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민 끝 ‘고’ 했는데 ‘노 태클’에 말렸네
▲ 지난달 24일 광주를 방문,‘광주·전남 미래와 경제 창립포럼’에 참석해 축사를 하고 있는 고건 전 총리. 연합뉴스 | ||
고 전 총리가 통합신당의 깃발을 세웠지만 아직 보이는 것은 깃대뿐 깃발도 보이지 않는다. 고 전 총리의 통합신당에 선뜻 몸을 실으려는 사람은 보이지 않는다. 고 전 총리의 신당이 과연 모습을 드러낼 수 있을 것인지 의문을 보내는 사람마저 늘고 있다. 고 전 총리는 지금 정치권과 물밑 접촉을 늘리면서 신당 창당 작업과 원탁회의 구성에 총력을 기울이고 있다. 과연 ‘고건 신당’은 언제쯤 어떤 모습으로 윤곽을 나타낼까.
정치권에서 바라보는 ‘고건 신당’에 대한 가장 큰 관심은 정치인의 참여규모다. 바로 이 문제가 신당의 성공 여부를 가름하는 관건이며 또 고 전 총리가 주저하는 이유이기도 하다. 정치인, 특히 얼마나 많은 현역의원이 ‘고건 신당’에 참여하느냐에 따라 ‘고건 변수’의 파괴력이 결정되기 때문이다. 그러나 아직 ‘누구다’하고 점찍을 사람이 그다지 보이지 않는다.
열린우리당 내에서 통합신당파를 중심으로 ‘선도탈당론’이 제기되고 있기도 하지만 아직 특별한 움직임은 없다. 열린우리당의 대표적인 고건파인 안영근 의원은 “생각처럼 쉽지가 않다. 공감을 표하는 의원들은 50여 명에 이르지만 대부분 행동에 옮기기를 주저하고 있다. 아직 상황을 더 관망하겠다는 입장이다”라며 “내년 봄이나 돼야 통합신당이 탄생하지 않겠나”라고 말했다.
민주당 내에서는 당장이라도 뛰쳐나갈 인사가 몇몇 보이지만 민주당내 사정도 만만치 않다. 고 전 총리의 최측근으로 불리는 신중식 의원은 “노무현 대통령의 ‘청와대 편지’ 때문에 열린우리당이 친노와 통합신당파로 갈려 싸우는 바람에 통합신당파의 디데이가 연기됐다. 열린우리당의 전당대회까지 단계적으로 (통합신당이) 진행될 것이다”면서도 아직도 “국회의원들이 지금 때를 기다리고 있지만 최대 100명까지는 참여할 것으로 본다”며 낙관하고 있다.
그러나 여기서 주의 깊게 살펴야 할 점이 있다. 고 전 총리 측이 주장하는 현역 의원 100명이라는 숫자는 ‘고건 신당’에 참여하는 숫자가 아니다. 말 그대로 통합신당, 즉 정계개편을 통해 여권이 핵분열과 이합집산을 거쳐 친노세력과 비례대표 의원들을 제외하고 결과적으로 범여권이 뭉쳐 창당할 통합신당에 참여할 숫자다. 그래서 고 전 총리 측도 “현재 고 전 총리가 추구하는 것은 ‘고건 독자신당’은 절대 아니다”라고 힘주어 말한다. ‘고건 신당’을 만들기는 하지만 그것 역시 여권의 통합신당으로 가기 위한 임시방편이라는 것이다.
따라서 고 전 총리가 현재 주력하고 있는 것은 ‘고건 신당’보다는 통합신당 추진을 위한 ‘원탁회의’ 구성이다. 참여하려는 현역의원들로서도 탈당의 위험을 감수하지 않아도 되고 고 전 총리 입장에서도 ‘원 오브 뎀’으로 동등하게 원탁에 둘러앉아도 유력한 대선주자인 자신이 스포트라이트를 받을 수 있기 때문이다. 또한 정치권에서 “숟가락 하나 들고 이 밥상 저 밥상 기웃거린다”는 비아냥을 불식시키기 위해 자신이 직접 ‘밥상’을 차려놓은 식인 것이다.
그렇다면 12월 중으로 출범시키겠다는 이 원탁회의에는 누가 참여하게 될까. 한 측근은 “원탁회의 멤버 구성은 거의 고 전 총리 혼자서 맡아 진행하고 있다. 열린우리당과 민주당 등 많은 사람들을 만난다는 말은 듣고 있지만 누구를 만나는지는 본인만 알 것”이라고 전했다. 고 전 총리는 열린우리당 문희상, 염동연 등 중진의원들과도 최근 만남을 가졌고 초재선 의원들도 가리지 않고 접촉하고 있다고 한다. 고 전 총리는 범여권 인사가 총출동한 지난 7일 ‘DJ 노벨평화상 수상 6주년 기념식’에도 얼굴을 내밀며 접촉 범위를 넓히고 있다.
김덕봉 공보특보는 “원탁회의는 중도실용주의에 동의하는 사람 누구에게나 열려있다. 숫자에도 제한은 없다. 정치인 중심으로 구성되겠지만 현역 의원의 숫자가 중요한 것은 아니다”라고 말한다. 고 전 총리 측 다른 핵심 인사는 원탁회의에 현역의원 10여 명이 참여할 것으로 내다봤다. 열린우리당 안 의원은 “원탁회의는 미래와 경제, 희망연대와 겹치지 않는 인물로 구성될 것이다. 1차, 2차, 3차 원탁회의를 단계적으로 진행하며 멤버를 더 확대시켜 나간다는 방침이다”라고 전했다. 이에 대해 민주당 신 의원도 “일단 소수 정예로 구성해 각 정파별로 대표할 수 있는 사람이거나 메신저의 역할을 할 수 있는 인물들이 참여할 것이다”라고 전했다. 하지만 원탁회의 멤버 면면에 대해서는 입을 닫았다. 고 전 총리 캠프 측의 한 실무자는 “솔직히 내부에서도 ‘원탁회의가 제대로 구성될까’하는 의문이 있었다. 하지만 고 전 총리가 워낙 자신감에 차있다. ‘나에게 맡겨 달라. 자신있다’라고 말하니 고 전 총리의 자신감에 기대한다”라고 말했다.
하지만 애초 정기국회가 끝나는 12월 중순에 원탁회의를 만든다는 구상은 다소간 차질을 보일 것으로 보인다. 지난 9일 정기국회가 끝나자마자 여야는 다시 임시국회를 15일까지 소집할 방침이다. 물론 열린우리당도 이때까지 공식적인 정계개편 논의는 자제하기로 했다. 고 전 총리 입장에서는 여의도의 정치상황과 함께 열린우리당과 민주당의 사정을 무시하기 어렵다. 당장에 분당 또는 해체될 것으로 내다봤던 열린우리당이 내년 3월 이전에 전당대회를 열어 당의 운명과 진로를 결정하기로 합의했다. 열린우리당 내 ‘당 사수파’와 ‘통합신당파’ 간의 본격적인 갈등이 이제 시작이고 넘어야 할 산도 많다. 또한 노무현 대통령이 해외 순방을 마치고 귀국한 후 벌어질 당내 복잡다단한 갈등의 전개가 예상된다. 열린우리당 창당 과정에 관여했던 한 중진 의원 측은 “당이 그렇게 쉽게 깨지지 않는다. 민주당에서 분당할 때 논의를 시작해 창당할 때까지 4개월이나 걸렸다. 그런데 지금은 지난 10·25 재보선 이후 논의를 시작했다. 정계개편이든 통합신당이든 본격적인 논의는 지금부터고 어떤 결과가 나올지는 더 두고 봐야한다”고 전했다. 그만큼 고 전 총리로서는 시간을 더 기다려야 한다.
뿐만 아니라 민주당도 열린우리당 못지않은 내홍을 겪고 있다. 민주당도 친한화갑 계열의 ‘독자생존파’와 친고건 계열의 ‘통합파’로 나뉘어 갈등 양상을 보이고 있다. 민주당 한화갑 대표는 지난 7일 배재대 특강에서 “우리나라 정당사에서 대선후보를 외부에서 영입해 성공한 사례가 없다”며 차기 대선에 도전하겠다는 뜻을 밝혔다. 아직까지는 열린우리당이나 민주당에 고 전 총리의 구심력이 작용하지 않고 있다.
고 전 총리 주변에서는 “먼저 당을 만들어 치고 나와 세를 불리라”는 주문도 많지만 섣불리 창당했다가는 현역의원들의 참여가 저조할 경우 자칫 지난 대선의 ‘정몽준 신당’처럼 껍데기만 남은 정당이 될 수도 있다. 고 전 총리 측의 한 전략통은 “고 전 총리가 자금과 조직이 없어 당을 만들기는 어려울 것이라는 의견이 많지만 창당은 그리 어려운 일이 아니다. 과거 정치를 생각하며 자금이 많이 필요할 것이라고 말하지만 예전과 달리 정당법이 많이 완화돼 지금은 당 만들기도 한결 쉬워졌다. 국중당도 창당하지 않았나. 또 민주당도 11석 가지고도 굴러가고 있다”고 전했다.
다만 통합신당 창당의 전 단계로 원탁회의 구성에 전념할 뿐이라는 것이다. 여러 가지 상황변수와 유동성을 가지고는 있지만 고 전 총리 측은 우선 “무조건 연내에 원탁회의를 구성한다”는 입장이다. 이 원탁회의도 아직 그 윤곽이 뚜렷치 않은 상태에서 신당을 논하는 것은 우물에서 숭늉을 찾는 격인지도 모르기 때문이다.
시간이 지날수록 내려가는 지지율, 신당의 ‘숙주’가 되어야할 열린우리당 신당파와 민주당 내부의 복잡한 사정, 과감하게 선뜻 내딛지 못하는 고 전 총리의 성격 등 고건 신당의 앞길은 첩첩산중이다. 과연 고건 신당은 탄생할 수 있는 것인지, 아니 그 전 단계로서 12월 중 원탁회의가 구성될 수 있을지 궁금증만 쌓이고 있다.
김지훈 기자 rapier@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