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인간에 대한 불신 생길 정도“ ”가해자와 학교서 마주칠 일이 없어야”
고려대학교 정경대 후문 게시판.
‘절친한 대학 동기 사이’가 가해자와 피해자의 관계로 변했다. 지난 13일 고려대학교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에는 3장의 대자보가 붙으며 학교 내외의 관심이 쏠렸다. 대자보의 내용은 9명의 남학생들로 구성된 모바일 메신저 대화방에서 지난 1년 동안 상습적으로 언어 성폭력이 일어나고 있다는 것이었다.
대자보에 의하면 이들은 ‘새따(새내기 따먹기)’, ‘보픈(여성의 성기와 오픈을 결합시킨 단어)’ 등의 단어까지 사용하며 장기간 동기와 선후배 여학생들에게 성희롱 발언을 지속해왔다. 또한 ‘지하철 몰카’를 공유하며 성적 대상화하기도 했다. 대화방에 올라온 사진에 대해 가해자들의 언어적 성폭력이 오가기도 했다.
이 사건은 대화방에 참여한 9명 가운데 언어 성폭력에 가담하지 않은 한 학생이 회의감을 느끼고 피해자에게 대화 내용을 전달하며 외부에 알려졌다. 피해자는 30여 명 정도였고 피해자 일부와 피해자 대리인으로 구성된 ‘고려대학교 카카오톡 대화방 언어성폭력 사건 피해자 대책위원회(대책위)’가 조직됐다. 대책위는 사건의 심각성에 공감하고 대자보를 게시했다.
페이스북 페이지 ‘정대후문 게시판’ 캡처.
피해자들은 가해자들과 모두 같은 과 학생들로 평소 친하다고 생각했던 사람들로부터 이런 일을 겪게 돼 깊은 배신감과 착잡함을 느꼈다고 호소했다. 하지만 이들은 화를 가라앉힐 새도 없이 대책 마련을 위해 움직여야 했다. 피해자 A 씨(여·21)는 “배신감이 컸고 화도 났지만 한편으론 학교에 이런 일을 해결할 특별한 제도나 단체가 없어 대책위를 신속하게 구성하느라 감정을 급하게 추스른 면이 있다”고 말했다.
성폭력의 가해자로 지목된 8명 가운데 일부는 교내 양성평등센터 서포터즈, 신입생 오리엔테이션 성평등 지킴이, 학과 내 페미니즘 소모임 등에 소속돼 있어 더 많은 이들의 공분을 샀다. 피해자 B 씨(여·21)는 “단순한 학우로서 수업만 같이 들은 것이 아니라 다양한 활동을 같이 했던 동기들이라 더 상실감이 크다”고 전했다.
최초로 제보를 받았던 B 씨는 “제보자로부터 처음 연락을 받았을 때 가해자들의 대화 수위가 너무 높아 어떤 조치든 취해야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고 말했다. 제보자와 B 씨는 이후 순차적으로 피해자들에게 연락을 했다. 두 번째로 제보를 받은 C 씨(여·21)는 “제보자 또한 우리와 가까운 사이다. ‘당사자는 알아야 할 것 같다’며 연락이 왔다”고 말했다.
A 씨는 제보자에 대해 “대화내용 전문을 확인해본 결과 문제될 만한 발언을 하지 않았다. 지금도 대책위에 많은 도움을 주고 있다는 정도만 말할 수 있다”며 조심스러워했다. 그는 “공론화된 사건이다 보니 온라인이나 학교 내에서 많은 말들이 오가고 있다. 가해자나 피해자뿐만 아니라 제보자에 대한 2차 억측도 자제해 줬으면 좋겠다”고 덧붙였다. 피해자들은 관련된 사람들의 신상이 알려지며 일어날 수 있는 2차 피해를 한 목소리로 경계했다.
가해자들의 구체적인 대화내용을 묻는 질문에 B 씨는 “피해자들이 공통적으로 문제가 있다고 느끼는 부분은 대자보에 인용했다”고 답했다. C 씨는 “모든 발언 하나하나가 놀라워서 하나를 집기가 어렵다”고 토로했다.
이들은 이번 사건을 겪은 충격으로 인간관계에 대한 어려움을 느끼기도 했다. C 씨는 “남성뿐만이 아니라 전반적으로 사람에 대한 불신이 생긴 것 같다. ‘앞에서는 잘해주지만 뒤에선 또 어떤 말을 할까’라는 의심이 생긴다”며 후유증을 호소했다.
또한 A 씨는 “가해자들에게 친구나 그냥 동등한 사람으로 받아들여진 게 아닌 ‘자신들 마음대로 이야기할 수 있는 여성’으로 받아들여졌다는 사실이 슬프다”고 말했다. 이에 B 씨는 “여성혐오 정서가 사라지기까지는 많은 노력이 필요하겠다는 생각이 들어서 착잡했다”고 더했다.
피해자 3명은 가해자들에게 취해졌으면 하는 조치에 대해 “가해자와 학교에서 얼굴을 마주칠 일이 없었으면 한다”며 “학교 차원에서의 징계가 내려지길 바라고 형사고소 또한 생각하고 있는 중”이라고 말했다.
가해자들에게 학과 학생회 차원에서 징계가 이뤄지기도 했으며 학과가 다른 일부 가해자는 해당 단과대에 관련 회칙이 없어 총학생회에 공조가 요청된 상태다. 또한 성피해에 대응과 상담을 제공하는 교내 양성평등센터에 신고가 접수됐다.
한편, 지난 15일에는 염재호 고려대 총장이 나서 사건에 대해 사과했다. 염 총장은 “교육철학에 위배되는 매우 심각한 사건이 벌어졌다”며 “충격과 실망을 느낀다”고 말했다. 이남호 고려대 교육부총장은 “대학에서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이 일어났다. 고려대학교에선 이 일을 엄중하게 다룰 것”이라고 밝혔다. 학교 측에서는 특별대책팀을 꾸려 진상 조사 이후 학칙에 따라 가해자를 처벌할 계획으로 전해졌다.
김상래 인턴기자 scourge25@naver.com
“솔직히 퇴학시켰으면…” “공론화된 게 다행” 학우들 반응 최초 대자보가 게시되고 이틀이 지난 15일, 고려대 정경대학 후문 게시판에는 여전히 많은 학생들이 몰려 사건에 대해 관심을 보이고 있었다. 특히 이날은 이른 아침으로 추정되는 시간대에 가해자들이 작성한 반성과 사과의 뜻을 담은 대자보가 붙기도 했다. 가해자들은 대자보를 통해 “혐의를 모두 인정한다. 처벌을 달게 받겠다”며 “언어 성폭력으로 피해자에 상처와 실망감을 남긴 점, 주변 지인과 학우 여러분께 충격과 불쾌감을 드린 점 진심으로 고개 숙여 사과드린다”고 밝혔다. 국문학과에 다니는 한 여학생은 “솔직한 심정으로는 퇴학처리가 됐으면 좋겠다”며 “앞으로 유사한 사건에 있어 좋은 선례를 남겼으면 한다”고 목소리를 높였다. 이 여학생은 다소 거리가 있는 건물에서 수업을 듣지만 대자보를 직접 눈으로 보기 위해 게시판을 찾았다. 그는 “솔직히 그동안 곪아 왔던 문제가 터진 것이다. 수위의 차이는 있겠지만 주변에서도 이와 비슷한 문제를 많이 봐왔다. 이번 기회에 공론화된 것이 잘 됐다고 생각한다”고 지적했다. 대자보를 지켜보던 한 경영학과 학생은 “여자 형제가 있는 입장에서 이해하기 힘든 행태”라고 비판했다. 그는 “가해자 8명 가운데 2명은 얼굴을 아는 정도의 관계다. 평소 활발하고 사교성이 있는 후배로 알고 있어 이번 일이 더욱 놀랍다”고 설명했다. [상] |