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돈과 일이 분리되니, 꿈이 이루어지더라”…알파고 시대 보완하는 이상적 제도로 주목
사실 이런 급진적인 발상은 스위스에서 처음 시작된 것은 아니다. 이미 많은 유럽 국가에서 비슷한 기본소득안을 검토하거나 시험 중에 있었다. 독일도 그런 나라 가운데 하나다. 이미 독일에서는 2년째 한 시민단체의 주도 하에 ‘기본소득으로 살아보기’ 운동이 이뤄지고 있었다. 이른바 ‘1000유로의 자유’다. 최근 <슈테른>은 매달 1000유로(약 130만 원)를 지급받고 있는 사람들의 사례를 소개하면서 과연 기본소득이 사람들의 삶을 어떻게 바꾸었는지에 대해 보도했다.
베를린의 온라인 사업가인 미하엘 보마이어. 그는 웹사이트 ‘마인-그룬트아인콤멘’을 통해 2년째 ‘기본소득으로 살아보기’ 운동을 진행하고 있다. 이른바 ‘1000유로의 자유’다.
함부르크 인근에서 싱글맘으로 살아왔던 아스트리트 로브라이어(52)는 항상 돈에 쪼들렸었다. 때문에 지금까지의 인생은 늘 양손을 놓고 자전거를 타는 것처럼 위태롭기 짝이 없었다. 팍팍하게 살던 그녀에게 행운이 찾아온 것은 지난해 12월이었다.
여성관련단체에서 사무직을 맡고 있던 그녀는 직장 동료의 권유로 베를린의 웹사이트인 ‘마인-그룬트아인콤멘(mein-grundeinkommen.de)’에서 진행하고 있는 ‘기본소득 지원자 모집’에 참가 신청서를 제출했다. 이 웹사이트에서 약속하고 있는 기본소득은 1년간 월 1000유로(약 130만 원)씩, 총 1만 2000유로(약 1500만 원)였다. 물론 일을 하든 안 하든, 또 나이가 몇 살이든 아무런 조건 없이 독일 국민이라면 누구나 신청할 수 있었다.
로브라이어는 처음에는 자신이 당첨되리라고는 별로 기대도 하지 않았다. 하지만 이게 웬일. 놀랍게도 그녀는 추첨에 당첨됐고, 지난해 12월 처음으로 통장에 1000유로가 송금된 걸 보고 나서야 당첨 사실을 실감했다. 통장에 찍힌 숫자를 보고 그녀가 처음 느낀 감정은 ‘안정감’이었다. 그녀는 “크리스마스를 앞두고는 늘 돈이 부족했었는데 이제는 선물을 살 수 있을 만큼 돈이 충분했다”고 말했다.
그럼 그녀는 갑자기 생긴 1000유로의 공짜돈으로 무엇을 했을까. 물론 그녀가 직장을 그만둔 것은 아니었다. 또한 오랜 세월 절약이 몸에 배어 있었던 탓에 돈을 흥청망청 쓰지도 못했다. 대신 강림절 파티를 열거나 자전거 한 대를 구입하거나 1+1으로 판매하는 안경을 구입하는 등 소소한 지출을 하는 데 만족했다.
그러던 어느 날 그녀는 오랜 세월 가슴 속에 비밀처럼 묻어왔던 꿈 하나를 불현듯 떠올렸다. 추도사 낭독가가 되고 싶었던 오래된 꿈을 용기내서 실현해보기로 마음 먹었던 것. 매달 지급되는 기본소득 덕분에 현재 그녀는 생활비 걱정 없이 일주일에 5일씩 추도사 낭독 교육을 받고 있다.
그녀는 기본소득을 받기 시작하면서 스스로에게 이렇게 물었다고 말했다. ‘진짜 어떤 인생을 살고 싶은가?’ ‘꿈은 무엇인가?’ ‘어디서 행복을 찾을 것인가?’ 그녀는 “이런 질문들이 나를 움직였다. 나는 뛸 듯이 기뻤다”고 말했다.
기본소득을 받고 생활이 나아진 것은 비단 로브라이어의 경우뿐만은 아니었다. 어떤 사람은 오랫동안 앓던 질병을 치료하는 데 어느 정도 효과를 봤다. 카셀에 거주하는 마크 반더(29)의 경우가 바로 그랬다.
그는 크론병 환자다. 2006년 고등학교를 졸업할 무렵 크론병 진단을 받았던 그는 대학에 진학했지만 지속되는 증상에 중도에 학업을 포기해야 했다. 병을 앓기 시작하자 사회생활도 제대로 할 수 없었다. 은행원이 되기 위해 인턴 과정을 시작했지만 동시에 진행되는 호르몬 치료 때문에 시간제 근로자로 일할 수밖에 없었다.
하지만 더욱 큰 문제는 병원비였다. 밑빠진 독에 물 붓는 식으로 지출되는 병원비 때문에 생활은 점점 궁핍해져갔다. 그러던 중 2015년 8월 ‘마인그룬트아인콤멘’ 단체의 기본소득을 받게 되면서 숨통이 트였다. 반더는 “무거운 짐을 떨구어낸 기분이었다”라고 말했다.
그는 용기를 내서 은행에 사표를 제출하고 곧 건강을 되찾는 데 주력했다. 기본소득으로 일주일에 3회씩 심리치료를 받기 시작했던 그는 자가면역질환의 일종인 크론병을 심리적 원인에서 찾는 데 집중했다. 그는 “내 심리 상태와 질병이 서로 연관이 있다는 사실을 알게 됐다”고 말했다. 스트레스에서 해방되고 마음이 편안해지자 곧 상태는 호전됐다. 생존에 대한 불안감을 해소한 그는 이제는 더 이상 호르몬제를 복용하지 않고 있다. 그는 “기본소득이 나를 해방시켰다”라며 고마운 마음을 표현했다.
그렇다면 로브라이어와 반더의 꿈을 가능케 한 이 기본소득은 어떤 식으로 제공되는 걸까. 2014년 중반 베를린의 온라인 사업가인 미하엘 보마이어가 시작한 이 파격적인 기본소득의 재원은 크라우드 펀딩을 통해 마련된다. 누구든 웹사이트를 통해 1유로(약 1300원)부터 1만 2000유로(1500만 원)까지 자유롭게 기부할 수 있으며, 1년 분의 기본소득 액수인 1만 2000유로가 모이면 신청자들 가운데 추첨을 통해 당첨자를 선정한다. 마치 복권에 당첨되는 것과 같은 식이다. 성인이라면 누구나 참가할 수 있으며, 14세 미만의 아동인 경우에는 부모가 대리 신청할 수 있다.
처음 시작한 지 1년 만에 아무 조건 없이 기본소득의 혜택을 받은 사람은 15명에 달했으며, 2년이 지난 현재까지는 모두 42명이 기본소득의 행운을 누렸다. 기부자들도 꾸준히 증가하고 있다. 지금까지 보마이어의 단체에 기부한 사람은 4만 4000명을 넘어선 상태. 매주 새로운 사람들이 기부에 동참하고 있으며, 앞으로도 이 수는 꾸준히 늘어날 전망이다.
보다 살기 좋은 세상을 만드는 것이 목표라고 말하는 보마이어는 기본소득이 왜 중요한지, 그리고 왜 돈과 노동이 분리되어야 하는지에 대해 “머지 않아 로봇이 인간의 일자리를 대체하게 될 것이기 때문”이라고 말했다. 다시 말해 가까운 미래에는 일자리가 부족해지고 이로 인해 실업자들이 증가할 것이므로 서둘러 새로운 살 길을 모색해야 하는데 이때 도움이 되는 것이 바로 기본소득이라는 것이다.
실제 많은 경제학자들도 비슷한 전망을 내놓고 있다. 자율주행 자동차, 무인 드론, 인공지능 로봇 등이 숙련된 전문노동자를 대체하게 될 것이라는 것이다. 또한 이렇게 되면 전문직 노동자들은 저임금 일자리를 수용할 수밖에 없게 되며, 이에 따라 전반적으로 모든 사람들이 빈곤에 시달리게 될 것이라고 내다보고 있다. 이에 기본소득안을 주장하는 사람들은 이런 불안한 미래를 보완하는 가장 이상적인 제도가 바로 기본소득이라고 말하고 있다. 경제가 지속적으로 성장하기 위해서는 꾸준한 소비가 바탕이 되어야 하기 때문이다.
사실 기본소득 제도는 독일뿐만 아니라 이미 유럽 몇몇 국가에서 오래 전부터 논의 혹은 검토되어 왔다. 핀란드의 경우 내년부터 시범적으로 1만 명에게 월 550유로(약 70만 원)를 지급하는 방안을 논의하고 있으며, 2년 동안 진행한 후 성공적이라고 판단이 설 경우 정식 도입할 예정이다. 그런가 하면 네덜란드 역시 내년부터 지역별로 기본소득제도를 시험할 예정이다.
독일에서는 2005년부터 유명 생활용품유통업체인 ‘데엠(DM)’의 창업주이자 독일 100대 부호인 괴츠 베르너가 기본소득을 주장하고 나섰다. 그가 주장하는 핵심 내용은 ‘기본소득을 보장하되, 기업이 부담해야 하는 사회적 비용을 덜어주자’는 것이었다. 다시 말해 소득세, 법인세 등의 직접세는 폐지하고, 대신 모든 세금을 부가가치세로 통합해서 기본소득의 재원을 마련하자는 것이다. 그리고 국민연금을 비롯해 실업연금, 사회보조금 등을 통합해 기본소득으로 분배하면 1인당 800유로(약 104만 원)씩 지급이 가능하다고 주장했다. 그러면서 베르너는 이렇게 기본소득을 지급하면 “모든 사람들이 일을 하면서도 행복해질 것”이라고 말했다.
그렇다면 일부의 우려처럼 혹시 기본소득, 다시 말해 공짜돈을 받게 되면 사람들은 다니던 직장을 그만두고 게을러질까. 독일의 ‘응용경제연구협회’가 실시한 설문조사를 보면 이런 우려는 과장된 것일지도 모른다. 응답자들 가운데 70%는 기본소득을 받아도 계속해서 일을 하고 싶다고 답했다. 여기에 덧붙여 대부분의 사람들은 기본소득으로 생활에 여유가 생기면 보다 많은 시간을 가족이나 친구들과 보내거나 취미생활을 즐기면서 보내고 싶다고 응답했다. 단, 평균 노동 시간은 지금보다 줄이고 싶다고 답했다.
초등학생 두 자녀가 있는 평범한 가정의 경우를 보자. 오버슈바벤에 거주하는 올가 침머는 워킹맘이다. 그녀는 간호사며, 남편은 기업의 판매부에 근무하는 직장인이다. 침머 부부는 현재 집을 지으면서 융자받은 대출금을 갚고 있으며, 자동차 두 대, 애플TV박스, 만능조리기구인 ‘테르모믹스’ 등 젊은 부부가 갖추고 있는 살림살이는 거의 대부분 보유하고 있다. 부족한 것 없는 생활이지만 단 한 가지는 늘 부족했다. 바로 ‘서로를 위한 시간’이 그것이었다. 침머는 “나는 늘 스트레스에 쌓여 있었다”고 말했다.
그도 그럴 것이 살림과 직장 생활을 동시에 하고 있던 그녀는 마치 투잡을 뛰고 있는 것 같은 기분으로 늘 시간에 쫓기었다. 게다가 살림은 보수도 없는 데다 할 일은 많지만 인정해주는 사람은 없는 맥빠지는 일이었다. 하지만 초등학생 아들인 로빈이 ‘마인그룬트아인콤멘’의 기본소득에 당첨되자 생활은 눈에 띄게 달라졌다. 현재 아들이 받고 있는 기본소득의 대부분을 가족 여행을 하는 데 사용하고 있는 침머 부부는 덕분에 가족끼리 친밀감이 더 생겼다고 말하고 있다.
이처럼 지난 2년간 ‘마인그룬트아인콤멘’의 기본소득을 받은 사람들의 생활은 전반적으로 긍정적으로 변했다. 돈으로 스트레스를 받지 않게 되자 더 많은 시간을 가족과 친구와 보내게 됐으며, 배우고 싶었던 걸 배우거나 만성적인 질병을 고치는 데 집중하게 됐다.
과연 기본소득은 많은 경제학자들이 값비싼 망상이라고 비난하는 것처럼 위험한 시도일까. 독일의 작은 시민단체가 관찰하고 있는 바에 따르면 아직까지는 이런 우려는 기우인 것만 같다.
김민주 해외정보작가 world@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