붉은 악마들 이번엔 ‘광화문보다 집’
▲ 박지성 | ||
조별 예선에서 탈락한 지난 2006년의 아쉬움 때문일까. 혈기 왕성한 젊은 피를 중심으로 한 허정무 호의 전술 때문일까. 이번 2010 남아공 월드컵에 시민들이 거는 기대는 남달랐다.
설문조사에 참여한 시민들의 35%가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이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내다봤다. 축구 광팬이라며 설문에 응한 20대 남성은 “존재감 있는 아르헨티나를 뺀 나이지리와 그리스를 상대로 2승은 올릴 수 있으리라 본다”며 한껏 마음을 부풀렸다. 나머지 21%는 8강 진출을, 15.3%는 4강 진출을 예상했으며, 2010 월드컵에서 대한민국의 우승을 꼽은 시민들도 11.4%에 달했다. 한편, B조를 G조 못지않은 죽음의 조로 생각하는 시민들도 있었다. 아르헨티나와 나이지리아에 비해 우리나라의 전력이 솔직히 약하다는 것이다. 17.3%에 달하는 시민들이 조별 예선 탈락으로 대한민국이 16강 진출에 실패할 것으로 예상했다.
그렇다면 16강에 올라갈 B조의 두 나라는 어디일까. 설문에 응한 시민들의 50%는 아르헨티나가 조 1위, 대한민국이 조 2위로 16강에 진출할 것으로 봤다. ‘메시-아게로-테베즈’가 버티고 있는 아르헨티나에게 조 1위를 빼앗는 건 어렵지 않겠냐는 것이다. 대한민국이 조 1위, 아르헨티나가 조 2위로 진출한다고 예상한 시민들도 32.8%에 달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국민에게 첫 골을 선사할 선수를 묻는 질문에는 세 명의 선수가 박빙을 이뤘다. 맨체스터 유나이티드에서 활약하고 있는 박지성이 26.5%, 대한민국 대표 유망주 기성용 24%, 세 경기 연속 골을 넣으며 AS모나코의 주전으로 자리매김한 박주영이 21%를 나타내 박지성이 근소한 차이로 1위를 차지했다. 그러나 가장 기대되는 선수로는 기성용이 30%를 기록해 박지성(28.5%)을 제치고 1위에 올랐다. 자신을 현재 축구 선수라고 밝힌 한 20대 남성은 “기성용 선수는 어린 나이임에도 박지성 선수 못지않은 기량을 자랑하고 있다”면서 “이번 2010 월드컵에서 꼭 기성용을 주목하라”는 말을 남겼다.
16강 진출과 첫 골에 대한 기대만큼이나 허정무호에 승선할 태극전사 11명이 누가 될 것인지도 관심이 높았다. 허정무 감독의 선발에 앞서 시민들의 바람으로 구성해본 ‘국가대표 베스트 11’을 선정해봤다.
대표팀이 ‘4·4·2’ 포메이션을 쓴다고 가정했을 때, 공격수 2명에는 박주영(42%) 이동국(20%)이 시민들로부터 가장 많은 지지를 받았다. 박주영에게 한 표를 던진 30대 남성은 “결정적인 순간에 늘 제 몫을 했다”며 “이번 월드컵에서도 ‘박 선생’ 다운 감각적인 패스와 문전 돌파를 기대한다”며 응원을 보냈다. K리그 MVP, 최다득점왕의 영광을 안으며 재기에 성공한 이동국에 대해서는 K리그에서 보여준 기량 이상으로 월드컵에서도 큰 활약을 펼칠 것이란 기대가 높았다.
미드필더 4명을 뽑는 질문에선 박지성(34%), 기성용(21%), 이청용(17%) 김남일(17%)이 나란히 이름을 올렸다. 시민들은 2002년 4강신화의 주역에 대한 믿음 못지않게 최근 유럽에 진출한 젊은 기둥들이 보여줄 활약상에 대해서 큰 기대를 가지고 있는 모습이었다.
유럽의 강호팀을 대적할 막강 수비수로는 이영표(30%), 차두리(19%), 오범석(10%), 곽태휘(10%)가 뽑혔다. 이영표의 경우 중년의 축구팬들이 가장 많은 지지를 나타낸 부분이 특징. 메시의 날카로운 골 시도도 척척 막아낼 것 같은 믿음직한 골키퍼의 영광은 이운재(60%)에게 돌아갔다. 스티커를 붙이는 시민들은 “2002년 4강 신화를 달성할 때 승부차기를 막아낸 후 보인 듬직한 웃음을 기억하고 있다”며 한 표씩을 보탰다.
광화문을 가득 메웠던 붉은 열기, 올 월드컵 때도 마찬가지일까. 스티커 조사만으로 가늠해 본다면 어려울 듯싶다. ‘집에서 가족들과 응원하겠다(41%)’가 가장 많은 표를 얻었고, 광화문이나 월드컵 경기장과 같은 ‘광장의 응원’은 12%에 지나지 않았다. 28%의 지지를 얻은 응원 기대 장소는 다름 아닌 호프집이었다.
2010 남아공 월드컵에서 촉각을 다투는 접전을 명쾌하게 풀어 줄 시민들이 원하는 해설위원은 누구일까. 차범근, 황선홍 감독과 박문성(SBS), 서형욱(MBC), 신문선 해설위원에 대한 선호도를 비교해 봤다. 이 질문 역시 연령대 별로 답변에서 뚜렷한 차이가 나타났다. 중년의 시민들에게 몰표를 받은 차범근 감독은 47%의 높은 지지를 이끌어냈다. 20대 시민들은 황선홍 감독(24%)이나 ‘박서토크’로 인기를 끄는 박문성과 서형욱 해설위원에게 스티커를 붙였다.
올해 월드컵 우승팀을 예상하는 설문에는 대한민국(41%)이 1위를 차지했다. 애국심 강한 대한민국 시민으로서 “아무리 못해도 어떻게 다른 나라를 찍느냐”며 태극기 위에 스티커를 붙이는 모습이 인상적이었다. 애국심보다 객관적인 예측을 중요시하는 축구팬들은 우승 후보로 스페인(31%)에 가장 많은 표를 붙였다.
이외에도 ‘죽음의 조’라 불리는 G조에 속한 북한이 어떤 경기를 보여줄 것인지의 여부도 시민들의 큰 관심을 불러일으켰다. 월드컵 때 직접 남아공에 갈 예정이라는 20대 축구팬은 “축구의 재미는 원래 ‘헝그리정신’에서 빚어지는 기적 같은 승리를 보는 것이다”며 “정대세가 득점포를 가동할 것으로 본다. 무릎이 부러져도 후반 20분을 뛰는 것이 북한 대표팀이다. 강호 팀을 상대로 어떤 ‘악바리’ 근성을 보여줄 것인지 기대된다”고 말했다.
6개월 남짓 남은 월드컵이지만 시민들이 보내는 응원 열기는 벌써부터 뜨거웠다. ‘박지성, 박주영 너희들 둘만 믿는다’ ‘박지성 4강도 가고 장가도 가세요’ ‘이청용 한 번 보여줘’ 등의 특정 선수들에 대한 응원메시지서부터 ‘허벅지 터질 때까지 열심히 해주세요’ ‘밥은 먹고 댕기셈(다녀라)’ ‘너무 욕심내지 말고 매 경기 나아지는 모습을 기대합니다’라는 따뜻한 메시지도 이어졌다. 반면 ‘박지성만 기억하는 세상…나머지 선수들 힘내세요’라며 스타플레이어가 아닌 국가대표선수단 전체에게 힘을 고르게 실어주자는 한 축구팬의 따끔한 지적도 눈에 띄었다.
나에게 월드컵이란?
'국민명절' '욕데이' '외박자유의 날'
시민들에게 4년 마다 돌아오는 월드컵은 어떤 의미일까. ‘나에게 월드컵은?’이란 질문으로 자유게시판을 설치한 결과 연령대 별로 각종 기상천외한 답변이 쏟아졌다.
중·고등학생들의 경우는 ‘모의고사가 망하는 지름길, 외박이 합법적으로 가능한 날, 아래층 아줌마가 시끄럽다고 우리 집에 오는 날’이란 답변이 눈에 띄었다. 성인 남성들은 ‘유일하게 눈물을 흘릴 수 있는 날’이라 응답하기도 했고 ‘여자친구와 외박할 수 있는 날’이라는 흑심을 듬뿍 담은 응답도 있었다. 군 입대를 앞둔 한 훈련병은 월드컵은 ‘시간을 빨리 가게 할 마술’이라는 웃지 못 할 한마디를 남기기도 했다.
성인들은 ‘맥주소비량이 최고치를 달성하는 날’, ‘이상형을 마음껏 볼 수 있는 날’, ‘마음껏 욕할 수 있는 날’, ‘친목 모임이 많아지는 이산가족 상봉의 날’이라고 답했다. 월드컵이 4년마다 돌아오는 활력소인 것은 연령과 성별에 좌우되지 않았다. 답변으로 ‘전국이 붉게 물드는 국민 명절’, ‘즐거운 밤샘거리’ ‘실컷 함성 지르는 날’이라는 응답이 다수를 차지했기 때문이다.
정유진 인턴기자 kkyy1225@gmail.com
손지원 인턴기자 snorkle@paran.com
K리그 사령탑들의 메세지
▲ 왼쪽부터 최강희 전북현대 감독,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 허정무 월드컵 대표팀 감독 | ||
최강희(전북 현대 감독)
월드컵을 나가서 보면 ‘당연히’ 한국보다 만만한 팀은 단 한 팀도 없을 것이다. 매스컴이나 팬들은 가능성을 점치고 대표팀 성적을 예상하게 되는데 막상 그곳에 가 보면 예상치 못한 변수들이 나타나기 마련이다. 그러나 지금의 대표팀이라면 젊은 선수들의 기량이 상당하고, 전술적으로도 발전한 부분이 많아 충분히 기대를 해볼 만하다.
어느 팀보다도 첫 경기에서 만나는 그리스전이 굉장히 까다롭고 어려울 것 같다. 그리스는 수비가 강하고 역습을 위주로 공격해 나가는 팀이다. 반대로 우리 대표팀은 그런 팀에 고전을 면치 못하는 모습을 보여 왔다. 그리스전만 잘 넘긴다면 2002년처럼 한국이 또 다시 월드컵 무대에 돌풍을 일으키며 16강 진출도 이뤄낼 것이라고 믿는다.
신태용 (성남 일화 감독)
월드컵 16강에 진출하기 위해선 대표팀만 잘해선 안 된다. 협회, 연맹, 그리고 구단 관계자들이 모두 한마음이 돼 대표팀을 지원해줘야 한다. 사실, 2002년 때처럼 대표팀 선수들이 자주 모일 수는 없다고 해도 그 비슷하게는 모여서 조직력을 키워야 한다. 그렇게 하려면 구단 이기주의를 벗어던지고 대표팀을 위해 마음을 모으는 게 중요하다. 이런 시스템에서 국민들의 뜨거운 응원까지 합해진다면 16강 진출은 어렵지 않을 것이다.
황선홍 (부산 아이파크 감독)
무엇보다 현지 적응력이 중요하다. B조의 조편성이 무난하다는 시각도 많은데 만만히 볼 팀이 한 팀도 없다. 특히 고지대 적응 능력이 16강 진출을 좌지우지하는 중요한 요인이 될 수도 있다. 그 부분을 얼마나 철저히 준비하느냐에 따라 우리 대표팀이 가시밭길을 가는지, 아니면 지름길을 가는지가 갈릴 것이다.
개인적으로 그리스보다는 나이지리아가 복병이 될 가능성이 크다고 본다. 아프리카 지역에서 열리는 경기인 데다 흑인 특유의 탄력감은 우리가 상대하기 벅찬 점들이 있다. 경기 당일 가장 좋은 컨디션을 유지하는 것도 관건이다. 소속팀에서 충실히 게임을 소화하며 컨디션을 조절하는 게 중요하다. 게임을 뛰는 것 자체가 훈련의 연장선상이기 때문이다.
조광래 (경남 FC 감독)
현재 대표팀 선수들의 플레이를 보면 두려움이나 위축된 모습을 찾아볼 수가 없다. 여유로움이 느껴질 정도다. 상대팀에 따라 수비 형태를 바꿔가며 조율해 나가면 해답이 나올 것이다. 맨유에서 뛰는 박지성도 있고 나이 어린 ‘젊은피’ 이청용 등 기량이 좋은 선수들이 많아 어느 해보다 월드컵에 대한 기대치를 한껏 드높여도 후회하는 일은 없을 것이다.
허정무 (월드컵대표팀 감독)
이천수, 안정환 문제는 시간이 필요하다. 우리는 두 선수를 계속 지켜보고 있다. 특히 이천수는 이영표를 통해 수시로 체크하는 중이다. 국제대회 경험이 많은 선수들이라 좋은 모습을 보이고 있다면 대표팀에 안 부를 이유가 없다. 단, 이천수는 좀 시간이 필요하다. 국민들도 냄비 끓듯 일희일비하지 마시고, 대표팀에 대해 꾸준한 애정을 갖고 비판과 격려를 해주셨으면 고맙겠다.
이영미 기자 riveroflym@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