하지만 의사도 예상하지 못하는 다른 변수가 있다. 약과 약뿐 아니라 약과 음식 사이에도 ‘인연 아니면 악연’의 궁합이 있다. 평소 즐겨먹는 특정 식품과 여기 ‘악연’ 관계가 있는 약품을 함께 먹을 경우 약효가 반감된다. 특히 진통제와 술처럼 상극관계인 식품의 경우 부작용은 치명적일 수도 있다. 약을 구입할 때는 보통 금기식품을 함께 표기해 주는데 이런 주의사항은 반드시 지키는 게 좋다.
약이 우리 몸 안에서 제대로 ‘약값’을 하기 위해서는 흔히 먹는 약과 흔히 먹는 음식, 혹은 영양제 사이의 궁합 정도는 상식적으로 알아둘 필요가 있다.
▶감기약과 유제품: 사람들이 가장 흔하게 접하는 것이 감기약과 소화제. 그만큼 흔한 질환이고 약도 쉽게 구할 수 있다. 일반적으로 감기약과 어울리지 않는 식품은 우유 제품이다. 감기약이나 변비약에 들어 있는 ‘테트라사이클린’ 성분이 유제품과 결합하는 상호작용이 일어나 정작 몸에서 흡수할 수 있는 약성분은 20∼30%로 뚝 떨어지기 때문이다. 특히 물이 없더라도 우유로 대신하는 것은 넌센스다.
▶소화제와 유제품, 과일쥬스, 탄산수: 아진탈과 노루모 같은 소화제나 속 쓰릴 때 먹는 제산제 역시 우유 치즈 요구르트 등의 유제품과는 어울리지 않는다. 유제품 속의 칼슘 성분이 약물의 흡수를 방해하는 것. 따라서 소화제, 감기약 등을 복용할 때는 복용 후 2시간 이상 지난 뒤에 유제품을 먹는 것이 좋다.
제산제는 과일쥬스와 함께 먹지 말아야 한다. 특히 오렌지쥬스는 제산제의 알루미늄 성분을 체내에 흡수시켜 부작용을 일으킬 수 있다. 산성과일쥬스나 탄산소다는 제산제가 장에 이르기 전에 위에서 먼저 녹게 만들기 때문에 함께 복용하지 않는 것이 좋다.
▶비타민과 차 종류: 피부미용을 위해 여성들이 비타민제를 찾거나, 담배를 많이 피우는 남성, 수험생 및 어린이들까지 비타민제를 찾는 사람은 매우 많아졌다. 식품속에 들어있는 비타민이나 비타민 전구체라면 모르지만 약으로 만들어진 비타민을 복용할 때는 다른 식품속 영양소들과의 균형에 신경을 써야 한다.
비타민이 가장 싫어하는 음식은 차(茶) 종류다. 녹차 홍차 등에 함유된 탄닌 성분이 비타민제나 빈혈치료제의 고유성분을 변화시켜 약효를 떨어뜨리기 때문이다. 가끔 약을 커피나 차와 함께 먹는 사람이 있는데 이것은 아주 좋지 않다. 카페인이 다량 함유돼 있는 커피 홍차 우롱차 등은 강심작용이나 이뇨작용을 유발해 약효를 떨어뜨리거나 지나치게 강하게 만들 수 있다. 특히 위염이나 소화성 궤양으로 인해 약을 먹는 사람이 위액 분비를 촉진하는 카페인 성분의 음료를 마신다는 것은 약을 먹는 목적에 상반되는 일이다.
▶골다공증 치료제와 비타민D: 뼈를 튼튼하게 하고 골다공증을 예방하기 위해서는 비타민D가 많이 들어있는 식품이 권장되고 있다. 비타민D는 뼈에 긴요한 칼슘의 흡수를 돕기 때문이다. 비타민D가 많이 함유된 식품은 간유와 계란 노른자, 버터 등이다. 그러나 골다공증 치료를 위해 약을 먹고 있는 중이라면 비타민D가 들어있는 식품의 섭취에 신중을 기해야 한다. 혈중 칼슘 농도가 지나치게 높아지는 고칼슘혈증으로 다뇨 소갈 식욕부진 등 부작용이 나타날 수 있기 때문이다. 비타민D는 또 위염이나 소화성 궤양 치료제와도 상극이다. 같이 먹으면 대소변에 곤란이 생기면서 역시 고칼슘혈증을 일으키게 된다.
비타민을 과잉 복용하는 것도 문제를 부를 수 있다. 인하대병원 약물중독센터 노형근 소장은 “비타민B, C 같은 수용성 비타민은 용량을 초과해도 쉽게 몸 밖으로 배출되지만 A, D, E, K 같은 지용성 비타민은 수용성에 비해 배출이 어려우므로 적정용량을 초과하면 부작용을 부를 수 있다”고 설명한다.
▶항생제와 칼슘, 철분: 철분이나 칼슘은 모든 항생제류와 상극이다. 양쪽 모두의 약효가 크게 떨어져 약을 먹고도 약값을 전혀 기대할 수 없다. 철분제는 제산제와도 어울리지 않는다. 제산제는 위장 보호를 위해 일반적인 병원 처방에도 많이 쓰이는데 철분 흡수를 방해하는 성질이 있다. 반면 철분 함유 제제의 흡수율을 높이는 데는 산성주스가 좋다.
▶고혈압 약과 과일쥬스: 고혈압 치료제는 포도 자몽 오렌지 쥬스 같은 산성쥬스와 상극이다. 함께 먹을 경우 간 대사작용에 장애를 부르고 혈압을 지나치게 떨어뜨릴 위험이 있다. 바나나 치즈 청어 등도 고혈압 치료제와는 상극인 것으로 알려져 있다. 당뇨 치료제를 먹을 때는 흰설탕이나 조미료는 금물이다.
▶감기약, 진통제와 술: 술과 담배는 그 자체만으로도 건강을 헤칠 수 있지만 특히 몇몇 약 성분에 간섭할 경우 심한 피해를 가져올 수 있다. 타이레놀 등 ‘아세트 아미노펜’ 성분이 들어있는 약물은 술과 작용하면 치명적 위험을 부를 수도 있다. “사람에 따라 위험량은 차이가 나지만 아세트 아미노펜 성분의 약물을 술과 함께 과다섭취하고 간이 심하게 손상돼 실려오는 환자가 의외로 많다. 폭음하는 사람이나 알콜중독 증상이 있는 사람은 소량의 약물만으로도 치명적일 수 있다”고 노형근 소장은 말한다.
관절염의 경우처럼, 통증을 가라앉히기 위해 쓰는 대부분의 비마약성 진통제 역시 술과 상호작용하여 위, 간에 손상을 가져올 수 있다. 당뇨치료제를 복용중인 환자가 술을 마시면 안면이 붉어지거나 두통 메스꺼움 구토 등의 증상이 나타날 수 있다. 또한 혈당강하제는 술과 작용하면 혈당을 지나치게 떨어뜨리는 역효과를 부른다. 그밖에 수면제, 진정제, 일반 감기약 등도 술과는 상극이다. 술을 만성적으로 마시는 사람은 대개 약분해가 잘 안돼 효과를 기대하기 어렵다.
▶천식치료제와 담배: 흡연은 간의 효소작용을 증가시켜 대사를 촉진한다. 특히 천식 치료제는 약효를 발휘하기도 전에 대사되어 사라진다. 따라서 흡연자의 경우 약을 정량 이상으로 복용해야 효과를 볼 수 있다. 담배를 자제하는 것이 낫다.
처방전에는 ‘식후 30분, 식전 30분’등 약 먹는 시간까지 함께 처방하는 경우가 많다. 그 이유가 무얼까. “섭취한 약물은 소장에서 본격적으로 흡수되는데, 위에서 소장까지 얼마나 빨리 내려가느냐가 흡수율 및 약효를 좌우한다. 따라서 약물 흡수에 큰 지장이 없는 시간을 지정해 처방하는 것이다. 대개 식후 30분인데, 음식물이 약물 흡수에 방해를 줄 경우엔 ‘식전’으로 처방한다”는 것이 노형근 교수의 설명. 약물이 더디게 흡수되면 혈액 속에서 약효를 낼 수 있는 농도에 이르지 못해 결국 복용하지 않은 것과 진배없다.
노형근 교수는 “약물의 상호작용 가능성은 극히 일부만이 규명돼 있기 때문에 자기도 모르는 사이 약물 상호작용으로 인한 피해를 입을 수 있다. 약물 복용을 줄이는 것이 최선의 예방책”이라고 말한다. 각종 치료제를 처방하면서 한약이나 기타 생약제를 함께 먹지 말라는 주의도 잊지 않는다. 한방 약재의 성분이나 효과에 대해서는 양의학 분야에서 연구된 바가 거의 없어 어떤 상호작용이 있는지 알려진 게 거의 없기 때문이다.
윤은영 건강정보작가