박진만, 2000경기 출장 7경기 앞두고…꿈은 부상과 함께 사라지다
KBO가 매년 발행하는 공식 레코드북에는 수많은 기록이 담겨 있다. 팀, 투수, 타자 기록은 물론 홈런, 끝내기, 신인, 외국인 선수 기록까지 자세히 분류돼 있다. 항목마다 또 최초, 마지막, 최고령, 최연소, 최다, 최소 기록 등으로 다양하게 나눠진다. 한 경기가 끝나고 한 시즌이 끝날 때마다, 누군가의 통산 기록이 늘어나고 새로운 기록이 작성된다. 그 과정을 지켜보면서 함께 울고 웃는 것은 야구팬만이 누릴 수 있는 권리이자 축복이다. 야구의 역사를 만들어 가는 기록들은 그래서 숫자 그 이상의 가치를 지닌다.
# 기록에 도전하는 선수들
수많은 선수가 프로야구를 거쳐 갔다. 그러나 레코드북 한 페이지에 이름을 남기는 행운을 잡은 선수는 그리 많지 않다. 그래서 선수들은 기록으로 스스로의 가치를 증명하기 위해 열심히 던지고 치고 달린다.
박한이는 올해 16년 연속 세 자릿수 안타와 역대 6번째 통산 2000안타에 동시 도전한다. 사진제공=삼성 라이온즈
넥센 신재영은 올해 데뷔전 이후 최다 연속 선발승 기록에 도전했다. 종전 기록은 kt 트래비스 밴와트가 SK 시절 달성한 5경기. 그러나 개막 다섯 번째 등판에서 첫 패전을 안아 무산됐다. 같은 경기에서 데뷔 후 최다 연속 이닝 무볼넷 행진도 30.2이닝으로 마감했다. 그는 “아쉽기도 했지만 차라리 홀가분했다”고 했다. 대신 그 과정에서 기록에 도전하고 기록의 주인공이 되는 즐거움을 알았다. 늦깎이 신인인 그에게는 값진 경험이다. 그는 “올해 역대 한 시즌 최소 볼넷 기록(2015년 LG 우규민·17개)에 도전해보고 싶다”며 “가능하다면 한 자릿수 볼넷까지 노려보겠다”고 했다.
# 기록의 문턱에서 좌절한 선수들
못다 세운 이정표는 두고두고 기억에 남는다. 더 이상 기회가 없는 은퇴 선수에게는 더 그렇다. 강성우 삼성 배터리코치는 여전히 ‘포수 1000경기 출장’을 못 채운 게 못내 아쉽다. 딱 46경기만 남겨두고 2004년 SK에서 유니폼을 벗었다. 강 코치는 “1000경기를 뛴 포수가 역대로 몇 명 없다. 그래서 꼭 하고 싶었다”고 했다. 그러나 선수 생활 말년에 김동수, 박경완과 한솥밥을 먹었다. ‘제3의 포수’가 설 자리는 많지 않았다. 스스로 “내가 ‘스페어 타이어’가 된 느낌이었다. 아쉽긴 했지만, 물러나는 게 맞았다”고 털어 놓았다.
박진만은 통산 2000경기 출장까지 불과 7경기를 남기고 부상으로 은퇴했다.
정민철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1990년대 최고의 투수 가운데 한 명이었다. 그런 그도 이강철 넥센 수석코치가 보유한 10년 연속 두 자릿수 승리 기록에 두 시즌 못 미쳤다. 그는 “연속 시즌 10승 기록을 8시즌(1992~1999년)에서 마감한 것과 한 번도 다승 1위에 못 오른 것이 가장 아쉬움으로 남는다”고 했다.
장성호 KBSN스포츠 해설위원도 양준혁 MBC스포츠해설위원이 남긴 통산 최다 안타 기록에 도전장을 내밀었지만, 남은 안타 218개의 꿈을 이루지 못하고 은퇴했다. 양 위원은 2318안타, 장 위원은 2100안타로 이 부문 12위에 올라 있다. 장 위원은 해태와 KIA에서 뛰던 전성기 시절 ‘스나이퍼’라는 별명으로 불리면서 엄청난 안타를 생산해냈다. 역대 최연소 2000안타의 주인공이다. 그러나 2010년부터 한화, 롯데, kt를 차례로 거치면서 야구 인생의 부침을 겪었다. 장 위원은 “젊은 선수들에게 더 많은 기회를 주기 위해 스스로 은퇴를 결심했다”며 “이제 해설로서 새로운 꿈을 펼치겠다”고 했다.
# 기록으로 깨닫는 레전드의 가치
기록은 오래 묵을수록 가치가 높아진다. 한 선수의 이름이 그만큼 역사의 한 페이지에 오래 남아 있었다는 의미다. 한 시절을 풍미한 레전드 스타가 다시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순간은 청출어람의 후배가 그 기록을 넘어설 때다.
이종범 MBC스포츠플러스 해설위원은 2014시즌 막바지에 하루가 멀다 하고 인터뷰 요청을 받았다. 넥센 서건창이 역대 최초로 한 시즌 200안타의 위업에 도전하던 시기였다. 이 위원은 1994시즌 안타 196개를 때려내 이전까지 역대 한 시즌 최다 안타 기록 보유자였다. 서건창이 그 기록을 20년 만에 깼다. 이 위원은 “기록이 깨진 아쉬움보다는 서건창 덕분에 내 예전 활약이 다시 조명돼 고맙게 생각했다”며 “같은 해 기록했던 84도루도 언젠가 다른 후배가 깨줬으면 좋겠다”고 바랐다.
한대화 KBO 경기감독위원도 매년 개막전이 열릴 때마다 여러 기사에 이름이 오르내리는 인물이다. 역대 개막전 최다 홈런을 비롯해 개막전과 관련한 각종 기록을 여러 개 남긴 덕분이다. 한 위원은 “개막 즈음만 되면 기자들 전화가 참 많이 온다”며 웃었다.
올해는 윤성환(삼성), 김광현(SK), 장원준(두산)이 차례로 통산 100승 고지를 밟았다. 역대 100승 투수들도 재조명을 받았다. 정민철 위원도 그 가운데 한 명이다. 정 위원은 “역대 최연소 100승도 좋지만, 오른손 최다승 투수라는 타이틀을 가장 자랑스럽게 여기고 있다”며 “나중에 윤성환 투수라면 내 기록을 넘어설 수 있을 것 같다. 그때 나도 다시 거론되는 영광을 누릴 수 있지 않을까”라고 했다.
반면 불명예 기록으로 인해 ‘잊힐 권리’를 찾고 싶은 선수들도 있다. 유지훤 두산 코치는 OB 시절이던 1983년 7월 12일 대구 삼성전 첫 타석부터 8월 6일 구덕 롯데전 첫 타석까지 47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했다. 그 기록은 무려 32년간 최장 기록으로 남아 있다가 지난해 NC 손시헌에 의해 깨졌다. 2014년 10월 6일 잠실 LG전부터 2015년 4월 11일 마산 SK전 두 번째 타석까지 48연타석 무안타를 기록했기 때문이다. 당시 손시헌의 기사가 나올 때마다 유 코치의 이름과 기록이 자동으로 따라 붙었다. 유 코치는 “꼭 기사 뒤에 그렇게 한 줄 붙여야 하느냐”고 짐짓 취재진에 항의하기도 했다. 그러나 그렇게 오랜 기간 안타를 치지 못하면서도 경기에 꾸준히 나섰다는 것 자체가 그 선수의 팀 내 존재감을 역설적으로 증명한다. 유 코치도 “손시헌이 그만큼 팀에 중요한 선수라 경기에서 뺄 수 없었다는 의미가 된다. 꼭 나쁜 기록으로만 보지 말았으면 좋겠다”고 했다.
# 기록 도전에 뒤따르는 부담감의 덫
고통이 없으면 얻는 것도 없다고 했다. 값진 기록일수록 더 큰 부담감이 따른다. 기록은 그 압박감을 이겨낸 선수들에게 주어지는 훈장이다.
LA 다저스 류현진은 한화 시절 2009년과 2010년에 걸쳐 29경기 연속 퀄리티스타트를 해냈다. 특히 2010년에는 개막 이후 23경기에서 연속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하면서 단일 시즌 세계 기록을 작성했다. 퀄리티스타트 기록을 집계하기 시작한 1952년 이후 밥 깁슨(1968년), 크리스 카펜터(2005년·이상 세인트루이스)가 22경기 연속 성공한 게 종전 최다 기록이었다. 당시 류현진은 “올 시즌 전 경기에서 퀄리티스타트를 하는 게 목표”라고 했다. 그러나 23경기 기록 달성 직후인 그해 8월 26일 목동 넥센전에서 끝내 연속 퀄리티스타트 행진이 중단됐다.
류현진은 이듬해 “지난해 못다 이룬 기록에 재도전할 생각은 없느냐”는 질문을 받았다. 곧바로 고개를 세차게 가로 저었다. “기록이 계속되는 동안 정신적인 피로도가 무척 심했다. 그런 부담 없이 매 경기 투구에 충실하면서 시즌을 보내고 싶다”고 토로했다. 강심장을 자랑하는 천하의 류현진도 대기록의 무게감을 감당하기가 쉽지만은 않았다.
류현진은 2010년 한화 시절 개막 이후 23경기에서 연속 퀄리티스타트에 성공하면서 단일 시즌 세계 기록을 작성했다.
황재균은 지난해 햄스트링 부상을 당하고도 꾹 참고 경기에 나섰다. 그 과정에서 슬럼프에 빠지면서 비난을 받기도 했고, 스스로도 몸과 마음 모두 고생했다. 그래도 지켜냈을 만큼 이 기록에 애착을 느꼈다. 그러나 이제는 모든 걸 훌훌 털어 버렸다. 황재균은 “기록 때문에 아픈 몸으로 출전 욕심을 부려서는 안 된다고 생각한다. 팀에 피해가 될 수 있다”며 “연속 경기 출장이 아닌 좋은 성적으로 인정받고 싶다”고 했다.
# 기록과 성적 사이, 감독들의 딜레마
선수만 기록을 의식하고 고민하는 게 아니다. 감독 역시 선수의 개인 기록과 팀 전체의 큰 그림 사이에서 갈등할 수밖에 없다. 누구도 결론을 쉽게 내릴 수 없는 문제이기도 하다.
김경문 NC 감독은 지난해 5월 26일 마산 두산전에서 3연타석 홈런을 쳤던 외국인 타자 에릭 테임즈를 7회 교체했다. 테임즈는 만루홈런~3점홈런~솔로홈런을 때려낸 상태였다. 2점홈런 하나만 더 친다면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에서도 전무후무한 ‘사이클링 홈런’ 기록을 작성할 수 있었다. 사이클링 홈런은 선수가 타구를 담장 밖으로 넘기는 것 이전에 주자 상황까지 완벽하게 갖춰져야 달성할 수 있다. 하늘이 도와야 가능하다는 얘기다. 1998년에 마이너리그 더블A에서 한 차례 나온 게 전 세계 야구 역사에서 유일한 케이스로 기록돼 있다.
그러나 김 감독은 스코어가 13-0으로 크게 벌어지자 7회초 수비부터 테임즈 대신 백업 내야수 조평호를 투입했다. 사이클링 홈런과 한 경기 4연타석 홈런 기록 도전이 모두 멈췄다.
김 감독도 물론 개인 기록의 소중함을 알고 있다. 그러나 교체를 강행한 이유는 분명히 있다. 눈앞의 기록에 매진하다 더 큰 후유증을 낳을 수 있다는 것이다. 김 감독은 “테임즈가 대기록을 의식한 나머지 스윙이 커져 자칫 타격 밸런스가 흐트러질까 염려했다. 또 점수차가 커서 모처럼 1군에 올라온 조평호에게도 경기 감각을 끌어 올릴 기회를 주고 싶었다”고 했다.
실제로 김재박 KBO 경기감독위원 역시 현대 사령탑 시절인 2000년에 같은 판단을 내린 적이 있다. 박경완이 그해 5월 19일 대전 한화전에서 2회, 3회, 5회, 6회에 모두 홈런을 때려내 역대 최초의 4연타석 홈런 기록을 작성했을 때다. 5연타석 홈런 역시 메이저리그와 일본 프로야구도 없는 기록이다. 그러나 김 감독 역시 19-2로 스코어가 벌어진 8회초 수비에서 박경완을 교체했다. 주전 포수인 박경완의 체력 안배도 필요했고, 무엇보다 크게 지고 있는 상대팀에서 홈런 4개를 친 박경완에게 빈볼을 던질 것을 우려해서다.
배영은 일간스포츠 기자
불멸의 기록들 이종범, 한시즌 84도루…‘깰 테면 깨봐~’ 프로야구 역사가 1년씩 쌓여갈수록, 많은 기록의 주인공들도 하나씩 바뀌어 간다. 불가능할 것만 같았던 통산 200승(한화 송진우)과 한 시즌 200안타(넥센 서건창), 통산 400홈런(삼성 이승엽) 기록마저 주인을 찾았다. 그럼에도 앞으로도 한동안 깨지기 어려울 것만 같은 ‘불멸의 기록’들은 분명히 존재한다. 주로 프로야구 팀 운영 시스템이 지금처럼 정착되기 이전에 나왔던 초창기 기록들이다. MBC 백인천이 1982년 80경기 체제에서 달성했던 4할 타율(0.412), 삼미 장명부가 1983년 무려 60경기에 등판하면서 쌓아 올린 한 시즌 30승과 선발 28승, 해태 선동열이 367경기에서 1647이닝을 던지면서 기록했던 통산 평균자책점 1.20 등이 대표적이다. 1990년대 들어서는 1994년 해태 이종범이 해냈던 한 시즌 84도루가 대표적인 난공불락 기록으로 꼽힌다. 그러나 야구 관계자들은 우스갯소리로 “역대 최소 시간 경기 기록이야말로 영원히 깨지지 않을 것”이라고 농담하곤 한다. 1985년 9월 21일 구덕구장에서 열린 롯데-청보 전은 1시간 33분 만에 롯데의 3-0 승리로 끝났다. 이 경기를 두 번 진행해도 고작 3시간 6분. 올 시즌 10개 구단 가운데 경기 평균 시간이 가장 짧은 SK가 3시간 12분을 기록하고 있다. 심지어 1991년 5월 1일에는 대전구장에서 OB와 빙그레가 연장 12회 경기를 1시간 41분 만에 끝냈다. 스코어는 4-3으로 빙그레의 승리였다. 이 경기 역시 두 번(3시간 22분) 치러도 한화의 올 시즌 평균 경기 시간(3시간 41분)보다 짧다. 팀 한 시즌 최다승과 최다연승 기록도 엄청나 보인다. 현대는 2000년 133경기에 체제에서 91승 2무 40패(승률 0.695)를 기록해 역사상 유일한 90승 팀으로 남아 있다. 그 다음 최다승이 빙그레가 세 차례 기록한 81승이다. 올해 144경기를 치르는 두산이 이 기록에 도전장을 내밀고 있다. SK는 김성근 감독 시절인 2009년 8월 25일 문학 두산전부터 2010년 3월 30일 잠실 LG전까지 무려 22연승(1무 포함)을 달렸다. 가히 2000년대 후반 최강의 팀. SK는 2010년 22연승이 끊긴 뒤 다시 4월 14일 대전 한화전부터 5월 4일 문학 넥센전까지 16연승을 한 차례 더 했다. 1986년의 삼성과 함께 역대 두 번째 최다 연승 공동 기록이다. [은]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