마약 재료를 “배앓이 특효약”으로…위험한 오해
양귀비 개화 시기를 맞아 경찰이 교묘하게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민, 마약상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사진은 새빨간 양귀비 꽃.
봄을 지나 여름으로 향하는 이즈음이다. 작은 꽃이 고개를 들고 주변을 붉게 물들인다. 6월은 양귀비꽃의 개화 시기다. 양귀비는 화려한 겉모습 속에 치명적인 독을 품고 있는 두해살이풀이다. 아름다운 꽃으로 눈을 멀게 하고, 마약의 원료로 쓰이면서 삶을 무너뜨린다.
최근 경찰은 양귀비 개화시기에 맞춰 단속을 피해 교묘하게 양귀비를 재배하는 농민, 마약상들과 숨바꼭질을 벌이고 있다. 일선 경찰서의 한 경찰 관계자는 “매년 5월 말에서 6월이면 양귀비 재배를 단속한다. 올해도 변함없이 전국 곳곳에서 적발되고 있다”고 말했다.
# 양귀비 숨바꼭질
“다 알고 왔습니다. 어디 있어요?” “이 양반이 정말, 잘못 짚으셨어요. 있어야 드리죠.” 충북의 한 마을, 기자가 동행한 단속 현장에서는 작은 실랑이가 벌어졌다. 경찰과 한 농민이다. 그는 경찰이 생사람 잡는다며 언성을 높였다. 그러나 경찰은 금방 집 마당에서 양귀비 재배 흔적을 찾았다. 서둘러 낫으로 줄기를 자른 것으로 보이는 양귀비 뿌리가 있었다. 경찰이 다그치자 그제야 농민은 태도를 바꿨다. “한 번만 봐 주세요. 제가 겁이 나서….”
경찰은 이날 조를 나눠 이 지역 일대를 뒤졌다. 단속에 걸린 주민은 대부분 앞서의 농민처럼 오리발을 내민다. 양귀비 20여 주를 키우다 적발된 또 다른 농민은 “바람에 씨가 날아왔다. 나는 모른다”고 발뺌했다. 그러나 경찰은 전형적인 변명이라며 반박한다. 단속에 나선 한 경찰 관계자는 “왜 잡초는 뽑으면서 양귀비만 고스란히 남겼냐?”고 되물었다.
경찰을 난처하게 만드는 농민도 있다. 고의성 여부를 판단하기 어려운 경우다. 한 집에서 키우는 양귀비는 다른 집과 달리 꽃잎이 여러 갈래로 쪼개져 있었고, 관상용 식물들 틈에 나란히 심어져 있었다. 적발된 주민은 “꽃이 이뻐서 키웠다. 꽃양귀비는 보통 양귀비하고 달라서 키워도 된다고 들었다”고 사정하다 이내 눈물을 보였다.
이웃에 사는 할머니는 멀리서 경찰을 보고 부랴부랴 집 뒤뜰의 양귀비를 뽑다가 현장에서 적발되기도 했다. 할머니는 “어이구 나 죽네”라며 바닥에 주저앉았다. 담 넘어 구경하던 이웃도 “할머니 잡아가지 마세요. 돌아가실지도 몰라요”라며 사정한다. 앞서의 경찰 관계자는 “처지는 이해하지만 양귀비는 종류에 상관없이 마약 성분이 똑같다”며 “형평성 문제도 있고, 그대로 두면 마약 전과자가 될 수도 있다. 가슴은 아프지만 고발하지 않을 수 없다”라고 말했다.
경찰에 따르면 적발되는 주민 대부분은 양귀비 효능에 대한 믿음이 확고하다고 한다. ‘약’으로 쓴다는 주장이다. 실제로 한 주민은 “속 아플 때 양귀비를 먹으면 특효약이다. 예전에는 집집마다 많이 먹었다”며 “빨간 양귀비는 효과가 없고, 흰 양귀비가 진짜”라고 귀띔하기도 했다.
하지만 경찰은 양귀비를 뿌리째 뽑아 압수한다. 적발된 농민들은 며칠 뒤 경찰서에 출두해야 한다. 20주 미만은 불입건, 20∼50주는 기소유예, 50주 이상은 기소처분 한다. 구속 사항에 해당되지만, 전문으로 재배하는 경우가 아니라면 불구속 상태에서 수사하기도 한다. 벌금은 경우에 따라 다르다. 100주 정도면 250만∼300만 원 정도가 떨어진다. 경찰은 불우한 가족사를 읊으며 눈물을 훔치는 앞서의 할머니에게 “걱정하지 마세요. 할머니는 양귀비 수가 적어서 벌금 안 내도 될 겁니다”라고 달래며 일으켜 세웠다.
단속이 끝나면 압수한 양귀비는 지역 보건소에 넘긴다. 보건소 직원들도 양귀비 단속을 하지만, 경찰처럼 많이 적발하지는 못한다. 보건소에 모아진 양귀비들은 수사가 끝난 후 검찰 입회 아래 남김없이 소각 처리된다.
# 파멸로 이끄는 달콤한 유혹
양귀비는 당나라 현종 때 나라를 흔든 미인 양귀비만큼 꽃이 예쁘다고 해서 붙여진 이름이다. 이집트에서는 기원전 1500년에 약으로 쓰이는 등, 인류가 알코올보다 더 먼저 복용해왔다는 기록도 있다. 열매 하나에 씨가 5000개가 있다. 자생력도 강해 어디서든 쉽게 자란다. 국내에서 재배되는 양귀비는 대부분 관상용인 개양귀비다.
반면 마약 성분이 있는 ‘파파베르 솜니페룸 엘’ ‘파파베르 세티게룸 디시’ 등 2종은 한 포기라도 재배하면 불법이다. 특히 이 2종의 줄기 끝에 달린 볼록한 열매가 익기 전 칼로 흠집 내면 액이 나오는데, 공기를 만나 산화하면 검은색으로 변한다. 이것이 바로 생아편이다. 아편을 정제하면 모르핀이 추출되고, 모르핀을 아세틸화하면 역사상 최악의 마약으로 꼽히는 헤로인이 된다.
양귀비 열매. 칼로 흠집을 내면 마약의 원료를 추출할 수 있다.
경찰이 양귀비 꽃이 피는 5∼7월 사이 전국적으로 특별 단속에 나서는 이유는 여기에 있다. 문제는 재배가 줄어들기는커녕, 오히려 재배 수법이 지능화되고 재배 지역도 광역화된다는 점이다. 경찰은 양귀비 불법 재배를 단속하려고 헬기로 저공비행하면서 산과 건물 옥상 등을 촬영하기도 하지만, 찾기는 쉽지 않다. 야산이나 밭에 비닐하우스를 설치해 마치 일반 농작물을 재배하는 것처럼 속이거나 꽃잎을 떼어 내 식별하기 어렵게 하는 등 ‘은폐술’도 나날이 발전하고 있기 때문이다.
지난 5월 전남 신안군에서 발견된 양귀비 1000여 주를 비롯해 지금까지 충남, 충북, 경기도 등 전국 각지에서 규모가 제법 큰 양귀비 재배장을 적발했지만, 경찰 관계자들은 “전부는 아닐 것”이라고 입을 모은다. 한 마약수사대 관계자는 “화단이나 상추밭에 은밀하게 심을 경우 집집마다 방문해야 적발이 가능하다”며 “종종 복장을 바꿔 입고 단속을 하기도 한다”고 말했다.
도심에서 적발되는 경우는 경찰의 경계 대상이다. 보통 건물 옥상이나 화단 등에 재배하다 적발되는 경우인데, 지역 특성상 ‘바람에 날려’ 자생하는 경우가 드물어 고의성이 크기 때문이다. 일부는 밀폐된 온실에서 열기구, 환풍기, 선풍기까지 갖춰 재배하기도 한다. 적발된 이들은 친분이 있는 유학생이나 해외여행 중 양귀비 씨앗을 몰래 반입하거나 국내서 밀거래를 통해 구입한다. 최근 몇 년 새 인터넷을 통해 국제우편으로 반입하는 사례도 늘고 있다. 재배법도 포털 사이트에 특정 키워드를 입력하면 쉽게 접할 수 있다.
앞서의 마약수사대 관계자는 “양귀비가 속 아플 때 좋다는 속설은 거짓”이라며 “시중에 나도는 복통 약에 비해 나은 것이 전혀 없다. 특효약이 아니다. 양귀비 자체를 대책 없이 복용하면 내성이 생겨 다른 약을 쓸 수 없게 되며, 아편에 중독될 경우 심하면 죽음에 이를 수도 있다”고 강조했다. 이어 “농지뿐만 아니라 도심 지역도 강력히 단속하고 있다. 알지 못하는 새 양귀비가 자생하고 있다면 자진신고를 하면 된다”고 말했다.
문상현 기자 moon@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