걸그룹이 우리팀을 뭉치게 하리라~
주장은 철밥통이 아니다. 시즌 중간이라도 팀 성적과 부상 여부 등 팀이 처한 상황에 따라 감독의 판단 아래 바뀔 수 있는 것이 주장의 위치. 때문에 수년 동안 주장의 자리를 지키는 선수는 경기장 밖에서 선수들을 이끄는 리더십과 더불어 그라운드 위 팀 공헌도가 높은 ‘모범생’ 중의 모범생으로 통한다. 8개 구단 중 가장 오랫동안 현역 주장을 꿰찬 모범생은 누굴까.
정답은 이숭용(39·넥센 히어로즈). 생긴 건 그다지 모범생답지 않지만(?) 그는 현대 유니콘스 시절부터 5년째 줄곧 완장을 차왔다. 히어로즈가 재정적인 문제로 이택근(30·LG 트윈스), 장원삼(27·삼성 라이온즈), 이현승(27·두산 베어스)을 다른 팀에 보낸 후 젊은 신인들이 주축이 된 상황에서 주장 이숭용의 역할은 절대적이다.
9일 두산 베어스와의 시범경기 전에 만난 이숭용은 핵심선수들이 빠져나간 상황에서 팀 분위기를 업시키고, 젊은 후배들과의 거리를 좁히려 노력하고 있었다. 이전 이숭용의 스타일은 후배의 잘못에 온갖 육두문자를 서슴없이 날리는 ‘김구라’, 즉 독설가형 리더였다. 그나마 그라운드 밖에서는 말수도 적어 팀원들에게는 더더욱 어려운 선배로 통했단다. 그런 그를 변하게 한 것은 막내들과의 소통 문제였다. 마운드 밖에서만큼은 후배들이 다가오기 쉽게 스스로가 ‘수다맨’이 되어야 했다.
“경기장 밖에서는 말이 없는 편이라 가만히 있으면 얼굴만 봐도 애들이 지레 겁을 먹거든요. 막내랑 저랑 스무 살 차이가 나니까 거리감을 안 느낄 수가 없죠. 그래서 우선 대화에 끼기 위해서 소녀시대, 원더걸스, 2NE1 같은 걸그룹 이름부터 외웠어요.”
혈액형별 성격을 연구해 후배들을 상대로 임상실험(?)을 해보기도 했다.
“선수들한테 다가갈 때 개개인의 성격을 존중하거든요. 해이해졌을 때 어떤 선수는 강하게 휘어잡아야 되는 반면, 어떤 선수는 강하게 찍어 누르면 할 말도 제대로 못해요. 그래서 혈액형별 성격을 공부했죠. 이 선수한테는 이렇게 해보고, 저 선수에게는 저렇게 해보고 어떤 게 효과적인지 몰래 테스트를 해봤어요.”
경기장 안에서는 이전의 직설법을 고수하되 노장, 베테랑 선수로서의 권위를 허물기도 했다. 통상 훈련을 할 때는 제일 앞에 신입을 세우고 고참 선배들은 뒤로 가는 것이 암묵적 룰. 하지만 그는 제일 앞에 서서 나이 많은 선배도 열심히 한다는 걸 보여주며 솔선수범을 통한 리더십을 이끌어내고 있다.
다음 최다 경력자는 3년 연속 롯데자이언츠의 주장을 맡고 있는 조성환(34). 그가 처음 완장을 찬 것은 2년 전 주장이었던 정수근(33)이 음주 폭행 혐의로 무기한 자격정지 징계를 받은 뒤 임시 주장으로 선임된 이후부터다. 그 후 골절상과 무릎 부상 등 건강상의 불운이 이어졌지만 꾸준히 팀을 이끌며 2년 연속 4강 진출의 성적을 거둬냈다. 제리 로이스터 감독이 일찌감치 그를 올 시즌 주장으로 지목할 정도로 그는 팀 내에서 리더십을 인정받고 있다.
조성환은 수다맨이 된 이숭용과는 반대로 고참 선수와 막내 선수 사이의 교량역할을 하기 위해 되레 말수를 줄였다. 선배에게도 합리성을 요구하고 자기 의사를 확실하게 전달하는 당당한(?) 신인급 후배들을 위해서다. 그는 대신 혀가 아닌 몸을 더 바쁘게 놀리는 중이라고 한다.
“후배들이 선배들 대하는 걸 보면 우리 때랑 너무 달라요. 일단 자기주장이 강해졌어요. 요즘 프로야구가 젊은 선수들의 활약이 두드러지다 보니 팀 내의 분위기를 막내들이 주도할 정도예요. 제가 신인 때는 박준태 선배가 주장이었거든요. 그 당시 워낙 카리스마 넘치게 분위기를 압도하다보니 아직도 눈을 제대로 못 쳐다봐요. ‘나도 나중에 주장하면 저렇게 돼야지’ 하곤 했는데 막상 선배가 되고 보니 후배 대하는 게 너무 어렵네요.”
항상 미간을 찌푸리고 있는 표정 때문에 ‘호통형 리더십’으로 통하는 한화 이글스 주장 신경현(35) 역시, 요 근래에는 후배들에게 ‘쉬운 남자’가 되기로 작정했다. 지난 시즌 꼴찌의 수모를 겪은 데다 김태균, 이범호가 빠져나가면서 축 처져 있는 팀 분위기를 띄우는 것이 가장 큰 숙제이기 때문이다. 후배들이 스스럼없이 다가와 고민을 털어놓게 하기 위해 재미있는 농담도 공부한다.
“한화 팬들이나 팀 동료들이 제 인상을 보고 항상 불만이 많은 거 같다고 말을 하잖아요. 그래서 저를 ‘호통형 리더’라 부르는데 그래서인지 식사시간이나 연습시간에 후배들이 먼저 다가오지를 않더라고요. 이번 시즌 한대화 감독님의 주문이 베테랑 선수들도 많이 은퇴했지만 2군에도 좋은 선수들이 많기 때문에 되도록 장점을 많이 살려주고 격려해가면서 시즌을 이끌어 나가자는 거였습니다. 그래서 후배들과 친해지려고 식사 때마다 미리 준비한 농담을 던지곤 하는데 후배들이 영 제 개그를 이해 못하네요.”
엄격한 선후배 관계를 중시했던 과거와는 달리 요 근래 각 팀 주장들이 후배들과의 벽을 허물기 위해 노력하는 것은, 선후배간 문턱이 낮아질수록 성적은 올라간다는 것을 깨달았기 때문이다.
지난 시즌 KIA 타이거즈가 건진 10년 만의 우승 역시 주장의 역할에서 그 동력을 찾는 시각이 지배적이었다. 주장 김상훈(33)이 이종범, 이대진 등의 고참선수들과 후배들 사이에서 중간자 역할을 잘 수행하고, 안방마님으로서 윤석민, 양현종 등 젊은 투수들의 기량을 최대한 극대화시켜낸 것이 우승의 결정적 요인이었다는 평가다.
그런 그가 리더로서 지켜 온 철칙은 엄격한 원칙주의다. 이종범과 같이 팀의 정신적 지주라 할 수 있는 고참선수들과, 열 살 이상 차이나는 후배들 사이에서 그가 팀원들에게 주문하는 것은 각 연령대에 적합한 역할에서 벗어나지 않도록 하라는 것이 유일하다. 그는 “고참은 고참답게 막내는 막내답게 팀 내 분위기를 이끌어 나갈 의무가 있다”며 자신의 원칙을 강조한다.
그가 고수하는 또 하나의 철칙은 팀 내에서 소외감을 느끼는 선수가 없어져야 한다는 것이다. 그는 언제나 스포트라이트를 받는 선수들 뒤편에서 개인 성적이 부진했던 후배들을 따뜻하게 독려하며 자신감을 불어넣는 일을 게을리 하지 않는다.
올 시즌을 끝으로 마운드를 떠나는 SK 김재현(35)은 양지가 아닌 그늘에 머무는 후배들을 챙길 줄 아는 포용력과 배려가 큰 장점이다.
김광현과 더불어 구단 최고 인기 선수인 그는 지난해 시즌 중 부상을 당한 박경완을 대신해서 주장을 맡게 됐다. 비록 ‘임시’ 주장이었지만 팀의 19연승을 이끌면서 팀 내 분위기도 완전히 장악했다. 올 시즌을 마지막으로 은퇴를 결심, 프로리그를 떠날 그는 “어린 후배들이 자의식이 강해 방어적이긴 해도 기특하다”면서 “마지막 시즌, 여태껏 그라운드에서 배워온 것을 후배들에게 아낌없이 주는 것으로 유종의 미를 거두고 싶다”고 말했다.
▲ 박용택 (LG 트윈스), 강봉규 (삼성 라이온즈), 손시헌 (두산 베어스) | ||
초짜 주장들의 출사표
이제 갓 완장을 찬 초짜 주장들은 어떨까. 지난 시즌의 활약을 발판으로 선배들을 제치고 올 시즌 첫 주장 자리에 오른 박용택(31·LG 트윈스)과 강봉규(32·삼성 라이온즈), 손시헌(30·두산 베어스).
지난 시즌 박용택은 생애 첫 타격왕에 올랐고 강봉규는 20홈런-20도루 클럽에 가입했다. 손시헌 역시 군복무를 마치고 돌아온 복귀 첫 해에 유격수 골든글러브를 수상하며 빠른 적응력을 보여줬다.
이렇듯 실력이야 주장이기에 부족함이 없지만 30대 초반의 나이를 생각해 볼 때 팀에 많게는 열 살 위의 고참 선배들을 어떻게 리드해 나갈지 이들이 준비한 리더십이 궁금해진다.
막 군대를 제대한 영향 때문일까 손시헌은 중간역할은 자신 있다는 표정이다. “팀 내 불화가 생기지 않게끔 갈등을 조율하는 것이 주장의 역할이 아니겠느냐”며 “선수생활을 하면서 느낀 것이 분위기가 붕 떠 있을 때는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는 사실이다. 그럴 땐 과감히 찬물을 끼얹어 팀의 집중력을 높일 수 있도록 노력할 것”이라고 말한다. 박용택과 강봉규 역시 “주장의 역할에 특별히 신경을 쓰다보면 오히려 집중력이 흐트러진다”며 “선후배 선수들과 많은 대화를 나누는 것이 좋은 주장이 되는 지름길이라 여긴다”고 말했다.
▲ 김성근, 김경문, 조범현 | ||
전력분석 손글씨로 꾹꾹
강한 남자로 보이는 프로야구 감독들에게도 소소한 징크스는 존재한다. 치밀한 전략 싸움이자 정신력 승부인 야구이기에 프로 감독들은 시즌 중 감정적으로 예민해지기 십상이라고 말한다. 그래서 사소한 것에도 부쩍 신경이 쓰인다는데 8개 구단 감독들이 털어 놓는 시즌 징크스는 무엇일까.
SK 와이번스 김성근 감독은 8개 구단의 기록을 손수 노트에 빼곡히 적어야만 한 시즌을 무사히 마칠 수 있다는 강박관념(?)에 시달린다. 개막 일주일 전에 모든 구단의 기록들을 수기로 작성해야 직성이 풀린다. 컴퓨터로 쉽게 뽑아낼 수 있지만 손으로 직접 써야 모든 기록들이 머릿속에 잘 정리되기 때문이다. 그렇지 않으면 시즌 초반부터 찝찝하다고 한다.
두산 베어스 김경문 감독은 경기가 있는 날 ‘신호 발’이 심리에 영향을 미친다고 소개한다. 차를 타고 가던 중 교통 신호가 일제히 파란불만 켜져, 멈춤 없이 운전할 수 있을 때 팀 선수들도 그날 경기에서 1, 2, 3루를 거침없이 뺑뺑 돌 수 있으리라고 생각한다는 것. 사소하지만 꽤나 신경 쓰이는 부분이다.
KIA 타이거즈 조범현 감독에겐 물건에 대한 징크스가 있다. KIA의 유니폼 색상과 같은 빨간색 라이터로 경기 시작 전 담뱃불을 붙이면 팀의 타선도 터진다는 생각. 지난 시즌 우연히 빌린 1회용 빨간색 라이터로 담뱃불을 붙인 후 KIA가 11연승을 달리고, 급기야는 우승까지 거머쥐자 조범현 감독은 올해도 빨간색 라이터의 효과를 믿어볼까 생각 중이다.
외국인 감독은 어떤 징크스를 가지고 있을까. 롯데 자이언츠 제리 로이스터 감독은 징크스라기보다 마음이 불안할 때는 미국 플로리다 주에 있는 가족들의 목소리를 듣는 것이 극복 방안이라 소개했다. 전화통화로 딸의 격려를 듣고 나면 마음의 안정을 찾아서인지 게임에 더 잘 집중이 된다고.
LG 트윈스 박종훈 감독은 징크스를 없애는 게 시즌 징크스라고 소개한다. 만약 습관적으로 뭔가를 해서 승리한다는 고정관념이 생기면 그것조차 스트레스가 될 것 같다는 답변이 돌아왔다. 그래서 행여 이런 행동, 물건 때문에 운이 좋아지지 않았나 생각되면 다음엔 같은 행동을 반복하지 않고 경기에 이겨 징크스의 조짐을 애써 떨쳐버리는 편이라고.
넥센 히어로즈 김시진 감독은 “최하위 팀이라는 굴레가 가장 신경 쓰일 뿐이다”며 “선수들 기용하는 문제에서부터 팀 분위기를 이끌어나가는 것까지 전력이 약해진 현실에서 어떻게 팀을 보강해 나갈지 막중한 심적 부담 이외에는 생각할 여력이 없다”고 말했다.
삼성 수석코치에서 한화 이글스 감독으로 올 시즌 첫 사령탑을 맡은 한대화 감독 역시 심리적 부담이 경기 집중력을 흐트러트리는 것일 뿐 아직 징크스를 논할 때는 아니라고 답했다.
손지원 기자 snorkle@ilyo.co.kr