매서운 황사바람 돌부처가 막는다
▲ 삼성화재배 4강에 오른 콩지에 9단, 구리 9단, 치우쥔 8단, 이창호 9단(왼쪽부터)이 준결승전을 앞두고 악수를 하고 있다. | ||
한국은 이창호 박영훈 허영호 3명이 8강에 올라갔다. 중국 10명, 한국 5명, 일본 1명으로 16강이 결정된 시점에서 사뭇 비관적이었던 것에 비하면 선전한 결과였고, 특히 복병 허영호의 분전이 기대 이상의 성과라는 평가를 받았지만, 최철한이 또 다시 천야오예에게 패하면서 천적 관계를 청산하지 못한 것과 근래 회복세를 보이며 기대를 갖게 하던 송태곤이 중국의 정상급이 아닌 치우쥔에게 걸린 것이 아쉬움을 남겼다. 일본 서열 1위, ‘기성’ 타이틀 보유자인 야마시타는 말하자면 일본의 마지막 보루였는데 16강 무대에서 쓸쓸히 하차, 한-중의 벽을 실감하며 분루를 삼켰다.
그러나 한국도 8강전 후에는 분위기가 희망세에서 우려로 반전되고 말았다. 이창호 혼자 살아남아 이제 중국을 상대로, 1 대 3으로 싸우게 되었다. 콩지에와의 역대 전적에서 4전 전패를 기록하고 있던 박영훈은 “이번에야 설욕할 기회”라고 전의를 불태웠으나 단명국으로 패퇴, 5전 전패의 수모를 당했다. 허영호도 치우쥔에게 패퇴, 돌풍은 8강전에거 끝나고 말았다.
이창호-이세돌의 투톱과 신예 그룹을 연결하는 허리, 최철한과 박영훈이 번번이 중국 선수들에게 당하고 있다는 사실은 심각하다. 한국 프로바둑 오늘의 한 단면이라고 꼬집는 소리가 높아지고 있다. 이창호와 치우쥔, 구리와 콩지에의 대결로 짜인 4강 대진표 추첨 결과에 대해서는 이창호가 준결승에서 구리를 만나지 않은 것이 그나마 다행이라고 자조하는 소리도 있고, 이창호가 과연 이번에 ‘준우승 징크스’에서 벗어날 것인지 우려하는 소리도 있다. 이세돌 9단의 이름도 다시 한 번 들먹여지고 있다. 도대체 왜 이세돌 9단에게 승부 외적인 일로 상처를 주었느냐는 것. 동시에 이세돌 9단이 1년 반 휴직을 선언한 것은 경솔한 행동 아니었느냐는 얘기도 들린다.
어쨌거나 이세돌은 현재 없는 사람. 없는 사람을 놓고 왈가왈부해봤자 소용없는 것. 이창호를 믿어보는 수밖에. 이창호가 예전만 못한 것은 분명하지만, 그래도 이번 시리즈를 보면 뭔가 본인 스스로 심기일전하고 있다는 것이 느껴지니까. 무엇보다 예전에 우리를 놀라게 하고 즐겁게 해 주었던 ‘종반의 이창호’, 그 모습을 다시 보여 주고 있어 앞으로의 결과를 떠나 그게 우선 반갑다.
앞에서 말했듯 이번 삼성화재배는 지난 1988년 세계대회 출범 이후 100번째의 타이틀이다. 100번째라고 해서 상금이 더 많은 것도 아니고 특별히 더 명예로울 것도 없지만, 상징적 의미가 있는 것. 더구나 한국의 세계 정상 자리가 흔들리고 있는 지금, 이번 삼성화재배의 향방은 한-중 각축의 분수령이 될 수도 있는 것. 대회의 결과를 지켜보는 팬들의 시선에 불안의 그림자가 드리우고 있는 것도 바로 그래서다. 중국의 추월, 그게 설왕설래에 그치지 않고 마침내 현실로 나타나는 것 같아서 말이다.
구리를 비롯한 중국 선수들은 연일 즐거운 표정이다. 특히 구리의 경우 승패보다도 대진표가 화제가 되고 있다. 4명 1조로 겨룬 32강전에선 한국의 강동윤 9단과 중국의 신예 류싱 7단, 왕레이 6단과 대결했다. 같은 중국 기사 2명을 만난 데 이어 16강전에선 창하오, 8강전에서도 천야오예 등 계속 ‘동족’을 만났고, 4강전, 준결승에서도 다시 치우쥔, ‘아군’을 만난 것.
“세계대회 출전 이래 이런 경우는 처음”이라면서 구리는 고개를 흔들었다. 그럴 만하다. 그러나 마지막 결승에서까지 그렇지는 않을 것. “세계대회에서는 가능하면 외국 선수들을 만나는 것이 좋다”는 구리의 바람대로 마지막 한판에서는 이창호를 만날 확률이 높으니까.
이광구 바둑평론가