소 닭 보듯? 말이 필요없는 사이!
▲ 스카이바둑배 시니어 연승전에서 만난 조훈현(왼쪽) 9단과 서봉수 9단이 대국 전 서로의 눈길을 피하고 있다. | ||
조훈현과 서봉수. 두 사람이 공식대국에서 처음 만난 것은 1974년, 대한일보 주최 제2회 백남배 본선이었다. 조훈현이 이겼다. ‘백남’은 한양대 총장, 대한일보 사장을 지냈던 고 김연준 박사의 아호. 지금은 백남배도 대한일보도, 그걸 만든 사람도 모두 없다.
두 사람의 첫 타이틀 매치는 1974년, 백남배에서 만났던 그해 가을 제6기 명인전 도전5번기였다. 한국 바둑사에서 1974년은 조훈현의 타이틀 폭격이 시작된 해로 기록되어 있다. 조훈현의 첫 타이틀은 부산일보 주최 ‘최고위’였다. 조훈현의 타이틀 획득이 처음부터 ‘폭격’으로 불린 건 아니었다. 최고위를 시발로 이후 조훈현이 거침없이 타이틀을 휩쓸어 가는 것을 보고, 그 무풍질주의 기세에 놀란 사람들이 “저건 획득도 아니고, 쟁취도 아니고 폭격이다”라고 말하면서부터였다. 그렇다. 그것은 정말 폭격이었다.
명인전 도전기에서 둘이 맞닥뜨렸을 때 사람들은 조훈현이 이길 것이라고 했다. 그때는 일본이 바둑 최선진국이었다. 조훈현이 이길 것이라는 예상에는 최선진국에서 10년을 갈고 닦다가 돌아온 그에 대한 무의식적인 경외감이 담겨 있었다. 그러나 결과는 서봉수의 승리, 서봉수는 3승1패로 타이틀을 지켰다. 운명의 시작이었다.
이후 두 사람은 1990년대 초반까지, 그러니까 유창혁과 이창호가 등장해 둘의 자리를 대신하기 시작할 때까지, 20년을 지겹도록 싸웠다. 그 20년이 이른바 ‘조-서 시대’, 한국 바둑의 일대 중흥기였다.
8월 29일의 바둑은 두 사람의 362번째 대국으로 알려졌다. 엄청나다. 두 사람의 통산 대국수가 2000국에서 조금 빠지는 것으로 나와 있으니, 그렇다면 두 사람 평생 대국수의 5분의 1을 한 사람하고만 싸웠다는 얘기다. 그런데 사실은 362국도 넘는a다. 기념 대국 같은 것이 집계에서 빠졌기 때문이다.
1990년대 중반 이후 둘의 만남은 점점 뜸해졌다. 만나는 주기가 점점 길어졌다. 2000년대 들어와서는 8월 28일 대국을 포함해 불과 12국. 통산 전적에서 2.5 대 1이나 3 대 1 정도로 밀려 있는 서봉수가 2000년 이후에는 7승 5패로 앞서가고 있다. 2006년 이후 최근엔 3연승을 기록하고 있다. 그것과 함께 2006년부터 올해까지, 4년 동안 세 번밖에 만나지 않았다는 사실이 신기하게 느껴진다. 장강의 물결이 그렇게 흘러가고 있다.
8월 28일 만남에서도 두 사람은 지금까지 그래왔듯 인사는커녕 눈길을 마주치는 일조차 없었다. 대국이 시작되기 전, 조훈현은 눈을 감고 있었고, 서봉수는 허공을 쳐다보고 있었다. 바둑은 흑을 든 서봉수가 이겼다. 초반전에서 조훈현이 기선을 제압했다. 그러나 포석의 후반에 조훈현이 방향착오를 범하면서 흐름은 흑쪽으로 기울기 시작했다. 중반, 조훈현이 전세 만회를 노렸으나 서봉수는 밀리지 않았다. 거꾸로 더욱 세차게 맞받아치면서 조훈현을 코너로 몰아넣었다. 조훈현의 대마가 함몰했다.
서봉수는 요즘 ‘단순한 생활’을 지향하며 실천하고 있다. 권갑용 도장에 나가 날이 시퍼런 어린 연구생들과 겨루거나 인터넷에서 속기를 연습하는 것이 거의 전부다. 승부의 감을 잃지 않으려는 것. “나이를 먹어도 노력하면 는다”는 것은 그의 평소 지론이다.
조훈현은 계시 담당이 마지막 초읽기에서 “열!”을 셀 때까지 착점을 하지 않았다. 패배를 선언하는 대신 시간 초과 반칙패를 택한 것. 두 사람은 내일모레면 환갑이다. 그래도 아직도 ‘그대’에게만큼은 “졌다!”는 말은 할 수가 없는 것. 시간패를 당한 조훈현은 카메라맨과 기자들이 들어오기도 전에 번개처럼 자리에서 일어나 바람처럼 대국장을 빠져나갔다.
이런 정경을 자주 보는 팬들은 조훈현과 서봉수는 사이가 나쁘다고 말한다. 그러나 결코 그런 건 아니다. 서봉수는 “나의 스승은 조훈현”이라는 말을 여러 번 했다. 조훈현도 서봉수를 폄하하는 말은 한 적이 없다. 서봉수는 조훈현에게 ‘수’를 배웠고, 조훈현은 서봉수에게 ‘승부’를 배웠다고 한다. 그게 맞는 말이다. 다만 두 사람 모두 의례적인 인사 같은 것에는 애초에 관심도 소질도 없고, 그게 사람들의 눈에 사이가 좋지 않은 것으로 비쳐졌을 뿐이다. 그렇지 않은가. 오래간만에 만나 무슨 말을 할 것인가. 잘 지내냐? 아이들? 아파트 평수?
40년 라이벌이자 40년 친구. 지금도 만나면 긴장이 되는 상대. 그런 느낌, 그런 상태. 두 사람을 다 아는 사람들은 “두 사람의 이런 행동이 승부사답지 않으냐”고 말한다.
서봉수는 취재진의 축하를 받으며 활짝 웃었다. 인터뷰를 하는 동안 서봉수의 휴대폰 벨이 계속 울렸다. 생중계를 보던 팬들과 지기들의 축하전화였다.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