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요신문과 함께 전설로 크다
▲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 ||
#‘강진’과 같았던 92학번
허 위원의 말대로 92학번의 출현은 7.5 이상의 강진과 비교된다. 그들은 야구계의 선입견과 편견을 송두리째 무너트렸다. 그 가운데 대표적인 게 ‘한국인은 절대 메이저리그에 진출할 수 없다’는 이른바 메이저리그 신화를 깨트린 것이다.
공주고 출신의 박찬호는 한국인 최초로 메이저리그 무대를 밟았다. 1994년 LA 다저스와 계약하고서 바로 빅리그로 진출한 박찬호는 다저스 시절 시속 160km의 강속구를 던지며 ‘코리안 특급’으로 맹활약했다. 2002년 텍사스 레인저스와 5년간 6500만 달러에 계약했을 땐 명실 공히 빅리그를 대표하는 투수가 됐다. 그러나 이후 허리부상으로 별다른 활약을 하지 못했다. 지난해 내셔널리그 우승팀인 필라델피아 필리스에서 불펜투수로 재기에 성공한 박찬호는 올 시즌 메이저리그 최고 명문구단인 뉴욕 양키스와 계약했다. 마지막 꿈인 월드시리즈 반지를 끼기 위해서다.
박찬호가 메이저리그 진출의 물꼬를 텄다면 조성민은 대학졸업 후 국내 프로 무대를 거치지 않고 곧장 일본프로야구에 진출한 최초의 선수였다. 신일고 출신의 조성민은 1995년 고려대 졸업과 함께 일본 최고 명문구단인 요미우리 자이언츠에 입단했다. 1998시즌 7승을 거두면서 팀의 중심투수로 성장하는가 싶었다. 그러나 다음 해부터 팔꿈치 부상으로 내리막길을 걸었다. 2002년 선수 생활을 마감하고 귀국한 뒤 2005년 한화에 입단했지만 별다른 성적은 내지 못했다. 톱스타 최진실과 결혼했다가 이혼한 조성민은 현재 재혼해 스포츠에이전트 회사를 운영하고 있다.
92학번의 뛰어난 투수 가운데 박찬호, 조성민을 능가했던 이는 단연 임선동이었다. 1989년 고교 1년생으로 봉황대기대회 우수투수에 뽑히며 주목을 받은 임선동은 1991년 LG로부터 해태 선동열 연봉의 5배에 이르는 계약금 5억 원에 입단 제의를 받았다. 그러나 연세대 졸업과 동시에 다이에(소프트뱅크의 전신) 호크스와 입단계약을 체결했다. ‘제2의 선동열’로 불린 임선동을 1차 지명구단인 LG가 순순히 보내줄 리 없었다. LG와의 법정소송으로 결국 그의 일본진출은 좌절됐다. 1997년 뒤늦게 LG 유니폼을 입은 임선동은 1999년 현대에 둥지를 틀고 2000년 18승으로 다승왕에 올랐다. 그러나 2001년 14승 이후 부상과 부진을 거듭하다가 2007시즌을 끝으로 은퇴했다.
현재는 서울에 살며 개인 사업을 준비 중이다. 어렵게 수소문한 끝에 만난 임선동은 근황을 묻는 기자의 질문에 “평범한 가장으로 조용히 살고 있다. 조만간 야구계에 돌아와 못다 한 이야기를 털어놓겠다”며 말을 아꼈다. 임선동의 지인은 “부동산 재벌이라는 항간의 소문과 달리 항공사 승무원 출신의 아내와 알뜰히 살고 있다”며 “원체 자존심이 강해 말은 하지 않지만 야구계를 많이 그리워하는 것 같다”라고 귀띔했다.
▲ 92년도 <일요신문> 창간호. | ||
박찬호 조성민 임선동 등 이른바 ‘빅3’가 오른손 투수 일색이었다면 차명주는 92번을 대표하는 왼손 투수였다. 경남상고-한양대를 졸업한 차명주는 1996년 당시로는 파격적인 5억 원의 계약금을 받고 롯데에 입단했다. 2006시즌이 끝나고 FA(자유계약선수) 신분임에도 전격은퇴를 선언한 차명주는 “돈에 연연하지 않고 명예롭게 은퇴하겠다”는 자신의 오랜 꿈을 행동으로 실현했다. 현재는 재활 전문가로 변신해 서울에서 ‘젬 휘트니스’를 운영하고 있다. 얼마 전부터는 MBC ESPN의 ‘날려라 홈런왕’에 코치로 출연 중이다.
부산고 출신의 염종석은 입단 첫해였던 1992년 17승 9패 6세이브의 뛰어난 성적을 올리며 신인왕과 투수 골든 글러브 그리고 우승컵을 동시에 거머쥐었다. 그러나 당시 무리한 경기 출장으로 어깨 수술을 수차례 받은 이후 성적이 조금씩 하락하다가 2009년 은퇴했다. 현재는 롯데 2군 투수코치로 활약 중이다. 대구상고 출신의 전병호와 원주고 에이스였던 안병원도 각각 삼성 1군 불펜코치와 원주고 감독으로 지도자생활을 하고 있다.
대전고 출신의 정민철 역시 친정팀 한화에서 투수코치로 활동 중이다. 1992년에 빙그레(한화의 전신)에 입단한 정민철은 통산 161승 128패, 10세이브, 평균자책 3.51의 성적을 남기고 지난해 시즌 도중 은퇴했다. 92학번이긴 하지만 정민철은 1972년생이다. 충남중 3학년 때 대전고에 진학할 요량으로 1년 유급했다.
#비운의 92학번 스타들
92학번 출신들이 모두 성공만 한 것은 아니다. 1992년 이후 실패를 맛본 이들도 꽤 된다. 대표적인 이가 경기고 출신의 손경수다. 시속 140km 중후반 대의 강속구와 횡으로 꺾이는 슬라이더가 일품이었던 손경수는 고교졸업반 때 대학과 프로의 치열한 스카우트전에 휘말렸다. 당시 OB는 계약금 2억 원을 제시하며 그의 스카우트에 안간힘을 썼다. 그러나 대학 졸업 뒤 프로에 입단해도 늦지 않는다고 생각한 손경수는 미련 없이 홍익대를 선택했다.
93년 아버지가 오토바이 사고를 당해 장기치료를 받아야 할 처지에 놓이자 손경수는 대학에 자퇴서를 내고 그해 OB에 입단했다. 하지만 자기관리 실패와 간염이 겹치며 1군 무대에 한 번도 모습을 내밀지 못한 채 95년 임의탈퇴 선수가 됐다.
김태룡 두산 이사는 “손경수는 뛰어난 재능과 훌륭한 체격으로 해마다 10승 이상이 가능했던 투수”라며 아쉬움을 나타냈다. 90년대 후반 김 이사는 손경수로부터 한 차례 연락을 받은 바 있다. “다짜고짜 ‘다시 야구를 하고 싶다’고 애원하기에 ‘일단 몸부터 만들어야 하지 않겠느냐’고 했다. 그런데도 ‘볼보이라도 좋으니 야구장에만 들어가게 해달라’고 졸라 ‘구단 사무실로 찾아오라’고 설득했더니 그 다음부터 연락이 오지 않았다.” 손경수는 광주에서 식당과 카페를 하다가 대전에서 일용직 노동자로 생활하는 것으로 알려졌다.
신일고 시절 전국대회에서 타율 4할2푼1리의 놀라운 타격으로 ‘초고교급 거포’로 불렸던 설종진도 비운의 92학번 스타다. 중앙대 입학 후 야구장의 제초작업을 한 뒤 잔디를 소각하다가 양다리에 3도 화상을 입은 설종진은 2년 동안 투병했다. 96년 2차 드래프트 2순위로 현대에 입단했지만 신경을 살리려고 피부를 이식했던 양다리의 후유증으로 재능을 꽃피우지 못했다. 현재는 넥센 2군 매니저로 제2의 인생을 살고 있다.
이밖에 박종호 최원호(이상 LG) 박재홍(SK) 최기문(롯데) 송지만(넥센) 이영우(한화) 김종국(KIA) 등은 아직 현역에서 뛰고 있다.
박동희 스포츠춘추 기자