 감독이 구단과 재계약하면서 경제 위기를 고려해 자진해서 연봉을 삭감하겠다는 의사를 밝힐 정도로 구단 전체가 허리띠를 졸라맸다.
수원은 전지훈련을 국내에서 치를 생각까지 하다가 홍콩에서 열린 ‘2009 홍콩 구정컵’(1월 24~30일)에 다녀오는 것으로 분위기만 냈다. 2월 15일부터 22일까지 미국 LA에 가는 건 지난해 K리그 컵대회 우승팀 자격으로 팬퍼시픽 선수권에 참가하기 위해서지 엄밀한 의미에서의 외국 전지훈련은 아니다. 대회 출전을 위한 항공료와 체재비를 대회 조직위가 전액 대주는 덕분에 수원은 마음 편하게 태평양을 건넌다.
시민구단인 C 구단 관계자는 “고환율 탓에 전훈 기간과 인원 감소를 고민할 수밖에 없었다”라고 털어놓았다. “아시아쿼터제가 실시된다고 하지만 우리 입장에서는 남의 일이나 마찬가지다. 이대로 가면 3(기존 용병 쿼터)+1(AFC 회원국 선수)은 고사하고 3도 채울 수 없다”라는 하소연도 했다.
각 구단의 지갑이 얄팍해지다보니 올 겨울 이적시장에서는 뭔가 큰 게 터지지 않는다. 이동국, 김상식, 라돈치치 등 대형선수들의 이동이 이뤄진 것만 놓고 보면 이적시장에 불이 붙은 것 같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그렇지 않다. 올 겨울 이적시장의 대세는 선수 간 트레이드다. 지난해까지 전력 보강을 위한 과감한 현금 트레이드가 심심찮게 이뤄졌다면 올해는 철저하게 선수 맞교환이다.
선수 간 트레이드의 중심에는 ‘법인카드 한도액’이 상당할 것 같아 보이는 성남 일화가 있다. 선수단 물갈이를 진행 중인 성남은 중앙 공격수 김동현을 경남FC로 보내고 김진용을 데려왔다. 전북 현대와는 이동국과 김상식을 내주고 유망주인 문대성과 홍진섭을 영입했다. 인천과는 용병 공격수 라돈치치를 받고 수비형 미드필더 손대호를 내주는 거래를 하는 등 계산기를 여러 차례 두드린 뒤에야 트레이드 협상 테이블에서 일어났다.
제주 유나이티드가 전북에 13억 5000만 원(추정)을 주고 강민수를 데려온 건 올 겨울 이적시장의 흐름에 걸맞지 않은 것처럼 보이지만 내용을 들여다보면 꼭 그렇지만은 않다. 제주는 강민수를 데려오기 전에 부산에 이정호를 주며 10억 5000만 원 정도의 ‘실탄’을 마련했다. 따라서 제주는 실제로는 3억 원 정도만 들여 대표팀에서 뛰는 중앙 수비수 영입에 성공한 셈이다.
K리그 이적시장의 큰손 수원과 FC서울이 지갑을 열 생각이 없는 만큼 이번 겨울 K리그 이적시장은 대구FC에서 뛰던 이근호가 K리그 다른 팀으로 이적하지 않는 한 대형 이적이 터지지 않을 전망이다.
K리그 구단들이 못살겠다고 아우성을 치다보니 한국프로축구연맹은 지난달 29일 단장들이 머리를 맞댄 이사회가 끝난 뒤 K리그 비상경영체제를 전격 선언했다. ‘세계적인 경제위기 상황을 맞아 각 구단의 경영환경도 급속히 악화되므로 현재의 위기를 헤쳐 나가고 최고의 리그로 거듭나기 위해…’라는 이유를 들며 △선수예비엔트리 제도 도입 검토 △선수와 맺은 계약서에 포함된 기본급과 출전수당을 제외한 승리수당 등 별도의 보너스 지급 폐지 △원정시 버스나 기차로 이동 △원정숙소 호텔 등급을 낮춘다고 발표했다.
연맹은 비장하게 K리그 자구책을 내놓았지만 실효성과 시기에 의문부호가 달린다는 지적이 나왔다. 일례로 승리수당 폐지는 얼핏 보면 무릎을 탁 칠 만한 해결책이지만 대부분의 구단이 상당수 선수와 계약을 끝냈다는 걸 감안할 때 현실화 가능성이 낮다. 이미 계약한 선수에게는 승리수당을 주고, 계약을 안하거나 못한 선수에게는 주지 말아야 한다는 얘기이기 때문이다.
다들 앓는 소리를 하지만 경제 위기를 남의 일로 보는 쪽도 있는 모양이다. 최근 소속팀 선수들과 연봉협상 마무리 단계에 있는 F 구단 관계자는 경제위기 속의 구단 운영을 묻는 질문에 불만부터 터트렸다.
“올해 출전 경기수가 보잘 것 없고 팀에 공헌한 것도 없는데 버젓이 연봉 인상을 요구하는 선수들이 많다”라며 “얼마 전 김원동 강원FC 신임사장이 ‘지도자도 경영자다. 구단 현실을 직시하고 선수단 운영에 반영해야 한다’는 말을 했다는데 선수들도 이를 새겨들었으면 한다”라고 말했다.
지방 구단인 G 구단 단장은 “선수들이 무리한 요구를 하는 데는 ‘돈 공세’를 펼치는 일부 구단에 원죄가 있다”라고 주장했다. 재정형편이 탄탄한 구단의 실명을 거론한 이 단장은 “에이전트 주장에 따르면 올해 20만 달러짜리 용병을 70만 달러에 데려간다고 나선 구단이 있다고 한다. 겉으로는 K리그에 거품이 끼었다고 걱정하는 척하지만 말과 행동이 다른 구단이 있다”라고 목소리를 높였다.
전광열 스포츠칸 체육부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