봉투 두께가 승패 가른다굽쇼?
▲ 최근 고려대 전 감독의 심판 매수 사건으로 학원축구계가 술렁이고 있다. 사진은 기사의 특정 내용과 관련 없다. | ||
#고교ㆍ대학축구 가장 심각
프로와 아마추어 축구계를 오가며 활동하는 축구인 A 씨는 “선수들이 진로를 놓고 갈림길에 들어선 대학과 고교가 가장 큰 문제”라고 꼬집었다.
A 씨에 따르면 심판들에게 인사(?)를 하는 것은 당연한 관례라고 했다. 일반 대회에선 주요 순간에만 베팅에 들어가지만 고교나 대학 등 진로가 달려있을 때는 수시로 베팅할 수밖에 없다고 한다.
“액수가 많고, 적음을 떠나 (심판들의 뇌물 수수는) 암암리에 존재해왔고, 앞으로도 그럴 것이다. 좋은 성적을 내야 계약을 연장할 수 있는 지도자들이 은밀히 베팅을 한다. 열심히 잘 준비했음에도 미리 심판들에게 꾸준히 인사를 해온 상대 팀 지도자가 있다면 좋은 성적은 불가능하다. 이런 것을 지도자들은 ‘장사 망쳤다’고 표현한다.”
지도자들이 가장 회의를 느낄 때도 바로 이런 순간이다. 남들이 다 하니까 우리도 할 수밖에 없다는 사고 탓에 합리적이지 않다는 걸 알면서도 따라가야 한다는 사실이다.
‘남은 당해도 내가 당하면 안 된다’는 생각으로 16강, 8강전 등 결정적인 경기에 맞춰 일종의 모험을 하게 된다고 한다. 심지어 학부형들이 먼저 지도자를 찾아와 “우리 팀도 한 번 베팅이 필요하지 않느냐”고 물어오기도 한다니 정말 기가 막힌 노릇이 아닐 수 없다.
만약, 지도자가 학부모들이 제의한 베팅을 반대했다면? 아이러니하지만 오히려 “우리 팀 감독은 승리에 대한 의지가 없다” “능력이 부족하다” “현실 감각이 없다” 등등 여러 구설에 휘말리니 이러지도, 저러지도 못하는 난처한 상황에 놓이게 되는 셈이다.
그렇다면 뇌물은 언제 건네질까? 당연히 정해진 시기는 없다. 지도자들은 시도 때도 없이 이뤄진다고 한다. 수도권 모 고교 축구팀의 B 감독은 “설사 당초 원했던 성적을 내지 못하더라도 심판에게 밉보이면 큰일 난다. 특정 경기에서 불리한 판정이 계속돼 우리 선수들이 피해를 봤지만 해당 심판을 다음 대회에서 보지 않는다는 보장이 없다. 자존심이 상하더라도 일단 경기가 끝나면 다음(경기나 대회)에 ‘잘 봐 달라’는 뉘앙스를 풍기며 인사를 한 번 제대로 할 수밖에 없다”고 말했다.
#양쪽서 챙기면 무승부?
‘비리’ 심판들은 다양한 루트를 통해 수고비(?)를 전달받는다. 물론 지도자가 직접 봉투를 건네는 일은 거의 없다. 대부분 인맥과 학연 등 연관이 있는 하급 학교 지도자나 학부모 등 제3자에 의해 이뤄지곤 한다. 나중에 상급 학교 지도자는 자신에 도움을 준 하급 학교 지도자에게 직접적으로 금품을 주기보단 선수를 몇 명 입학시켜주는 정도로 보답을 한다.
일단 심판에 건네질 금품의 액수는 딱히 정해져 있지 않지만 100만 원대 이하의 적은 금액일 때는 대개 중학교 대회 혹은 특정 심판(주·부심)에 주어지는 경우이고, 수백만 원 대로 액수가 올라가면 심판진 전체에 돌아간다고 보면 된다. 선임 심판(혹은 위원장)이 이를 챙겨뒀다가 대회가 끝난 뒤 분배하는 형식으로 이뤄진다는 게 통설이다.
그래도 한 쪽에서만 금품을 챙기면 양반이다. 지방 모 고교의 C 감독은 “일부 악질적인 심판들은 두 팀 모두에게 받는 경우도 있다. 예선이라면 무승부란 결과를 희망할 수 있지만 승패를 내야 하는 경기에선 그제야 ‘공정한 판정’을 기대할 수 있게 된다. 일단 학원 축구에서 ‘힘 있는’ 쪽은 일선 지도자와 직접 뛰어야 하는 선수들이 아닌 심판들”이라고 전했다.
하지만 학원 축구 이상의 대회에서도 ‘은밀한 거래’는 이뤄지고 있었다. 비단 심판들뿐만 아니라 선수들이 직접 연계돼 있어 충격을 더하고 있다. 엄연히 스폰서가 있고, 타이틀까지 달고 있는 어느 상위 리그에선 지난해 막판 순위 싸움이 전개될 때 어느 특정 팀에서 순위 다툼과 관계없는 상대 팀의 주장과 고참 선수들에게 베팅이 들어갔다고 한다. 자신들을 상대로 너무 이를 악물고 뛰지 말아 달라는 식의 부탁과 함께. 다행히 해당 선수들을 내치는 것으로 사태는 그럭저럭 마무리됐지만 고려대 사건과 맞물려 언제 터질지 모르는 시한폭탄과도 같다는 게 축구인들의 공통된 생각이다.
일선 고교 팀의 D 감독은 “제도 자체를 바꿔야 한다. 썩은 곰팡이를 조금 긁어낸다고 해서 달라지는 건 없다. 고려대 사태도 ‘고려대’니까 예상보다 파장이 커졌을 뿐이다. 누구 한 명 희생양으로 만들었지만 변하진 않을 것 같다. 심판들과 지도자들의 처우부터 개선해야 조금 달라질 것”이란 부정적 견해를 내비쳤다.
#상장이 대체 뭐기에…
충청권 중학교 팀의 E 감독은 상장 한 장을 위해서 무리수를 둔다고 했다. “우린 계약이 곧 생계를 의미한다. 학원 축구 지도자들은 거의 대부분이 1년 단위로 계약을 갱신하는데 대회마다 반복하진 않지만 심판에게 부탁을 하고, 위험을 감수할 시기가 꼭 찾아온다. ‘목구멍이 포도청’이다보니 우리도 불법인 걸 알지만 이를 뿌리칠 만한 용기가 없다.”
일단 기본 목표는 4강권 진입이다. 당연히 모두가 우승을 목표로 삼지만 4위까지 들어갈 수 있다면 다행이다. 행여 트로피는 놓치더라도 학교 측에 영구히 기록이 남는 ‘상장’을 타면 한 해를 마친 뒤 학교 측과 재계약 논의를 할 때 나름대로 목에 힘을 줄 수 있다.
사실 <일요신문> 취재 결과, 일선 축구인들은 별도 토너먼트 대회뿐만 아니라 축구협회가 최대 숙원 사업으로 추진하고 있는 초·중·고 주말리그에 대해서도 불만이 많았다. ‘공부하는 축구’라는 취지 자체는 공감하지만 매주 토요일에 경기를 동시에 열다보니 자질이 떨어지는 심판을 종종 목격하게 된다는 것.
지도자들은 “경기 수가 많은데 반해 심판 숫자가 적다보니 마구잡이식으로 투입된 경우를 자주 본다”며 “뻔히 보이는 파울도 제대로 구분하지 못하는데 할 말이 없었다. 단순히 심판 교육을 1~3등급으로 나눌 게 아니라 인성부터 좀 더 진지한 교육이 필요한 시점이다”라고 입을 모았다.
주말리그 심판 배정 문제도 불만의 대상이었다. E 감독은 “충청권에서 경기를 하면, 충청도 심판이 배정되고 전라도에서 경기를 하면 전라도 심판이 배정되는데 솔직히 원정 팀 입장에서 보면 공정하다는 느낌을 받기 어렵다. 설령 별 탈 없이 경기가 진행되더라도 좋지 않은 시선으로 심판을 바라보게 된다”고 고개를 저었다.
모 고교 팀 F 감독은 “그나마 작년부터 조금씩 바뀌긴 했다. 심판들이 경기 전날에는 숙소 밖을 나갈 수 없게 돼 비리의 여지가 많이 줄었다. 물론 인터넷이나 휴대전화 한 통이면 서로 연락을 취할 수 있겠지만 2년 전에 비해 훨씬 양호해졌다는 느낌을 받는다”고 말했다.
다수의 축구인들은 심판에 대한 금품 제공은 예전에도 있었고, 지금도 이뤄지고 있고, 또 앞으로도 계속될 것으로 내다봤다. 이것이 바로 2010남아공월드컵 16강 진출이란 장밋빛 청사진을 내걸고 있는 한국 축구의 슬픈 자화상이다.
심판들의 고달픈 삶
최근 불거진 후배들의 비리 사태를 바라본 ‘원로 심판’ 김인수 전 대한축구협회 심판위원장(66)의 안타까운 한마디였다. 김 전 위원장은 “심판은 직업이 될 수 없다. 명예직일 뿐 돈벌이 수단이 아니다. 몇 명 때문에 모두를 한통속으로 몰아넣어선 안 된다”고 꼬집었다.
물론 대부분이 그렇다. 모두가 ‘비리’란 틀에 묶일 수 있는 건 아니다. 사실 심판의 삶은 고달프다. 아무리 잘해야 본전인 ‘그저 그런’ 삶. K리그 경기장에선 항상 “심판, 눈 떠라” “정신 차려! 심판!”이란 서포터스의 외침이 들려온다.
“나도 한 가정의 남편이고, 아빠인데 욕을 먹고 싶겠느냐?”는 모 주심의 항변은 축구 심판들의 애환이 오롯이 녹아 있다.
돈벌이를 생각했다면 심판이란 길을 택할 수 없다. 한국이 일본축구협회처럼 연봉 1억 5000만 원 이상을 주고 전임 심판제를 운용하는 것도 아니다. 사실 심판을 ‘선수 출신’만 뽑는 것도 아니다. 자격 요건에 특별한 제한 사항이 없는 만큼 그냥 축구가 좋아 심판이 된 경우가 적지 않다. 현재 축구협회에는 국제심판 27명을 포함해 대략 4600여 명이 등록돼 있다. 이는 1~3급과 풋살 심판을 모두 합친 숫자.
어떤 대회를 나가도 약간의 출장비와 수당을 받는 게 전부. 심판 수입만으로는 생활이 불가능하니 대부분이 주업이 따로 있는 ‘투잡족’이다. 심판이 금전적 유혹에 약하다는 불편한 시선도 그래서 나온다. 비리가 터질 때마다 ‘(심판) 기술만 강조하다 정작 인성 교육을 하지 못했다’는 질타가 쏟아진다.
그러나 이보다는 근본적인 시스템이 문제라는 지적이다. 한 대회를 나가면 열흘, 보름 이상 머물러야 하는데 평범한 직장인이 개인 사업체를 운영하지 않는 이상 마음 놓고 심판 활동에 전념할 수 있는 환경이 아니다.
현직으로 활동 중인 한 심판은 말했다. “품위 유지비니, 뭐니 수당 몇 푼 올려준다고 달라지지 않는다. 처우 개선을 요구하는 것도 아니다. 다만, 우리를 평범한 사람으로 봐줬으면 좋겠다. 물론 심판에 대한 다양한 교육 프로그램과 함께 선발 과정부터 철저한 검증을 한다면 지금의 답답한 상황이 조금이나마 나아지지 않을까 싶다.”
남장현 스포츠동아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