악어와 악어새? 이별땐 팩스 한장으로 쫑!
▲ 김태균(왼쪽)선수와 이범호 선수 | ||
FA와 돈을 언급할 때면 빼놓을 수 없는 직종이 있다. 바로 에이전트다. 한국프로야구는 근본적으로 에이전트 제도를 인정하지 않고 있다. 하지만 미국이나 일본으로 진출할 경우엔 현지 사정에 밝은 에이전트가 끼어드는 경우가 100%라고 봐도 무방하다. 김태균의 경우엔 일본인 에이전트를 두고 있고, 이범호는 임창용(야쿠르트)의 에이전트인 박유현 씨가 일을 봐주고 있다. 김태균은 최근 한 스포츠전문지와의 인터뷰에서 “내 에이전트는 일본인 한 명뿐이다. 내 에이전트라고 사칭하면서 일본 구단에 접근하는 사람들이 몇 명 있다고 하는데 절대 사실이 아니다”라고 말하기도 했다. 김태균이 굳이 인터뷰를 통해 에이전트가 한 명뿐이라는 걸 강조한 건, 어찌보면 에이전트 세계가 어떻게 돌아가는지를 간접적으로 보여주는 사례라고 할 수 있다.
벌써 7~8년 전의 사건이다. 당시 삼성 소속이었던 임창용은 구단 허락 하에 해외에 진출할 수 있는 자격(기본 7년)을 얻은 뒤 적극적으로 미국과 일본 구단을 노크했다. 얼마 후 각 언론사에는 팩스 한 장이 날아들었다. 임창용의 에이전트 중 한 명인 남 아무개 씨가 ‘공식 에이전트는 오직 나뿐이며 다른 에이전트들은 사기꾼’이라는 내용으로 보낸 것이었다. 대체 왜 이런 사건이 생겼을까.
기량이 뛰어난 선수가 해외 진출을 노릴 때면 에이전트가 여러 명 접촉해온다. 대부분 “도와주고 싶다”는 식으로 접근하기 때문에 해당 선수는 “고맙다. 알아봐달라”는 답변을 할 수밖에 없다. 이때까지만 해도 에이전트의 개념이 명확하게 정립되지 않은 시기였다. 도움을 주겠다고 하니 선수 입장에선 마다할 일이 없다. 그런데 중요한 건 그렇게 접촉한 인물들이 미국과 일본 구단에 저마다 “내가 저 선수 에이전트”라고 주장하며 일을 진행시키려 한다는 점이다. 결국 구단들도 혼란스러워하기 시작하고 선수 자체에 대한 신뢰를 잃게 된다.
임창용의 사례는 그런 혼란이 극에 달해 나온 결과였다. 급기야 남 아무개 씨가 언론사에 팩스를 보내게 됐는데, 나중에 알고 보니 임창용의 에이전트를 자처한 인물 가운데 남 아무개 씨가 가장 엉터리였다는 사실이 드러나는 해프닝으로 결론났다. 이처럼 체계적인 단일 창구가 형성되지 못하다보니 결국 임창용은 미국 진출에 어려움을 겪고 포기할 수밖에 없었다.
선수와 에이전트가 대체 어떤 식으로 계약을 맺고 결별하기에 이 같은 일들이 발생했을까. 알고 보면 허술할 수밖에 없는 관계이기도 하다. 연예인과 기획사의 경우처럼 구체적인 계약서로 이뤄진 관계가 아니다. 일단 함께 일을 하면서 “A 씨가 내 에이전트를 맡고 있다”고 선수가 공표하면 그걸로 관계가 공식화된다. 그런데 선수는 얼마든지 마음대로 철회할 수 있다. 1년간 에이전트가 가져오는 결과물을 지켜본 뒤 마음에 들지 않으면 연말에 “이제 당신은 내 에이전트가 아닙니다”라는 내용으로 팩스 한 장만 보내면 관계가 종료된다. 이처럼 선수와 에이전트는 근본적으로 연결고리가 약하다. 따라서 멀쩡하게 에이전트를 두고 있는 선수에게 접근해 “내가 더 좋은 조건에 계약시켜줄 수 있다”는 식으로 회유하는 사례가 많이 나올 수밖에 없다.
이처럼 안정되지 않은 직업인데도 불구하고 꽤 많은 수의 젊은이들이 에이전트가 되기를 꿈꾸는 이유는 무엇일까. 대체로 선수 계약이 성사되면 총금액의 4~10%를 에이전트가 가져간다. 그다지 높지 않은 비율이지만 몸값 자체가 높은 선수의 경우엔 에이전트의 수입도 커질 수밖에 없다. 대표적인 사례가 ‘기업’ 수준으로 평가받는 메이저리그 에이전트 스캇 보라스다. 미국에선 A급 선수의 다년계약 규모가 1억 달러(약 1200억 원)를 넘는 경우도 흔하다. 5%만 적용한다 해도 선수 한 명에 따른 에이전트 수입이 수십억 원이 되는 셈이다.
에이전트의 능력에 따라 선수 운명이 바뀌는 경우도 있다. 한화 구대성이 뉴욕 메츠에 입단할 때의 일이다. 당시 구대성은 메츠가 아니라 뉴욕 양키스에 입단하는 것으로 계속 보도됐다. 구대성의 에이전트를 맡았던 조 아무개 씨가 국내 언론과 접촉하면서 계속 “양키스와 입단 계약의 마무리 협상을 하고 있다”고 발표했기 때문이다. 미국 최고 인기팀인 양키스에 한국인 선수가 처음 입단하는 사례였기 때문에 연일 대서특필됐다. 그런데 사건이 발생했다. 하루 전까지만 해도 양키스 입단이 확정됐다고 믿어졌던 구대성이 뉴욕 메츠와 계약을 완료했다는 소식이 당시 주말에 미국 언론을 통해 보도된 것이다. 결과적으로 한국의 모든 언론이 보름 가까이 계속 오보를 낸 셈이 돼버렸다. 당시엔 구대성이 말을 아꼈지만, 훗날 한국에 돌아온 뒤에는 “에이전트가 엉망으로 일을 진행해 화가 정말 많이 났었다”고 털어놓기도 했다.
선수가 에이전트에게 피해를 준 사례도 있었다. 미국에 진출했지만 평소 팀 내 행실이 나빠 구단 프런트와 동료들 사이에 ‘문제아’로 찍힌 경우였다. 한번 이런 일이 생기면 구단은 해당 에이전트가 훗날 다른 선수를 추천했을 때에도 “믿을 수 없다”면서 거절하기도 한다. 그래서 요즘 똑똑한 에이전트들은 제아무리 대단한 선수라 해도 평소 인성에 문제가 있다고 판단되면 파트너가 되는 걸 꺼린다. 눈앞의 이익을 따라가다가 더 중요한 미국 및 일본 구단과의 관계를 망칠 수 있기 때문이다.
김형기 야구전문 프리랜서