성남 떠날 때 “처음으로 관둘 생각했다”
▲ 박은숙 기자 espark@ilyo.co.kr | ||
마침 인터뷰하기로 약속한 날이 이동국의 생일이었다. 그래서 포항에 있는 가족들이 모두 이동국을 보러 전주로 모였다. 생일에 대해 이런저런 얘기를 하다가 나이와 관련해 인터뷰가 시작됐다. 서른살. 한국 나이로는 서른 한 살이다. 기자가 서른한 살이라고 했더니 끝까지 ‘방송용 나이’를 고집하는 이동국이다.
“예전 (김)병지 형이 이런 말을 한 적이 있어요. 같은 나이라고 해도 운동 선수는 그 또래의 사회인들보다 훨씬 더 어려보인다고요. 아마 어린 선수들과 같이 운동을 해서 그럴 거예요. 선수들과 있다 보면 나이를 잊게 돼요. 그러다 기사를 볼 때 제 이름 옆에 붙어있는 나이를 보고 새삼 실감하게 되고요.”
미들즈브러에서 돌아와 성남 일화에 몸 담았던 이동국은 그때 비해 지금은 훨씬 안정을 찾았다고 한다. 다른 무엇보다도 안정감 있게, 동료 의식을 느끼며, 그리고 감독과 소통이 되는 팀에서 뛰고 있다는 사실에 감사하다는 말도 덧붙였다. 성남 일화에서 적잖이 마음 고생을 한 흔적이 역력했다. 이동국은 성남에서 2골 2어시스트를 기록했다.
“성남은 팀 자체가 용병 위주로 돌아갔어요. 센터포워드가 중심 역할을 하는 게 아니라 볼을 잡으면 재빨리 용병에게 건네주는 게 제 임무였어요. 용병들 몸 상태가 좋지 않았는데도 불구하고 교체하지 않고 게임이 진행되는 상황에서 제 플레이를 한다는 게 쉽지 않았어요. 변명으로 들려도 어쩔 수 없습니다. 성적만 놓고 말한다면 더더욱 할 말이 없겠죠. 그러나 성남에선 이동국이 없었어요. 그런 걸 원하지도 않았고.”
이동국은 자연스레 성남 일화 때의 얘기를 꺼냈다. 아마 지난 시즌 성남 일화가 우승을 하지 못하자 모든 원인을 이동국의 부진으로 내몰았던 여론과 팀의 반응들이 그에게 큰 상처를 줬던 모양이다.
“물론 제가 좋은 경기를 보여드리지 못한 부분도 있어요. 그러나 그 배경을 살피지 않고 단순히 나타난 성적만 놓고 평가받는 게 좀 억울했습니다. 구단 자체에 실망감도 느꼈고 그 우승 못한 원인을 제가 다 껴안아야 한다는 것도 화났어요. 솔직히 (성남 측에) 배신감을 느낄 정도였어요. 우승 못한 게 왜 제 탓만 됩니까? 당시 너무 괴롭고 힘들어서 처음으로 축구를 그만둘 생각까지 했어요. 결정적일 때 부상으로 엎어져서 월드컵에 나가지 못했을 때도 하지 않았던 생각을 그때 처음 했던 거죠.”
신태용 감독이 새로 부임해서 팀을 재정비하는 상황이었지만 이동국은 이미 성남에서 마음이 떠나 있었다고 한다. 신 감독이 잡았다고 해도 남지 않았을 것이라고 덧붙였다.
이런저런 과정을 거쳐 가까스로 전북 현대 유니폼을 입고 최강희 감독을 만난 날, 이동국은 가슴으로 울었다. 최 감독한테서 따뜻한 정을 느꼈던 것이다. 당장 어떤 성적을 기대하기보단 마음의 여유를 갖고 경기를 하면서 컨디션을 끌어 올리라는 배려가 이동국의 마음을 움직였다.
“전에는 경기를 뛰어보지 못했어요. 시즌 전까지 연습할 팀도 없었어요. 실전 경험이 없는 상태에서 시즌에 들어갔으니 여러 가지 무리수가 나왔겠죠. 여기선 일단 게임을 뛰게 해줘요. 게임을 뛰면서 몸을 끌어올리라는 게 최 감독님의 판단이시거든요. 선수 입장에선 경기 감각이 중요해요. 무조건 쉰다고, 경기력이 늘어나는 건 아니니까.”
프로 입단 후 지금까지 다섯 팀의 유니폼을 입어봤다고 한다. 가장 설레었던 유니폼이 프로 첫 발을 내딛은 친정팀 포항이었단다.
“열여덟 살에 프로에 진출했어요. 고3 때 제 이름이 박힌 포항스틸러스 유니폼을 받게 된 거예요. 꿈인가 생시인가 싶었죠. 고향팀인 데다 그 팀에 들어가려고 정말 죽기살기로 운동했었거든요. 그 유니폼 받아놓고 잠을 이루지 못했잖아요. 등번호 33번. 이동국의 첫 유니폼이었어요.”
▲ 숱한 고통과 좌절을 겪은 프로 12년차 이동국이 전북 현대에서 다시 한 번 축구 인생의 ‘봄날’을 맞고 있다. | ||
“만약 지금처럼 인터넷이 활성화됐더라면 우리 셋은 많이 변해 있었을 거예요. 나쁜 면보단 좋은 점이 더 많았겠죠? 의식하면서 조심했을 테니까. 사실 트로이카 이런 건 언론에서 만든 거잖아요. 실제로 우리들은 크게 신경 쓰지 않았어요. 단, 항상 잘해야 한다는 부담은 있었죠. 그중 한 사람이라도 뒤처지면 바로 기사가 나왔으니까.”
선수 생활을 일찍 접은 고종수에 대해서도 남다른 회한을 갖고 있었다.
“모든 게 부상 때문이죠. 부상만 없었더라면 그렇게 일찍 그만두지 않았을 거예요. 같은 선수로서 안타깝죠. 저 또한 부상과는 악연이었잖아요. 지금 이 상태에서 또 부상당하면 선수 생활하는 데 큰 영향을 미칠 거예요. 그래서 항상 두려워요. 그 부상이.”
이전 기자와의 인터뷰에서 이동국은 안정환이 부럽다고 말한 적이 있었다. 당시 2002년 월드컵 이후 엄청난 인기몰이를 하고 있는 안정환과 대표팀에서 다시 만났는데 안정환의 명성에 은근 기가 죽어 자신만의 플레이를 할 수 없었다는 고백과 함께였다. 그 얘기를 다시 꺼냈더니 슬쩍 미소를 내비친다.
“자신감이 없었죠 그땐. 자신감이 있었다면 그런 생각을 안 했을 거예요. 그래서 사람 사는 게 재밌는 것 같아요. 돌고 돌아가는 거니까.”
이동국만큼 결정적인 순간에 부상을 당하거나 수술을 받고 얽히고설킨 축구 인생을 이어가는 선수가 몇 명이나 될까. 그래서인지 이동국과의 인터뷰를 준비하면서 질문 내용이 이전의 아픈 부위를 건드리는 게 대부분이라 살짝 당황하기도 했다.
“사람들이 절 보면 ‘제발 좀 잘 되라’고 말씀하세요. 제가 많이 불쌍해 보이나 봐요. 재기했다고, 완벽히 부활했다고 믿었는데 진짜 죽을 것처럼 쓰러진 적도 있잖아요. 하지만 계속 올라가기만 하는 인생이라면 재미없을 거예요. 올라가다가 태클에 주저앉기도 하고 다시 올라가려고 아등바등대기도 하고. 절 불쌍하게만 보지 마세요. 고통과 좌절 속에서 희망의 끈을 놓지 않고 여기까지 왔잖아요. 지난 시즌 마치고 잠시 흔들리긴 했지만 그래도 나름 즐겁게 살았다고 생각해요.”
이동국은 자신의 성격이 긍정적인 편이라 나락으로 떨어졌을 때도 그게 마지막이라고 생각하지 않았다고 한다. 히딩크 감독의 부름을 받지 못하고 독일월드컵 직전에 부상을 당해 목발을 짚고 독일을 향했을 때도, 남들은 ‘이동국은 이제 끝이다’라고 생각했지만 자신은 ‘꼭 다시 일어선다’라고 마인드 컨트롤을 했었다는 것. 그런데 지난 시즌 처음으로 축구공이 싫어졌고 공을 차는 의미가 없어졌다는 아픔을 안게 됐다고 다시 ‘그 얘기’를 꺼낸다.
“몸을 다치면 고치면 되잖아요. 그런데 마음을 다치면 회복하기가 굉장히 힘들어요. 말로써 공격하는 것, 인격적인 모독을 당하는 것, 이런 건 당해보지 않고선 그 기분을 절대로 몰라요.”
이동국은 미들즈브러에서 보낸 1년반 가량의 생활에 대해서도 담담히 털어 놓았다. 사람들은 쉽게 프리미어리그 진출을 ‘실패’로 결론짓는데 정작 당사자는 그 ‘실패’ 속에서도 가능성과 수확을 얻어냈다.
“한국으로 돌아오기 6개월 전부터 많은 생각을 했었어요. 나이가 있다 보니까 이젠 대우를 받을 수 있는 팀에서 뛰어야 하는 게 아닌가 싶었죠. 5분 뛰려고 벤치만 덮이고 있는가하면 아예 경기를 뛰지 못한 날도 많았고요. 스물아홉 살의 나이에 이런 생활을 하려고 여기에 온 건 아니지 않나 하는 생각들이었죠. 그래서 그 후론 정을 떼려 했어요. 축구가 의지로만 되는 게 아니라는 것도 절감했고요. 몸이 완벽한 상태라고 믿었는데 경기 감각은 떨어져 있었던 거예요. 가족이 없었다면 견뎌내기 힘들었을 겁니다. 쌍둥이들 덕분에 괴로움을 괴로움으로 느끼지 않았어요.”
이동국은 프리미어리그에서의 경험이 나중에 지도자 생활할 때 큰 도움이 될 것 같다고 말한다. 그 말 속에서 은퇴 후 이동국이 계획하고 있는 행보를 엿볼 수 있었다.
“일부러 지도자 연수 받으러 나가는 사람도 있는데 거기서 선수로 뛰면서, 또 게임을 뛰지 못하고 보고 느끼면서 소중한 경험을 했던 것 같아요. 사람들은 저한테 ‘실패’를 인정하길 바라지만 전 미들즈브러에서의 생활이 실패라고 생각하지 않아요.”
대표팀에 회한이 많은 선수다. 그래서 ‘혹시’ 2010남아공월드컵에 대해 기대를 갖고 있는지 궁금했다. 이동국은 주저 없이 이렇게 말한다.
“대표팀 경기는 유독 관심 있게 봐요. 미련이 있어서 그런가? (웃음) 같이 뛸 수 있다면 좋겠죠. 저한테 월드컵은 98년 프랑스월드컵밖에 없잖아요. 남아공월드컵은 제 축구인생에 마지막이 되겠죠? 마지막이니까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은데 그런 기회가 주어질지 모르겠어요. 시작도 중요하지만 마지막도 중요하잖아요.”
결코 대표팀에 대해 관심 없다는 말을 하진 않았다. 월드컵 하면 악몽만 떠오를 법한데 여전히 ‘월드컵’은 이동국의 심장을 움직이는 키워드였다. 마지막으로 이런 우문을 던졌더니 현답이 들려온다.
“이동국의 봄은 언제일까요? 봄이 오긴 왔었나요?”
“지금이 봄이잖아요. 밖에 날씨 아주 좋아요. 하하.”
이영미기자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