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 한 명의 팬만 있어도 모래판 서야죠”
“바로 이 장소가 처음 씨름을 했던 곳입니다. 그땐 비닐하우스로 씨름장을 만들었지만 장소는 여기였어요.”
모교인 구미초등학교에서 훈련을 하고 있는 이태현은 처음 샅바를 잡았던 곳에서 사연 많은 ‘제2의 씨름인생’을 시작하게 됐다며 남다른 의미를 부여했다. 구미시청 감독이자 구미초등학교 시절 이태현을 모래판으로 이끌었던 김종화 감독이 “(씨름의) 처음과 끝을 나랑 같이 해보자”고 강권하는 바람에 오랜 고민 끝에 모래판으로 돌아왔다는 그는 지난 설날장사씨름대회에 출전했던 소감을 이렇게 표현했다.
“어휴, 정말 죽는 줄 알았어요. 20년 넘게 했던 운동이었는데도 2년 반 외도했던 티가 팍팍났거든요. 격투기할 때는 자꾸 씨름 자세가 나오더니 이번엔 격투기할 때의 팔 꺾기라든가 무릎으로 상대 선수를 가격하는 행동이 나도 모르게 나오더라구요. 한창 시합 중인데 상대 선수가 무릎을 부여잡고 ‘형님, 이건 격투기가 아니에요’라고 말하면 ‘아차’ 싶을 때도 있었죠.”
이태현은 씨름 팬들 앞에 다시 서게 되기까지 한 달 넘게 번민의 밤을 보냈다고 한다. 떠나는 것보다 돌아오는 게 훨씬 힘들고 어려웠다는 것.
“격투기를 하겠다고 떠났던 선수잖아요. 그것도 천하장사, 백두장사를 휩쓸며 최고의 자리에 올랐던 선수였어요. 씨름 팬들이 느꼈을 상대적 박탈감이 심했을 겁니다. 그래서 솔직히 두려웠어요. ‘나란 놈을 어떻게 보실까’ 하는 생각에. ‘열심히 해봐라’ 하는 격려보단 비판이 더 많았습니다. ‘지금 그 나이에 뭐하러 왔노?’하는 분들도 계셨고 ‘갈 데 없으니까 결국엔 씨름판이냐?’하며 손가락질 하는 분들도 계셨어요. 그래도 내 입장에선 9명의 비난보다 단 한 명이라도 내 편이 있다면 그를 붙잡고 싶은 마음이었습니다.”
3년이 채 안 되는 27개월간의 격투기 생활동안 이태현은 많은 걸 잃었고 또 많은 걸 배웠다. 이종격투기 무대에서 ‘러브콜’을 보냈을 때만 해도 격투기 자체가 그렇게 어렵지 않게 느껴졌다는 게 그의 솔직한 고백.
“‘설마 씨름보다 어렵겠느냐’ 하는 생각이었어요. 주변에서도 격투기를 쉽게 보는 시각도 있었구요. 그랬으니까 전업 후 한 달도 되지 않아 데뷔전을 가졌겠죠. 지금 생각해보면 무모한 도전이었어요. 브라질의 히카르두 모라에스 선수가 첫 상대였는데 링에 오를 때의 심정이 바위라도 부술 것 같았거든요. 그런데 경기 시작하고 3분 정도 지나서 ‘이거 장난 아니구나’ 싶더라구요.”
데뷔전을 앞두고 실전 스파링도 제대로 해보지 않았다고 한다. 매스컴의 쏟아지는 인터뷰 요청에 응하느라 훈련에 집중할 수 없었기 때문이다. 그 결과는 경기에서 고스란히 나타났다. 이태현은 8분 8초 만에 세컨에서 타월을 던져 경기를 포기했다. 얼굴은 피투성이가 된 채 퉁퉁 부어올랐다. 대한항공 승무원인 아내 이윤정 씨는 한국에서 그 경기를 보다 충격을 받았고 어머니 김진일 씨는 뇌혈관이 부풀어 올라 병원으로 실려 갔을 정도였다.
▲ 사진=임영무 기자 namoo@ilyo.co.kr | ||
이태현은 데뷔전의 충격을 본격적인 훈련으로 만회해 나갔다. 러시아로 건너가 표도르와 함께 훈련도 했고 일본의 요시다 도장에서 의사소통의 불편함을 딛고 처절한 심정으로 격투기 기술을 연마해 나갔다. 그렇게 해서 가진 일본 야마모토 요시히사와의 2차전에선 타격 정확도와 자신감이 향상된 모습으로 한 대도 맞지 않고 승리를 거둘 수 있었다. 3차전은 세계 정상급이라고 평가받는 네덜란드 오브레임과 맞붙게 됐다. 이태현은 여러 선수들을 놓고 고민하다가 오브레임을 넘어야 격투기 무대 정상에 한 발 더 가까이 다가갈 수 있다고 믿었다고 한다.
“그 시기가 여기서 올라가느냐, 아니면 그냥 멈추느냐 하는 단계였어요. 요시히사와의 경기를 통해 자신감을 쌓았기 때문에 오브레임이 힘든 상대는 아니라고 생각했거든요. 열심히 준비했고 나름 승산도 있었는데 작전상 실수로 1분도 견디지를 못했어요. 오브레임 별명이 ‘5분의 힘’이었거든요. 그래서 무조건 5분만 버티자 했어요. 처음에 찬스가 있었는데도 5분을 버티자는 생각에 그냥 놔줬던 게 실수였던 거죠. 결국 오브레임의 니킥 한방으로 36초 만에 KO패를 당했습니다.”
어이없는 패배 후 이태현은 한동안 망연자실했다고 한다. ‘내가 지금 무슨 짓을 하고 있나?’하는 자괴감까지 들어 잠시 운동을 포기할 생각도 했다. 그러나 하루가 지나니까 이렇게 그만두면 너무 억울하다고 판단했고 오브레임이 운동하는 네덜란드 도장을 찾아가 오브레임과 직접 훈련을 하고 싶다는 바람을 갖게 됐다. 하지만 문제는 ‘돈’이었다. 더 이상 이태현을 지원해줄 만한 단체도 후원자도 없었고 자비를 들여서 운동하기에도 형편이 넉넉지 않았다.
“그때 비로소 격투기의 매력을 느끼게 됐거든요. 격투기의 재미를 알게된 순간에 지원의 손길이 끊어지면서 훈련하기가 힘들게 된 거예요. 우습지 않아요? 씨름으로 먹고 살기 힘들어서 격투기로 떠난 건데 거기서도 생활은 만만치 않더라구요. 그때 구미시청 김종화 감독님으로부터 연락이 왔어요. 다시 한 번 시작해 보자구. 항상 마음 속에 씨름이 존재해 있었지만 다시 모래판으로 돌아갈 엄두가 나지 않았어요. 비겁해 보이기도 했고. 격투기로 전업할 때보다 씨름판에 복귀하는 게 훨씬 더 어려운 결정이었다면 믿어줄까요?”
씨름이나 격투기나 승자와 패자는 존재하기 마련이고 어느 종목이든 패자는 관심 밖 제외 대상이라는 사실도 똑같았다. 이태현이 27개월 간 격투기 무대에서 거둔 성적은 1승2패, 출전 시간은 9분 47초에 불과했다. 이태현은 ‘화려한 외출’을 감행했다가 ‘참담한 심정’이 돼 친정으로 복귀했지만 주위에서 어떤 비난을 보낸다고 해도 지금 그가 모래판에 서 있다는 게 더할 나위 없이 행복하다고 토로한다.
“잃은 것보다 얻은 게 더 많았어요. 만약 (격투기를) 해보지 않았다면 은퇴 후에도 그에 대한 미련이 남아 있었을 겁니다. 동기와 후배가 있고 비빌 언덕이 있는 씨름으로 인해 행복한 마음이 들기도 합니다.”
이태현은 3월부터 구미 경운대학교에서 트레이닝 방법론이란 과목을 맡아 강단에 선다. 용인대학교에서 박사 학위를 딴 그의 원래 꿈은 교수였다. 3년 전에는 대학 강단에 서기가 녹록지 않았지만 지금은 그에게 소중한 기회가 주어졌다. 씨름선수 생활을 병행하면서 선생과 제자가 아닌 같은 눈높이를 갖고 편하게 만나고 싶다는 게 그의 바람이다.
“씨름은 1년 안에 승부를 보고 싶어요. 1년 안에 정상에 오르지 못하면 더 이상 욕심내선 안 될 것 같아요. 추석 때 장사씨름대회가 있잖아요. 가장 큰 대회인데 그때 승부를 걸어보려구요. 어렵게 돌아왔는데 점은 찍고 그만둬야 하지 않겠어요?”
인터뷰를 마치고 나오는데 이태현이 맨발로 뛰어와선 이 말을 꼭 써달라고 부탁했다.
“저한테 다시 목표를 갖게 해준 구미시민들과 시장님께 정말 감사하다는 말씀 꼭 드리고 싶어요. 진심으로 기회를 주신 부분에 대해 마음 깊이 고마움을 느낀다고 꼭 써주세요.”