독사의 집념이 ‘거룩한 계보’ 이었다
▲ 최철한 9단 | ||
주최국 대만은 물론 일본 중국의 홀대 속에 우리에게 주어진 티켓은 달랑 한 장이었다.대만의 부호 잉창치(지금은 작고)가 사재를 털어 바둑사상 최초로 국제바둑대회를 만든 데에는 크게 두 가지 목적이 있었던 것으로 전해진다. 하나는 자신이 고안한 잉창치 바둑룰(전만법)과 바둑 용구를 세계에 보다 널리 알리는 것.
두 번째는 중국 바둑의 강하다는 것, 중국이 바둑의 발상지라는 것을 다시 한 번 세계에 확인시키는 것이었다. 당시 세계 바둑최강으로 꼽히던 사람은 중국의 녜웨이핑 9단이었다. 잉창치는 녜웨이핑이 우승할 것으로 믿었던 것.그러나 단기필마로 뛰어든 조훈현 9단은 울분을 토하듯, 신들린 검무(劍舞)를 선보이며 종횡무진, 8강에서 당시 일본의 제일인자였던 고바야시 고이치 9단을 눕히고, 준결승 3번기에서 린하이펑 9단을 제쳤다.
그리고 해가 바뀌어 1989년 늦여름의 결승, 싱가포르에서 만난 녜웨이핑을 꺾었다.그때의 얘기와 이후 서봉수 9단, 유창혁 9단, 이창호 9단이 차례로 우승, 세계 제패의 퍼레이드를 벌인 얘기, 최철한 9단이 선배들의 전통을 잇지 못하고 중국 창하오 9단에게 우승컵을 양보하면서, 그것도 필승의 바둑을 역전패하면서 회한에 젖었던 얘기 등은 유명한 얘기고 이 코너에서도 소개한 바 있다.
최철한은 이번 승리로 역시 이창호에게 강하다는 것을 다시 한 번 입증했다. 이번 우승이 심기일전의 계기가 될 것은 물론이다.일본에서는 장쉬 9단의 활약이 눈에 띈다. 장쉬 9단은 대만 출신으로 잠시 뜸한가 싶더니 요새 다시 가속 페달을 밟고 있다. 4월 16일 열린 제47기 십단전 도전5번기 제4국에서 타이틀 홀더 다카오 신지 9단에게 흑을 들고 불계승, 종합 전적 3승1패로 타이틀을 쟁취하면서 5관왕에 올랐다.
▲ 잉창치배 결승국에서 최철한 9단(왼쪽)과 이창호 9단이 맞대결하고 있다. | ||
그나저나 일본 바둑계가 본의든 우연이든 극동 3국의 바둑이 발전하는 데에 비옥한 토양의 역할을 했다는 사실은 부인할 수 없다. 현대 바둑이 초창기였던 1930년대에 일본은 일-중 전쟁이 한창인 속에서도 적국인 중국의 우칭위엔을 받아들여 성장의 터전을 마련해 주었고, 종당에는 일본의 내로라하는 모든 기사가 우칭위엔에게 무릎을 꿇는 수모를 감수하면서 우칭위엔이 일본 바둑의 제일인자가 되는 것을 지켜보았다.
우칭위엔 다음에 등장한 사카다 9단은 1950년대에서 60년대에 걸쳐 절정의 인기를 누렸다. 우칭위엔에 대해 맺힌 한 때문이기도 했을 것이다. 그러나 사카다 9단은 다시 우칭위엔이 키운 중국의 린하이펑에게 무너졌고, 1970년대 중반까지 한동안은 린하이펑의 시대였다. 다음은 미학주의자 오다케 히데오를 비롯해 초정밀 계산력의 컴퓨터 이시다 요시오, 무수무시한 대마 킬러 가토 마사오, 저 유명한 우주류의 다케미야 마사키 등 기타니 도장 출신들의 시대였다.
오다케가 맏형이었고 이하 세 사람은 3총사로 불렸다.그들의 시대에 종지부를 찍은 사람이 한국인 조치훈 9단. 조치훈 9단의 교통사고를 당했고, 조 9단으로부터 일인자의 바통을 넘겨받은 사람이 바로 고바야시 9단이었다. 1980년대가 조치훈의 시대였다면 90년대는 고바야시의 시대였다.
이후 잠시 혼돈기가 계속되다가 2000년대에 접어들면서 야마시타 게이고, 야마타 기미오, 다카오 신지, 하네 나오키 등의 신진 세력이 등장했는데, 이제 또다시 중국인 장쉬가 그들 모두를 위협하고 있는 형국이다. 장쉬는 아직 우칭위엔, 린하이펑, 조치훈이 보여 준 그런 파괴력은 발휘하지 못하고 있는 것 같은데, 과연 앞으로는 어떨지.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