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야구란 놈이 종종 배신 때려요”
▲ 요즘 추신수의 병역문제가 뜨거운 관심사다. 그러나 추신수 본인은 병역혜택 얘기가 자꾸 거론돼 마음이 불편하다고 한다. 홍순국 메이저리그 사진 전문 기자 | ||
클리블랜드에선 1년에 한 번씩 ‘패밀리 데이’ 행사를 엽니다. 원정 경기에 선수단 전체 가족들이 참가해서 함께 원정을 떠나는 것이죠. 이번에 시카고 컵스와의 원정 경기는 이렇게 ‘패밀리 데이’ 행사로 시작됐습니다. 지난 시카고 화이트삭스전에 와이프와 무빈이를 동행했던 저로선 또다시 시카고로 가족 여행을 떠난 셈이네요. 가족들이 동행하다보니 비행기는 물론 이동하는 버스까지 시끌벅적합니다. 한국의 문화에선 상상할 수 없는 일이겠죠? 솔직히 야구 경기를 하러 가는지, 가족들끼리 여행을 가는 건지 구별이 잘 안 됩니다^^.
요즘 야구가 자꾸 어렵다는 생각이 들어요. 해도 해도 그 속을 알 수 없는 게 야구입니다. 얼마 전 우리 팀의 벤 프란시스코가 라커룸에서 전날 경기를 틀어 놓고 혼자 고민하는 모습을 엿볼 수 있었습니다. 원래 잘 치는 선수인데 최근 몇 경기에서 부진한 성적을 내다보니 혼자서 속앓이를 많이 했던 모양이에요. 그래서 제가 이런 조언을 했습니다. “지난 번에 못했던 경기는 보지 말아라. 잘했던 경기만 봐라. 근심에 쌓여 있다고 좋은 성적을 내긴 어렵다. 훌훌 털고 내일을 준비하는 게 훨씬 바람직하다”는 말만 앞서는 내용이었어요.
벤 프란시스코는 저한테 진심으로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지만 그 말을 하고 돌아서는 순간, 과연 나라는 사람이 그런 말을 할 자격이 있나 싶었습니다. 야구가 안 될 때는 숨 쉬기조차 괴롭고 야구장 나가는 게 너무 힘들며 선수들과 말도 하고 싶지 않을 정도라는 걸 제가 어찌 모르겠습니까. 저 또한 미국 진출 후 야구를 잘한 날보다 못한 시간들이 훨씬 많았고 벤 프란시스코처럼 지난 경기 비디오를 보고 또 보며 혼자서 가슴 쥐어뜯었던 경험이 한두 번이 아니었으니까요.
그래도 전 야구장에서 괴로운 시간을 보내고 돌아가면 절 따뜻하게 맞아줄 아내도, 아들도 있지만 벤 프란시스코는 그런 환경이 아니니까 제가 힘들었던 것보다 더 고통스런 시간을 보냈을 거라고 생각됩니다.
야구처럼 생각을 많이 하게 하는 종목도 없는 것 같아요. 쉽게 될 것 같고, 조금만 노력하면 얽히고설킨 실타래가 풀리듯이 스르르 풀려갈 것만 같은데 그게 생각처럼 잘 되지가 않거든요. 잠 자는 시간을 빼놓고 오로지 야구만 생각하고 야구에만 애정을 쏟아도 그 ‘야구’란 놈은 종종 배신도 때리고 또 때론 넘치도록 사랑을 퍼주는 등 알다가도 모를 행동을 반복합니다.
▲ 추신수가 내야수 조시 바필드와 수비 훈련을 하고 있다. | ||
사실 WBC 대회에 출전할 때만 해도 국제대회 출전과 병역 혜택을 연결시키진 못했습니다. 해외에서 운동 생활을 하다보니 태극마크를 달고 선후배들과 어울려서 국가대항전을 벌인다는 사실 자체가 너무나 매력적으로 느껴졌고 병역 혜택 여부와 관계없이 태극마크가 부끄럽지 않을 정도의 실력을 선보이고 싶었습니다.
대표팀에 합류할 때부터 메이저리그의 규약 문제로 제 존재 자체가 너무 시끄러웠잖아요. 김인식 감독님을 비롯해서 코칭스태프, 그리고 다른 선수들한테 말도 못 꺼낼 정도로 죄송했고 미안했습니다. 다행히 꾸준히 기회를 주신 감독님의 믿음에 보답할 수 있었고 비록 준우승에 머물렀지만 후회없는 시간들을 보냈다고 생각하고 스프링캠프에 합류했습니다. 그런데 주위에서 자꾸 병역혜택 얘기를 거론했습니다. 처음엔 아무 생각이 없었던 저도 그런 얘기를 자주 듣다 보니까 ‘혹시나’하는 생각이 들긴 했었습니다. 그러나 그 부분은 누가 노력한다고 되는 게 아니기 때문에 잠시 흔들렸을 뿐 곧바로 잊고 시즌 준비에 몰입할 수 있었어요.
그런데 요즘, 저와 관련된 병역 혜택 문제와 군 입대 문제가 자꾸 거론되고 있어 조금은 마음이 불편합니다. 이 일기를 통해 확실히 밝히고 싶은 게 있습니다. 일단 제 병역 문제는 2010년까지 여유가 있는 걸로 알고 있어요. 그래서 2010년 시즌이 끝날 때까진 오로지 야구에만 집중하고 싶습니다. 그 전에 팀과 재계약 문제도 있고 또 다른 기회가 주어질 수도 있기 때문에 당분간은 야구 잘하는 추신수로만 존재할 계획입니다.
제 미래를 걱정해주시고 응원을 보내주시고 여러 형태의 격려의 메시지들…, 잊지 않고 소중히 간직하겠습니다. 지난 해까지만 해도 전 혼자 외롭게 메이저리그 무대에서 싸우고 있다는 느낌을 갖고 있었는데 올 시즌엔 한국의 많은 팬들이 응원을 보내주시고 있어 하루하루가 너무 신나고 마음이 꽉 차오르기만 합니다.
클리블랜드의 팀 성적만 받쳐 준다면 너무나 행복하겠지만 이 또한 제가 감당해야 할 몫이라고 생각합니다. 어려운 가운데 하나 둘씩 좋은 성적을 쌓아 올린다면 우리가 기대했던 열매를 맺을 수 있을 거란 기대도 저버리지 않았습니다. 그런 점에서 클리블랜드는 희망이 있습니다. 희망이 있기에 오늘도 전 타석에서 힘차게 방망이를 휘두릅니다.
시카고에서 추신수