미리 수풀 속 숨어있다가…‘힐링하러 왔다가 킬링당해’
묻지마 살인사건이 발생한 서울 수락산의 한 등산로. 주차가 어려워 외지인보다 인근 주민들이 자주 찾는 곳이다.
이른 아침 수락산의 한 등산로에서 만난 등산객 정 아무개 씨(여‧64)는 꼭 붙잡고 있던 남편의 손을 들어 보여주며 몸서리를 쳤다. 같은 아파트에 살고 있는 이웃 여성과 함께 매일 아침 등산을 다녔던 정 씨의 등산길에 남편이 동행하게 된 것은 지난 5월 29일 수락산 등산로에서 60대 여성이 숨진 채 발견된 직후의 일이다. 정 씨는 사건이 발생하면서 등산 동호회 사람들 사이에서 “여성 회원들은 등산 시 남편 혹은 남성 회원과 동행하거나, 여성들끼리 등산을 할 경우 반드시 3명 이상이 함께할 것”이라는 행동 강령이 생겼다고 말했다. 정 씨의 말대로 이날 등산로에는 남성과 동행하거나 그룹으로 움직이는 여성들이 보일 뿐, 혼자 등산로에 오른 여성은 볼 수 없었다.
‘수락산 살인 사건’은 지난 5월 29일 새벽 등산길에 오른 64세의 주부 A 씨가 강도 살인죄로 복역하다 최근 출소한 김학봉(61)에 의해 숨진 사건이다. 경찰은 피의자인 김 씨가 숨진 A 씨의 주머니를 뒤진 점 등을 토대로 강도 범행을 목적으로 살인을 저지른 것으로 추정했다. 실제로 지난 6월 2일 2차 경찰 조사에서 김 씨는 “밥 사먹을 돈을 뺏으려다 죽였다”고 진술한 바 있다. 그렇지만 1차 경찰조사에서 김 씨가 “새벽에 사람들이 많이 다니는 게 궁금해서 첫 번째 사람을 만나면 물어보고 죽여야겠다고 생각했다” “원래는 두 명을 죽이려고 했다” 등의 진술을 하면서 ‘묻지마 살인’의 가능성도 대두돼 왔다. A 씨는 이날 오전 5시께 집을 나섰다가 불과 30분도 안 되는 시간에 참변을 당했다. A 씨가 이용한 등산로 입구는 인근 주민들이 주로 이용하는 작은 등산로로 인적이 드물고 낮에도 빛이 잘 들지 않는 곳이다. 범행 전날 밤부터 산에 올랐던 김 씨는 옷 속에 흉기를 품은 채 이곳 등산로를 빼곡히 채운 나무 사이에 몸을 숨기고 희생자를 기다렸던 것으로 알려졌다.
등산로에서 이처럼 살인 등 ‘묻지마’ 식 강력사건이 발생하는 것은 어제 오늘 만의 일이 아니다. 가장 최근에 발생한 수락산 사건 이외에도 지난 4월 17일에는 광주 어등산에서도 ‘묻지마 살인’ 사건이 발생했다. 흉기를 든 채 어등산을 배회하던 김 아무개 씨(48)는 팔각정 인근에서 통화를 하고 있던 B 씨(65)를 9차례나 찔러 숨지게 한 것. 당시 김 씨는 다른 등산객들을 상대로 흉기를 휘두르다가 B 씨가 자신을 112에 신고하는 줄 알고 휴대전화 통화내역을 보여 달라고 요구했으나 이를 거절당하자 살해한 것으로 알려졌다. 경찰은 김 씨가 정신분열증을 앓고 있다고 보고 있다.
이에 앞선 지난해 2월 5일에는 수원 광교산 등산로에서 신 아무개 씨(47)가 몽둥이를 휘둘러 등산객 C 씨(79)를 숨지게 한 사건이 발생했다. 아무런 이유 없이 등산객들을 상대로 폭력을 휘두른 신 씨는 앞선 어등산 사건의 피의자 김 씨와 마찬가지로 정신분열증으로 치료를 받은 전력이 있는 것으로 드러났다. 또 2013년 4월 18일 대구 달성군 인근 야산에서는 난민신청이 불허된 것에 앙심을 품은 40대 파키스탄인이 등산을 마치고 하산하는 50대 여성 등산객들을 상대로 쇠파이프를 휘두른 사건도 있었다.
이 같은 ‘묻지마 범죄’의 특징은 강력 범죄임에도 범행 동기가 뚜렷하지 않거나 이해하기 어려운 동기를 토대로 일면식도 없는 상대에게 일방적인 분노를 표출하는 것으로 설명된다. 불특정 다수를 대상으로 이뤄지기 때문에 범행은 길거리나 주택가처럼 ‘다수’의 사람들이 ‘언제나’ 모이는 곳에서 많이 발생하는 것으로 파악되고 있다. 실제로 2014년 대검찰청이 발표한 2012~2013년 2년 동안의 묻지마 범죄 분석 결과에 따르면 국내에서 묻지마 범죄가 가장 많이 일어나는 장소는 길거리(56건, 51%)로 나타났다. 최근 등산로에서도 다수의 묻지마 범죄가 발생하는 까닭에 대해 한 범죄 전문가들은 ‘묻지마 범죄를 저지르려는 범인들에게 등산로는 범죄를 위한 최고의 환경이기 때문’이라고 설명하고 있다. 인적이 드물고 샛길이 많은 등산로의 특성상 공간이 넓기 때문에 범행을 저지른 뒤 범행 도구를 처리하거나 도주하기 용이하다는 말이다.
등산로에 우거진 수풀은 범죄자들이 범행 전과 후 숨거나 도주할 수 있는 최적의 여건을 제공한다.
이처럼 등산객들을 노린 ‘묻지마 범죄’가 지속적으로 발생하면서 등산로는 더 이상 힐링과 건강의 장소가 아니게 됐다. 사건 이후 각 지자체 등은 등산로 초입구와 일부 구간에 CCTV를 설치해 범죄 예방에 나서겠다는 방침을 밝혔지만 대부분의 등산로에 CCTV를 설치하는 것이 어렵고 관련 법령이나 예산조차도 마련되지 않아 현실과 동 떨어진 해결책이라는 지적이 이어지고 있다.
김태원 기자 deja@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